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돌아보기 소요 1. 세월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에서 총 476명의 탑승인원 중 172명이 탈출하고 304명이 사망했다. 세월호는 맹골수도에서 침몰했고 맹골수도는 한국에서 가장 물살이 강한 수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곳은 동거차도와 불과 2.5킬로미터 떨어진 수역이며 퇴선명령만 있었더라면 304명 전원이 생존할 수 있는 거리였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구조 도움 없이도 헤엄을 쳐서 섬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 구조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은 자기들만 살자고 세월호 승객을 버렸고, 현장에 출동했던 해경들은 적극적인 대응을 못하고 현장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군가가 ‘퇴선하라’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참사 당시 세월호를 뒤따라 운항하던 둘라이에이스호는 유조선이었는데, 해수면과 갑판 사이의 높이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바다에 뛰어든 승객을 둘라에이스호에 옮겨 타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둘라에이스호에는 세월호에 타고 잇던 승객 전원을 수용할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호 선원들은 이상하게도 해경이 언제 도착하는지에만 관심을 갖고, 끝내 승객들을 퇴선시키지 않았다.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도 헬기는 바구니를 내려 한 사람 한 사람 구조하는 소극적인 구조 방식을 택했고, 항공구조사는 세월호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결국 헬기 3대가 구조한 인원은 총 35명에 불과했다. 이후로도 현장 출동 세력 중 세월호의 선내에 진입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는 적극적으로 승객을 만나서 상황을 파악하거나 승객에게 일정한 의사를 전달하려던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박이 침몰하는 상황에서 승객에게 퇴선은 생존을, 재선은 죽음이었다. 그런데도 퇴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선원중에도 해경 중에도 단 한사람도 없었고 오직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304명의 죽음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승객을 퇴선시키고 구조할 수 있었다. 둘라에이스호가 왔을 때 선원들이 퇴선명령을 내렸더라면, 해경 헬기의 항공구조사가 퇴선 유도를 했더라면, 해경 123정이 대공마이크로 퇴선 방송을 했더라면, 123정 승조원이 세월호에 올라가 퇴선을 유도했더라면, 123정 승조원이 세월호 조타실에 들어가 퇴선 방송을 했더라면, 얼마든지 전원구조가 가능했다. 3. 침몰원인 세월호가 왜 급격히 우선회를 했는지, 왜 왼쪽으로 기울어 넘어갔는지, 왜 그렇게 빨리 침몰했는지에 대해 참사 직후부터 많은 의혹과 논란이 있어왔다. 심지어 세월호가 인양되어 육상에 거치된 지금까지도 이러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의 급격한 우선회는 조타 과실 때문인지, 기계 고장 때문인지, 아니면 외력 때문인지 알지 못한다. 또 세월호가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것이 급격한 우선회의 결과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의 결과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세월호의 우선회, 좌현 경사와는 별개로 대형 선박이 왜 그토록 빠르게 침수가 이루어져 전복되었는지도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의문으로, 정부가 제시한 세월호의 항적 자체가 조작된 것은 아닌지, 또 세월호 참사 발생시각이 오전 8시 48분이 맞는지, 아니면 그보다 빠른 시간인지 등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있다. 그동안 검찰 수사와 재판, 감사원의 감사, 해양안전심판원의 조사 등이 계속 이어졌지만 세월호의 침몰 원인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궁극적으로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규명할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 현재 분명한 것은 규명 작업을 진행할 대한민국의 인적자원과 관련 자료를 모두 확보하고 있는 정부가 정확한 침몰 원인을 내놓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미수습자 일부도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침몰 원인을 알지 못하고 왜 국가가 구조를 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에 쌓여있다. 참고자료 : <세월호, 그 날의 기록 - 진실의 힘>, <세월호 참사 팩트체크 - 북콤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