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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노동조합 공정방송 쟁취 위한 파업투쟁
시기 : 1992년 9~10월
MBC 공정방송 쟁취 투쟁의 배경과 성격
문화방송(MBC)노조는 일찍이 공정방송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 왔다. 단체협약으로 ‘보도·편성·TV기술국장 등의 추천제’와 ‘공정방송 협의회’를 확보한 바 있다. 그러나 1990년 KBS방송자주화 투쟁 이후 MBC측은 기존 단체협약을 모두 무시한 채 독단적이고 파행적인 방송운영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편파방송을 관철하기 위해 MBC노조 위원장을 해고하는 등 철저히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비민주적 탄압을 자행했다.
이에 MBC노조는 1990년 이후 자행된 폭력 앞에서 공정보도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노동조합을 사수하고, MBC방송이 5공화국 시절의 관영방송·제도언론으로 회귀하는 것을 막기 위한 비장한 투쟁에 나섰다.
특히 대통령선거 국면이 이미 시작된 시기로 집권 여당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불공정·편파 보도가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민주정부 수립의 전제가 되는 공정선거를 크게 해칠 불공정 보도 문제가 범국민적인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MBC노조의 공정방송 쟁취를 위한 파업은 단순한 노사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공정방송을 통해 실제적인 사회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한 중요한 투쟁이었고, 공정 보도를 열망하는 범국민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파업투쟁 주요 쟁점
문화방송은 4월 28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기까지 38차례의 교섭을 진행했으나, 주요 쟁점조항에서 노사가 팽팽히 맞서 왔다.
회사는 추천제와 공정방송협의회 등 공정방송 관련 조항의 삭제, 전임자 무급 조항 신설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노조 말살을 꾀하는 개악안”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특히 편성·보도·TV기술국장 등에 대한 추천제와 관련해 회사는 “인사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노조는 “1989년 단체협상에서 노사가 합의한 제도를 제대로 시행도 안 해본 채 폐지하자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반박했다.
단체교섭과 병행해 진행된 임금교섭에서도 노사는 총액임금 5% 인상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맞섰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8월 7일 “회사 안을 받든지 말든지 결정하고 각자 알아서 갈 길을 가자”며 일방적으로 대화를 거부했다. 이어 회사는 8월 14일 총액임금 5% 인상을 강행, 1월부터 소급해 지급했다. 이러한 회사측 움직임에 대해 노조는 “교섭 상대인 노조를 무시하는 심각한 도발”로 간주하고 14일 비상대의원대회를 소집해 88% 찬성으로 쟁의발생을 결의했다.
또한 노조는 8월 7일 교섭회의에서 해고자 안성일·김평호의 복직을 요구했으나, 회사는 거부했다. 이날 최창봉 사장은 “해고무효소송을 여러분이 제기했으므로 법대로 하라”고 말해 조합원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노조는 지속적으로 △공정방송협의회와 관련한 국장 추천제 폐지와 전임자 무급 등 개악안 철회 △안성일·김평호 등 해고자 조속한 복직 △임금 일방적 인상 철회 및 임금 재조정 등을 회사측에 요구했다.
파업투쟁 진행 경과
문화방송 노사의 대립은 1990년 9월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노조 간부를 해고하고 단체협약 사항을 무시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최창봉 사장이 1990년 9월 4일로 예정됐던, 우르과이라운드의 문제점과 농촌 현실을 다룬 ‘PD수첩’의 방송 연기를 지시하자 담당 PD들과 노조 간부들이 사장실을 방문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우르과이라운드가 범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9월 7일 농민대회를 앞둔 시점에서 ‘PD수첩’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회사는 2주일이나 지난 9월 18일에 이를 방영했고, 당시 노조 안성일 위원장과 김평호 사무국장을 ‘위계질서 문란’ 등의 이유로 해고했다. 노조는 해고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사원 서명운동 등을 통해 두 노조 간부의 복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회사측에 의해 거부당해 왔다.
한편 회사는 1991년 8월 24일 추천제를 무시한 채 보도국장과 TV기술국장에 대한 일방적인 인사를 단행, 단체협약의 백지화를 꾀했다. 추천제는 1990년 9월 체결된 단체협약의 핵심조항으로, 방송의 핵심 실무책임자인 보도국장·편성국장·TV기술국장에 대해 사원이 3명의 후보를 추천하면 그중의 한 명을 회사가 임명토록 한 제도다.
