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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1987년 6월, 거리에서 싸운 노동자들 _김원 (32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1-07-03 조회 1412
 
흔히 876월 항쟁은 학생, 지식인 그리고 중산층이 주도했고, 이후 노동자대투쟁은 생산직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이야기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876월 항쟁은 화이트칼러가 다수 참여했던 서울에서만 일어났던 투쟁은 아니다. 앞서 소개한 인천, 성남, 안양 그리고 부산 등 거리에서 다양한 노동자와 노동빈민들은 거리를 누비며 시위에 참여했다.

19876, 거리에서 싸운 노동자들

  김 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876월의 상징, 넥타이 부대 

‘876’. 이제 한국 민주화의 고유명사처럼 여겨지는 6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적인 투쟁은 80년대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단어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876월하면 떠올리는 장면들은 명동의 넥타이부대, 비폭력투쟁, 박종철과 이한열의 영정 등이다. 강의실에서 이 시기에 대해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는 넥타이부대다. 하지만 과연 서울 이외 지역에서도 그랬을까? 우리는 흔히 876월 항쟁을 독재타도-직선제 쟁취로 통일된 역사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난 지역에서 투쟁을 들려다 보며, 우리는 노동자, 노동빈민들의 다른 6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애초 국민운동 본부는 대회 당일인 610일에 그토록 많은 인파가 거리로 모일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가 져가고 밤이 어두워지자 엄청난 인파가 거리로 모여들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서울에서는 명동을 중심으로 넥타이 부대라고 불린 화이트칼라가 언론에 부각되었지만 서울 이외 지방은 그 양상이 무척 달랐다. 대표적인 곳이 인천이었다

부평을 해방구로!

한국의 페테스부르크라고 불렸던 인천은 10일 부평 4공단 노동자들이 퇴근 후 시위대에 합세해 새벽까지 전투를 방불케 하는 투쟁을 전개했는데, 특히 610, 18일 그리고 26일에 집중되었다. 좀 더 10일 인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610일 저녁 6시 반경, 시위대는 부평역 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소규모 대중 집회를 열었다. 8시에 이르러 시위대는 대우자동차 공장을 지나 갈산동 입구에 도착했다. 4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제2차 대중 집회가 열렸다. 이때 경찰은 이미 시위대 저지 능력을 상실했다. 9시부터는 청천동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퇴근한 노동자들이 이 투쟁에 동참하면서 시위대는 3천 명에서 5천 명에 이르렀고 시위 대오에서는 노동 3권 쟁취, 임금 인상, 잔업 철회등 구호가 터져 나왔다. 9시 반에는 청천 파출소 앞에서 인천 공대위 주최로 제3차 대중 집회가 열렸고, 전두환 화형식이 치러졌다. 10일 시위는 밤 11시경 효성 사거리에서 5천여 명의 4차 대중 집회 및 해산식으로 끝났다. 616일에도 인천에서 노동자들은 10시에 퇴근한 후 1만여 명이 공단을 중심으로 모여 가두시위를 벌이다 12시경에 해산했다. 이 시점부터 노동운동 소그룹들이 준비한 야간 시위가 일정하게 반복되었다.

다음으로 618일 저녁 8시에도 시위대는 백마장 입구로 이동해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대중 정치 집회를 열었다. 이전 집회와 달리 이날 집회의 사회는 노동자들이 맡았으며, 토론에도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자유 토론을 거쳐 전두환 정권 규탄을 결의한 시위대는 밤 1110분경에 횃불을 들고 청천동 노동자 주거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날 야간 시위는 특히 다른 날에 비해 격렬했다. 이윽고 새벽 3시경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한 시위 참가자는 흡사 제2의 광주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날 경찰들은 시위대를 찾으려고 노인에게 욕설을 퍼붓고 집 안방까지 들어와 직격탄을 쏴서 텔레비전 수상기가 폭발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이날 시위로 35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특히 이날 경찰은 공단 지역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할 것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마침내 인천에서 투쟁의 정점인 626, “부평을 해방구로!”라는 구호와 함께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낮부터 경찰은 대회장인 부평역 주변 차량을 완전히 통제하고, 전철역과 버스 정류장도 폐쇄해서 집회 접근 자체를 막았다. 하지만 원천 봉쇄 속에서도 시민·노동자·학생 1만여 명이 부평역과 백마장 사이 부평로를 점거해 대중 집회 및 시위를 전개했다. 7시 반경에 이르러 부평로 시위대는 3천 명으로 늘었고, 이들은 다시 세 그룹으로 나뉘어 집회를 전개했다. 마침내 8시경에 이르자 부평로 시위대 8천 명 가운데 두 번째 그룹의 대중 집회에서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창립 보고 대회가 열렸고 창립 선언문이 낭독된 뒤에 1시간 이상 격렬한 시위가 진행되었다.

한편 9시 반경 백마장 입구에서는 경찰 저지선 밖에 있던 시위대가 부평로에 포위된 시위대를 구출하려고 경찰과 대치했으며, 10시 반에는 부평 공단 대우자동차, 한독시계, 동서식품 등 노동자가 시위대에 합세해 경찰을 무장 해제시키고 새벽 2시까지 시위를 전개했다. 공단 일대 노동자들도 시위대에 다시 결합해서 노동 3권 쟁취, 임금 인상, 잔업 철폐 등을 외쳤다. 이날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부평 경찰서장은 시위대에게 전투경찰을 때리지 말아달라고, 방패와 투구를 빼앗지 말아달라고 사정할 정도였다


