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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㉗ 20개월 만에 만난 가족
첨부파일 -- 작성일 2023-01-31 조회 34
 

20개월 만에 만난 가족

경찰이 나를 체포하려고 여전히 혈안이 되어있었다. 수배 생활이 20개월을 넘기면서 나 자신도 지쳐있었다. 김종배 동지는 가끔 집에 들러 아버지와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위로했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전해주는 편지에 김종배 동지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한 걸 보면 많은 신뢰를 받았나 보다. 19961월 금속연맹이 출범하고 보름쯤 지난 어느 날, 김종배 동지가 안산 우리 집에 다녀와서는 애들이 아빠 보고 싶어 하니 한번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애들 본 지가 스무 달이 넘었으니 나 또한 보고 싶었다. 수배 중에 생각해보니 나는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아이들 자랄 때 단 한 번도 내 무르팍에 앉혀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미 애들은 안아주기엔 너무 커버렸다.

점심을 같이하기로 하고 주말에 가족을 만나기로 했다. 김종배 동지는 아내와 애 둘을 데리고 반복된 소독(보안)을 통해 나랑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타났다. 내가 운전하는 차에 나를 포함 다섯 명이 타고 식당을 찾아가는데 왠지 느낌이 이상하여 룸미러와 백미러를 주시하다 보니 내 차를 따라오는 승용차는 수시로 바뀌는데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교대로 쫓아오는 승용차는 4명이나 5명씩 탑승하고 있는데 운전석 옆엔 여성이 타고 있었다. 상대방이 안심하도록 위장한 듯한데 너무 티가 났다. 짧은 시간에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승용차 7대와 권총에 포위돼 체포

중앙선을 U턴하여 연세대 안으로 들어가면 잡히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애들 보는 앞에서 쫓고 쫓기는 영화 같은 장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우는 순간 나를 쫓아오던 승용차 7대가 내 차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그리고 폭력 영화에서 범인을 체포하는 장면처럼 경찰들은 자신들의 승용차 뒤로 가서 권총을 겨누며 양규헌! 꼼짝 마!” 하고, 한 명은 내 차 옆으로 다가온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리려고 하는데 경찰이 내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눈다. 주먹을 꽉 쥐고 권총을 겨눈 경찰관 아구창을 후려갈기며 한마디 했다. “이런 촌놈의 새끼가 어디에다가 총질을 해? 개새끼들!” 김종배 동지는 작지도 않은 몸을 흔들며 난리를 치고, 중학생이던 애들까지 합세해 아수라장이 된 사이 도로에는 순식간에 수십 명의 구경꾼까지 몰려들었다. 거의 끝난 상황인데 문제를 키울 이유가 없어서 김종배 동지에게 그만하자고 했다. 주머니에 잡히는 것과 없애야 할 수첩과 메모지와 담배까지 순간적으로 김종배 동지와 애들에게 넘기고 경찰들이 타고 온 차에 탔더니 수갑을 채우려고 덤벼든다. 나는 경찰들에게 만약에 차 안에서 수갑을 채우면 경찰서까지 가는 동안 다같이 죽을 수 있으니 현명하게 판단하라고 했다. 결국 수갑을 차지 않은 채 경찰서에 도착해서 생각해보니 없애야 할 걸 못 없앤 게 하나 있는데 수배 기간 써왔던 다른 사람의 신분증이었다. 화장실에 간다는데 졸졸 쫓아온다. “똥 싸는데 안에까지 쫓아올 거냐고 했더니 바깥에 있겠단다. 화장실 들어가자마자 지갑에 있던 신분증을 잘근잘근 씹어봤지만 구겨지긴 하는데 씹히진 않았다. 그대로 변기통에 집어넣고 물을 내렸다. 변기통이 막혀서 신분증을 발견한다고 해도 이제 그 면허증은 나와 무관한 것이다. 20개월 동안 여러 차례 사용했던 운전면허증은 그렇게 나와 이별했다.

 

항의하는 동지들 뒤로 하고 방배서로

안산경찰서 앞에서는 언제 모였는지 동지들이 항의집회를 하고 있어서 소리가 경찰서 안에까지 들렸다. 경찰은 나를 뒤쪽으로 빼내서 방배경찰서로 향했다. 동지들은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지 모른 채 계속 항의하고 있었다.

방배경찰서 도착하자마자 면회 온 김말룡 의원과 차 한 잔 나누고 있는데 또 누가 오고 가고 어수선했다. 기본조사는 받을 게 별로 없고, 경찰이 주목하는 것은 어디에 기거했냐였다. 수배 중일 때 미리, 잡히면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권영길 위원장과 약속해둔 바 있다. 그래서 도피처에 대해서도 묵비를 하려다가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안전을 위해서 주로 경찰서 가까운 곳에 안가를 두고 있었고, 내가 머문 곳이 15군데가 넘는데 서울 시내 경찰서 옆에는 거의 다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조사하던 경찰관이 방배경찰서 옆에도 있었냐고 묻는다. 나는 방배경찰서 옆에서만 6개월 있었다.”고 답했다. 사실 방배경찰서 옆에는 한 번도 안가를 정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조사는 갑자기 중단됐고, 잠시 후 과장인가가 오더니 방배동 쪽엔 안 왔다고 하면 안 되겠냐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진실만 얘기하는데 나보고 거짓말하라는 걸로 이해해도 되냐?”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뒤늦게 면회 온 동지들 만나고 노동부 근로감독관들 만나고 어쩌고 하면서 하루가 지났다. 이튿날 경찰 간부가 커피를 타와서 담배를 주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외람되지만 머물렀던 곳이 서울 시내 여러 학교 총학 쪽이었다고 할 수 없겠냐?”고 묻는다. 생각해보겠다 하고 며칠 있다가 묵비로 처리하라고 했다. 경찰들 표정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

‘3자 개입에 대한 조사를 한답시고 노동부에서 나와 이것저것 묻는다. 내가 답을 하지 않으니 자기들도 노력한 흔적은 남겨야 해서 좀 있다가 가겠다고 한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전화기 좀 빌리자고 해서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아버지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엄격했던 아버지에게 야단맞을 각오하고 죄송하다고 했는데, 의외로 인자하신 목소리로 아무쪼록 너나 몸조심해라라는 말씀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었고, 그 후에는 아버지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경찰, 노동부, 검찰 조사 모두 묵비였다. 경찰이나 노동부와 달리 검찰 조사는 집요했다. 조사는 일종의 기 싸움이었는데, 불리해지면 말을 안 하면 되니 묵비가 편했다. 나중엔 계속 묵비하면 조직사건으로 엮을 수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는데, 능력 있으면 엮어보라고 했다. 물론 그들이 마음먹으면 엮을 수 있었겠지만, 전노협 위원장을 조직사건으로 엮어버리면 그 조직의 위상도 달라질 수 있으니 그렇게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나에 대한 공소장에는 1994년 임단투 방향 및 투쟁지침 등 마련과 결의대회 개최, 전기협·서울지하철·금호타이어·대우기전·만도기계·쌍용자동차노조 파업 등에 3자 개입금지, 집시법 위반 등의 딱지가 붙었다. 나는 서울구치소 독방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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