1990년 12월 ‘해고 효력을 다투는 신분’으로 안성일이 다시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된 뒤, 노조는 1991년 4월 회사측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7차례에 걸친 노조의 교섭 제의를 모두 거부했다. 해고노동자를 교섭 상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해고자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 노조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노조 집행부는 1991년 5월 1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 1992년 1월 말까지 무려 9개월 동안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나 회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1992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최창봉 사장의 유임이 결정되자 노조는 농성을 풀고 위원장 직무대행체제로 전환해 조직을 정비했다. 조직을 정비한 노조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난 뒤 회사에 단체교섭을 재차 요구해 회사측도 마침내 대화를 수락, 1992년 4월 28일 상견례를 시작으로 38차례 교섭을 진행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노조에 대해 오히려 자극적인 태도로 일관, 파업을 유도했다. 노조가 파업을 돌입하자 회사는 공권력 투입을 요청해 이른바 ‘방송대란’이라 불리는 침탈을 감행했다.
1992년 MBC노조 공정방송 쟁취투쟁 일지
4월 28일 2년 6개월만에 첫 교섭재개하여 노사 단체교섭 임금협상 상견례
6월 8일 추천제·공정방송협의회 폐지, 전임자 무급, 임금 6% 인상 등 사측이 제시
8월 14일 사측 39차 교섭회의 거부, 임금 5% 일방 인상, 비상대의원대회 쟁의 결의
8월 17일 노조 쟁의발생 신고
8월 24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알선, 노조 불참
8월 25일 노사 간 임시교섭 결렬
8월 27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조정위원회 “현행안 좋은 것 같다”는 의견 표명
9월 1일 파업 찬반투표에서 92% 투표, 84% 찬성
9월 2일 파업돌입, 직권중재 회부
9월 14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직권중재
9월 15일 지방 11개 MBC 파업돌입
9월 19일 회사측 이완기 위원장직무대행 등 노조 간부 15명 고소
59개 시민사회단체, ‘MBC 정상화와 공정방송실현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결성
9월 21일 검찰 1차 소환. 범국민대책회의 ‘MBC정상화와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국민대토론회’
9월 22일 노조, 최창봉 사장을 임금 불법 인상으로 맞고소
9월 23일 노조, 직권중재 재심 신청
9월 24일 검찰 2차 소환
9월 25일 회사측 30명 징계 회부, 언론노련 ‘MBC노조 투쟁지지 전국언론인대회’
9월 26일 범국민대책회의, 공정방송 촉구 가두 홍보
9월 28일 1차 구인시도, 3당 대표회담에서 MBC 노사대화 촉구
범국민대책회의 ‘MBC 정상화와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시청자대회’
9월 29일 2차 구인시도
10월 1일 중앙노동위원회 재심 기각, 성경환 등 1차 징계자 발표
10월 2일 백지연 등 2차 징계, 13개 중대 1,600여 명의 경찰 등 공권력 투입
피고소인 11명과 평조합원 187명 강제연행, 평조합원 187명은 석방되고, 피고소인 11명 중 이완기 직무대행, 박영춘, 최상일, 손석희, 정찬형, 이채훈, 함윤수 등 7명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 4명은 불구속 입건
10월 3일 비상대책위원회 발족
10월 4일 송신소, 시설운용부, 관련 회사 조합원까지도 파업 참여
10월 5일 범국민대책회의 ‘공정방송 실현과 MBC 경찰난입 규탄대회’ 및 가두캠페인
10월 6일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전국 방송인대회
10월 7일 서울 MBC, 지방문화방송노동조합협의회(지문노협) 전체집회
10월 8~9일 부문별 MT, MBC 공권력 투입 규탄과 공정방송실현을 위한 결의대회
10월 10일 기자협회보 가두 배포
10월 12일 흥사단에서 조합원 총회
10월 13일 PD 연합회보 5만 부 가두 배포
10월 14일 구속자 7명에 대한 구속적부심 신청
10월 15일 MBC, KBS, 지방MBC 등, 공정방송 쟁취를 위한 전국 방송인 결의대회
구속적부심에서 최상일 부위원장과 이채훈 선전홍보부장 석방
10월 16~17일 명동·종로·신촌 등에서 사진전, 가두서명, 모금활동
10월 17일 ILO기본조약 비준 노동법 개정과 해직교사 원상복직을 위한 국민걷기대회
10월 21일 기자협회․범국민대책위 ‘공정방송을 위한 평화대행진’
오후 파업 타결
범국민대책회의 결성과 활동
MBC노조는 1992년 9월 2일 파업투쟁 돌입 이후, 노조 창립 이래 가장 많은 조합원의 참여하는 열기 속에 질서 있게 투쟁을 전개했다. 지방 MBC노조도 9월 15일부터 동조파업에 돌입,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MBC노조의 공정방송 쟁취투쟁은 범국민적 사안인 공정 보도 문제를 정치적 사안으로 부각했다.
따라서 공정방송에 대한 여론을 확산하고 공정방송 쟁취투쟁에 범국민적인 참여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제 민주·시민단체의 신속하고 조직적인 활동이 우선적으로 요구됐다. 따라서 한시적이나마 연석회의 수준의 대책회의를 상시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지원활동을 보다 집중·체계화하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이었다.
