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충주 송천(松川)제사공장 엄효춘의 파업투쟁 김미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1929년 10월 4일 송천제사공장(충주읍 금정) 여직공 30여 명은 동맹파업을 단행한다. 그날 공장에서 작업 중이던 엄효춘(18세)과 그의 동료 한 명이 일본인 공장주 부부에게 꾸지람을 듣고 창피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공장주 송천부부는 일반 직공이 일을 잘못하면 언제든지 이처럼 망신을 당할 것이며 차라리 일찍 그만두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런 협박에 분노한 엄효춘과 그의 동료들은 일제히 일손을 놓고 공장 앞에 집결하여 아래와 같은 요구조건과 임금을 지급하라고 촉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 근무시간에 대해 매일 오전 5시에 작업을 시작하기로 정한 규약을 준수할 것. - 임금에 대해 다른 공장의 여직공 임금과 동일한 수준을 보장할 것. - 대우개선에 있어 친절하게 대우하고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일본인 공장주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고 엄효춘과 그의 동료들은 모두 좋은 얼굴로 이튿날부터 다시 조업하기로 결정하고 파업을 풀었다.
충주 송천제사공장 동맹파업 기사. <중외일보> 1929.10.7. 불과 며칠이 지난 10월 8일 근처에 있는 소천제사공장(충주읍 본정)에서도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그날 27명 중 18명은 평소와 달리 점심시간보다 이른 오전 11시에 점심을 먹었다. 일본인 공장주가 이를 힐책하자 18명 노동자는 파업을 단행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이른 점심을 하게 된 사정은 이렇다. 노동자들이 제사공장에 출근하면 오전에 켤 고치를 각자에게 분량을 정해주고 그것을 끝마쳐야 점심을 먹게 했다. 일이 능숙한 사람은 오전 10시에 시작해도 12시경엔 끝내서 점심을 먹을 수 있지만 일손이 늦은 사람은 오전 3~4시에 시작해도 오후 3~4시까지 점심을 못 먹게 되니 평소 불만이 쌓인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10월 8일 당일 노동자 전원이 상의하여 오전 11시 모두 일을 중지하고 같은 시간에 점심을 먹었다. 일본인 공장주는 일할 직공은 얼마든지 있으니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거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파업지도부 역시 기세등등하여 지구전을 전개하였으나 10여 일이 지나 결국은 4명이 해고되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복귀하는 것으로 타결되면서 파업은 끝이 났다. 일제 식민지시기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실태는 엇비슷하여 극심한 결핍과 빈곤에 노출되었다. 특히 여성유년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 비참했다. 여성은 기혼과 미혼을 막론하고 임노동을 통해 생계비를 벌어야 했고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흔히 말하듯이 단순히 가계를 보충하는 차원이 아니라 가계유지에 필수적이었다. 1920년대 일본 독점자본이 제사 및 방직업 등에 진출하고부터 여성노동자가 대량 고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충주에도 몇 개의 제사공장이 세워져 공장이 활발히 돌아가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은 임금과 근로조건에서 민족적 차별을 받고 있었다. 엄효춘과 그의 동료들은 차별을 없애기 위해 파업을 결정했다. 그들은 이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권리를 쟁취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 파업투쟁의 성격은 민족차별을 쟁점으로 부각시키며 일본 자본과 식민지 경찰에 항의하는 것이기도 했다.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충주 두 제사공장의 파업은 동일업종 노동자 파업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노동자 간에 파업투쟁과 노동자 권리에 관한 정보 교류나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같은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서로의 파업과 투쟁에 관심과 연대는 물론 상당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엄효춘의 송천제사공장은 1931년 8월 27일 다시 한번 동맹파업에 돌입했다.(<조선일보> 1931.8.31.) 동료 노동자가 실을 고르게 켜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자 나머지 노동자 전원은 동정파업을 전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