<부산 시내를 메운 투쟁 대오 : 사진_ 부산일보>

대전, 성남, 안양 그리고 부산에서 노동자 투쟁

하지만 6월 노동자투쟁은 인천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616일 대전에서는 대전 백화점에 대한 시위대의 공격이 일어났다. 전두환의 부인인 이순자 소유로 알려진 대전 백화점을 향해 시위대는 돌을 던져 유리를 다수 파손시켰다. 이 시위에는 지방 경제 위축에 분노한 중소 상인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대전에서도 밤이 깊어지자 실업자와 룸펜 청년들의 시위 참여가 잦아졌는 데, 이는 넥타이부대가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 서울과 달리 밤 시위의 중심은 도시하층민, 노동빈민으로 변해가고 있었음을 드러내 주었다

다음날인 617일 부산에서 시위는 밤 시위가 18일 아침까지 이어질 정도로 마치 시민 봉기를 방불케 했다. 심야에 택시들은 경적 시위를 벌였고 사상공단 노동자들은 퇴근 뒤에 “8시간 노동으로 생활 임금 쟁취”, “민주 노조 결성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에 참여했다. 또 이날 저녁 10시에 촛불 시위대가 좌천동 고가 도로로 달려들자 시청 등을 방어하기 위해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고, 이 과정에서 이태춘 씨가 다리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새벽0시에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돌파해 KBS 앞에서 2만 명이 투석전을 벌였고 일본 영사관에 돌을 투척하여 유리창 42장을 깨뜨렸다.

이튿날인 618일 부산 시위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사상공단 노동자들의 시위 참여였다. 서울 명동 성당 주변에는 넥타이를 맨 화이트칼러들이 운집했던 것과 달리 부산에서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시위 참여가 많았다. 당일 오후 6시경 국제상사 밖에서 시위대가 가두시위를 벌이자, 이에 고무된 노동자들은 잔업을 거부하고 도로를 점거한 채 서면으로 향했다.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 재봉틀을 돌리다 나온 여성 등으로 거리는 가득찼다. 이들은 노동자 단결하여 민주 노조 건설하자”, “8시간 노동으로 생활 임금 쟁취하자”, “노동자 피땀 짜내는 독점 재벌 해체하라”, “노동자 단결하여 살인 정권, 기만 정권, 군부 독재 끝장내자를 외쳤다. 이들이 서면에 도착할 무렵 로터리 부근에 20여만 명이 운집했으며, 부산상고, 부전시장, 범내골 방면으로 8차선 도로를 천여 개나 점거했다. 서면 로터리에서 부산진 시장에 이르는 5킬로미터를 시위대가 점거함에 따라 경찰도 진압 자체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새벽 120분경 서면 로터리에서 택시 200여 대가 경적 시위를, 부산역과 초량 삼거리에서 택시 100여 대가 1시간 동안 경적 시위를 벌였다. 새벽 2시경에는 초량동 YMCA 뒤편에서 흩어져 있던 시위대가 횃불 시위를, 오후 4시에는 시민 포함 35,000여 명의 시위대가 영주 파출소 등 파출소 3곳을 습격해 민간 트럭과 소방차 탈취했다. 또 부산진구 중앙로에서는 택시 기사 300여 명이 3시간 40분 동안 시위를 벌였다. 서면 로터리에 6만여 시위 군중이 운집했고 부산 택시 기사 100여 명 등이 합세해서, 시위대 선두에서 경적 시위를 벌이는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한편 19일 안양에서는 시위 진압 병력이 모두 서울로 차출된 사이에, 지역 노동 운동 그룹이 공동으로 준비해서 자정 무렵부터 우체국 사거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공사장 자제와 봉고차 기름을 빼서 화염병을 만드는 등 무척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620 일에는 서울에서도 오후 8시경 구로 공단 가리봉 5거리에서 노동자 80여 명이 호헌 철폐, 독재 타도플래카드를 앞세우며 투석전을 벌였다. 서울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던 노동자들의 시위는 아마도 노동 운동 조직에서 사전에 기획한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날 성남에서도 1천여 명의 노동자 학생이 성호 시장 앞에 결집해서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할 정도로 돌과 화염병을 투척했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서울과 달리 성남에선 넥타이 부대가 거의 참여하지 않고 생산직 노동자의 참여가 높았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626일에 전국 37개 도시에서 평화 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성남에서는 3만여 시위대가 평화 행진을 하다가 자정 무렵에 해산했다. 이후 시내 곳곳에서 중앙 파출소 점거, ‘노동 3권 보장’, ‘저임금 박살등의 구호를 외치며 새벽 3시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날 성남에서 작게는 500명에서 크게는 5만여 명에 이르는 대중 정치 집회가 진행되었는데, 시위대는 도로나 광장을 점거하거나 연좌시위 형태로 군부 독재 성토, 정치 연설, 선동 그리고 구호 제창 등을 시민과 함께 했다

7~9월 노동자대투쟁의 전주곡, 876

흔히 876월 항쟁은 학생, 지식인 그리고 중산층이 주도했고, 이후 노동자대투쟁은 생산직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이야기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876월 항쟁은 화이트칼러가 다수 참여했던 서울에서만 일어났던 투쟁은 아니다. 앞서 소개한 인천, 성남, 안양 그리고 부산 등 거리에서 다양한 노동자와 노동빈민들은 거리를 누비며 시위에 참여했다. 물론 80년대 각 지역에 존재했던 노동운동 세력이 주도적으로 6월 항쟁을 조직하거나 참여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6월 전국의 거리에서 노도와 같은 민주화의 물결을 목도한 노동자들 그리고 미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중의 힘을 확인한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이제 다음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민주노조라는 깃발이었다. 비록 876, 노동자와 노동운동 조직들은 전국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국지적으로 투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넥타이부대의 혁명이나 직선제 개헌으로 알려진 876월은 시위대 안에 혹은 거리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던 노동자들에게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자각하게 해준 역사의 프롤로그였다.
 
 
6월 항쟁 부산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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