이에 경실련, NCC언론대책위, 민예총, 업종회의 등 20여 개의 운동단체 대표자들은 9월 16일 오후 프레스센터에 모여 ‘MBC 정상화와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를 결성하고 9월 19일 공식 출범했다.
범국민대책회의는 기본적으로 시민운동단체 및 학계, 종교계, 여성계, 보건의료계, 문화예술계, 법조계, 그리고 전노협, 업종회의 등의 노동계와 전국연합 등 공정방송 실현에 뜻을 같이하는 모든 민주단체가 참석할 수 있도록 최대한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회의는 주 1회 정도를 기본으로 하되 필요 시 소집하기로 했다. 일상적으로는 단체의 대표성을 지닌 간부의 참여를 전제로 하고, 중요회의나 기자회견 같은 사안에는 가급적 대표자가 참석하기로 했다.
상임대표는 김찬국 연세대 전 부총장, 실행위원장은 유재천 교수, 부실행위원장은 정동익 민언협 의장, 신대곤 경실련 조직위원장, 임진택 민예총 사무처장이, 사무처장은 김성수 YMCA 조직부장이 맡았다.
범국민대책회의 사업은 MBC노조의 파업의 정당성을 홍보하면서 파업을 지지·지원하고, 공정방송의 사회적 필요성을 범국민적으로 부각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범국민대책회의는 사업의 기본방향을 △MBC노조 공정방송 쟁취투쟁 지지 성명서 및 기자회견 △공정방송 촉구 대국민 선전물 제작 및 대국민 선전전 △공정방송 촉구 공청회, 서명운동과 지지광고, 성금조직, 독자투고, 항의전화, 격려방문 등 각종 격려·지원활동 △공정방송 촉구 항의방문(공보처 등)과 집회로 설정했다. 구체적으로 9월 16일 ‘MBC노조 공정방송 투쟁지지 성명서의 채택과 MBC노조 공정방송투쟁 지지, 교섭 촉구, 공권력 투입반대 등을 담은 기자회견’을 조직했고 9월 19일 전국 동시다발로 ‘공정방송 촉구 대국민선전’을 실시했다.
한편 전노협은 10월 20일 노동법개정 투쟁의 활성화와 정부의 언론통제에 따른 MBC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 노조 대표자 결의대회를 조직했다. 전국노동조합 대표자들은 결의대회에서 MBC노조의 파업투쟁을 지지·지원하고, 공정방송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확보와 노동법의 민주적 개정을 요구하는 투쟁 결의를 드높였다. 146개 노조와 대표자 207명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MBC 최창봉 사장과 정부는 방송장악 기도 즉각 중단 및 MBC노동조합의 정당한 요구 즉각 수용, 경찰병력 즉시 철수하고 구속간부 석방 △자본과 정권은 노동법개악 기도 중단, ILO기본조약 비준하고 ILO공대위의 노동법 개정요구 즉각 수용 △택시노동자·전자통신연구소 등에 대한 노동 탄압 즉시 중단 등을 촉구하며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했다.
투쟁의 성과
MBC 노사는 10월 21일 △국장추천제 폐지 대신 공정방송협의회 운영규정을 강화해 국장에 대한 해임건의제 신설 △해고자 본인들의 사과가 선행되면 회사는 적극 검토 △회사측 사과를 전제로 수용 등에 합의했다.
MBC노조는 핵심 쟁점 사항이었던 ‘보도·편성·TV기술국장의 임명’, ‘전조합원 추천제를 현행 단체협약에서 삭제’토록 양보하는 대신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공정방송협의회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분위기를 확보했다. 불공정·편파 시비가 집중될 것으로 보이는 대통령선거 국면에 실질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공정방송협의회에 회부된 3국장에 대해 불공정 프로그램 책임 여부에 대해 노사의견이 동수더라도 사유가 인정되면 사장이 노조 쪽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으며, 특히 같은 국장이 3개월 안에 두 차례 이상 노조에 의해 보직변경 요구를 받으면 사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수용한다는 조항을 확보했다.
MBC노조를 중심으로 전개한 공정방송 쟁취투쟁은 1990년 한국방송공사의 방송민주화 투쟁이 공권력에 의해 짓밟힌 뒤 공정 보도 실천 의지가 위축돼 가던 상황에서 언론노조운동의 위기의식을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로 되살려 방송장악 기도의 기세를 꺾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특히 노조는 파업을 통해 1990년 당시 해고된 노조위원장과 사무국장의 복직에 대해 원칙적 합의를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노조 자체를 무시하던 회사의 태도를 상당 부분 바꿔놓는 성과를 올려 큰 자신감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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