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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春園) 이광수와 대비되는 송산(松山) 김명식의 길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운영위원)
춘원과 송산의 공통점은 와세다 대학 동기생이라는 점이다. 귀국 후, 가난했던 춘원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민족개조론’의 글을 쓰면서 친일의 길을 걸었고, 제주 명문대가(名門大家) 산북(山北) 조천리(朝天里) 김해김씨 송산은 동아일보 창간멤버이면서 논설반원과 신생활 이사 겸 주필로, 당대의 최고 논객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裁判)의 장본인이었다.
평전(評傳)을 쓸 자격이 못되어 기초가 될 연보(年譜)를 정리해 봅니다. 자료의 불비와 역량의 부족으로 보충해야할 부분이 많아 부끄럽지만, 틀린 부분이나 혹은 관련된 자료를 갖고 계신 분들의 연락을 바랍니다.
1891. 9 제주도(濟州島) 관문(關門) 조천리(朝天里) 출생. 증조부 김응빈 제주판관, 조부 김응전 해미군수, 특히 증조부와 조부는 ‘귤원시회(橘園詩會)’ 핵심멤버로 김윤식, 박영효 등 개화파가 제주 유배 때 관계 유지 - 신사상 수용. 부친은 김문주 정의군수를 지냄.
1906년에 선각자 한석봉이 개설한 사립 의흥학교(조천리 연북정(戀北亭) 건물)에서 초등과정 마침.
1908.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제주지회 고향 후배 김문준(오사카에 가면 사회헌장탑에 기념비가 있고, 조천리 공동묘지에도 일본인들이 보내온 기념비가 있다.)과 같이 입회(入會)함.
1908. 4. 한성고등보통학교 입학
1910. 합방이 되자 학교 자퇴, 낙향하여 김문준과 함께 조천리 ‘독서회관’ 교사로 활동. 죽암 고순흠, 매원 홍두표와 연북정에서 송죽매 결의(천지위서(天地爲誓) 일월위증(日月爲證)의 혈서. 세한삼우의 송죽매의 혈맹결의라 함).
1911 4 도일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 입학. (홍두표는 메이지 대학 입학, 고순흠은 경성법학전수학교 입학)
1912. 10. 27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결성됨. 간사부장으로 임명 활동하였고, 기관지 ‘학지광’에 기고
1914. 4 와세다 대학 졸업
1914. ‘대동청년단’에 고향 후배 고순흠과 입단
1916. 4. 15 조선인유학생학우회 주최 신입생 대상으로 ‘ 적국에서 배우려는 의미를 논함’ 강연
1916. 봄 ‘신아동맹단’ 참여. 조선, 중국, 대만의 청년 40여명이 일본제국주의 타파하고 서로 도울 것과 민족평등, 국제평등을 실현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
1918. 2. 8 동경독립선언 참여
1920. 4. 1 동아일보 창간 참가 논설위원 창간호에 ‘대세와 개조’ 창간 논설 씀. 축시 ‘비는 노래’와 ‘새 봄’ 2편 게재함. - 제주의 첫 시인 ‘김지원’이 시단에 데뷔한 것보다 5년이나 앞선 것으로 여겨짐.
1920. 4, 11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인인자 평의원 맡음.
1920. 6 ‘신아동맹단’이 1920. 6 경성에서 5차대회를 개최하여 활동무대를 국내로 이전 단체의 명칭을 ‘사회혁명당’으로 개칭, 창립대회 참석
1920. 6. 28 ‘조선청년연합회 기성회’ 발족시킴.
1920. 12 ‘조선청년연합회’ 결성 지방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됨.
1921. 5. 20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사회혁명당은 지역대표 8명 파견, 김명식은 9명의 내지(內地) 간부로 선임, 기관지 주간이 됨. - 사회혁명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지부의 위상을 가짐. (이 시기 김명식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사회혁명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노선에 입각 활동을 함.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공제’, 조선청년연합회의 기관지 ‘아성’, ‘동아일보’ 등에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글 기고함.)
1921. 1 ‘서울청년회’ 조직에 참여
1921. 6. 3 - 8.31 6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연재물은 한국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레닌 일대기로 일반인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침.
1921. 3 조선노동공제회 제2대 회장으로 선출
1922. 1. 21 온건개화파 김윤식 88세로 사망. 동아일보가 ‘김윤식사회장위원회’ 조직
1922. 1. 27, 28 양일간에 걸쳐 ‘김윤식사회장반대회’ 개최됨.
1922. 2. 2 ‘재동경신인동맹’ 명의(동아일보동우회 이사장 황석우, 코스모스구락부 조선부 간사 원종린, 흑도회 간사 박열, 대중시보 주간 김약수, 청년조선 주간 정태신, 무산자동지회 위원 김한, 원우관 등이 연서)의 ‘민중의 격 : 소위 김윤식사회장이란 유령배의 참칭 사회장을 매장하라’ 글 발표
1922. 1. 15 ‘신생활사’ 조직. 동아일보 논설반에서 퇴사. 김윤식사회장을 계기로 장덕수 중심(상해 우파)의 문화운동을 비판하고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하는 ‘신생활사 그룹’이라 불리는 일군의 사회주의자들의 독자적인 활동 전개
1922. 3 ‘신생활을 제창함’,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함’, ‘자유사상을 고취함’의 슬로건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