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레터 [한내] 2008년 12월호 : 내가 살아온 길
병역특례 기간중 당한 징계가 오히려 용기를 주었다.
글 : 김희준 (한내 회원, 금속노조 만도지부)
노동자 역사 “한내” 사무처 이상훈 동지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고 대략 난감했다. 대단한 활동가도 아닌 나에게 살아온 길을 써 달라니 말이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특별하게 쓸만한 것도 없고, 딱히 한장면 내세울 것도 없는 터라 며칠을 고민했다. 결국 노동조합 활동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를 적어본다.
나는 1984년 만도기계 안양공장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햇다. 당시 나는 말 주변도 없고 어눌해서 남들 앞에서는 자기소개조차 힘들어 했다. 처음 접하는 공장 질서와 현장 분위기는 사뭇 긴장되고 두려움마저 들게 하였다. 군대는 아니지만 관리자와 노동자 사이엔 엄청난 벽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야말로 관리자들은 하늘 그 자체였다. 잔업 특근은 개인 의견은 깡그리 무시한 채, 자동으로 해야했고 때론 장시간 노동의 철야까지 해야 했다. 휴가는 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랐다. 비록 남들 앞에 나서진 않았지만 공장에서 주어진 일은 그런대로 해가며 현장에 적응해 갔다. 아니 어쩔수 없었던 것 같다. 방위산업체 ‘병역특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순종하며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노동조합 간부활동을 열심히 했는지 나 스스로도 의심스럽다. 당시에는 지방에서 상경하여 공장 다니는 거의 모든 노동자들은 자취생활이나 아님 카톨릭회관에서 운영하던 근로자 회관 등에서 생활했다. 우연히 공장 동료 소개로 카톨릭회관 노동청년회에서 운영하던 독서토론회에 나가게 되면서 세상 물정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때 처음으로 <근로기준법>이란 책을 보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조금씩 알아갔다. 그러나 혼자만 알고 있을 뿐 이것을 누구와 토론하거나 동료들과 말할 수 있는 실력도 분위기도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내성적인 내 성격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고 있을 때, 병역특례 동기들과 산악회를 만들어 주말마다 등산을 다니게 되면서 내 성격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87년 6월 항쟁의 기운을 받아 내가 다니던 공장도 선배 노동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해 8월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13일간의 전면 파업으로 노동조합 인정과 임금인상을 따냈다. 초대 집행부가 아닌 새롭게 선출된 2대 집행부는 끊임없이 어용시비에 휘말렸고 급기야 89년 봄 임금인상 교섭과정에서 직권조인을 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나는 민주파 대의원 일부와 그동안 함께 친분을 쌓아왔던 동기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점심시간을 이용해 직권조인 철폐를 외치며 공장 파업을 벌였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시작된 파업투쟁이지만 집행부의 직권조인은 공장 동료들을 분노케 했고 파업대오는 순식간에 공장 전체로 퍼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노조 위원장과 2시간 넘게 공개 토론까지 벌였으나, 특별한 결론도 얻지 못한 채 파업 대오는 스스로 해산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회사는 본때를 보일 요량으로 징계위원회를 열었고, 나를 포함한 병역특례 동기 5명이 맨 앞줄에 있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당시 내 동기 3명은 3개월 후면 병역특례 만료였고 후배 2명은 1년을 남겨 둔 상태였다). ㅏ하지만 결론은 싱겁게 끝났다. 후배 1명은 근태가 나쁘다는 이유로 정직 1개월, 나머지 4명은 견책으로 징계는 종료되었고 병역특례도 마무리 되었다 .
나는 직권조인 반대로 사퇴해 공석이던 선거구에 대의원 후보로 출마해 만장일치로 당선되었고, 그때부터 노동조합 간부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회사의 징계위원회는 어리숙했던 나를 오히려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3대 대의원 활동을 통해 자연스레 조직된 많은 활동가들은 “민주노조 실천협의회”의 초석이 되었고, 3대 위원장 선거에서 4명의 후보가 경선을 치뤄 “민주노조 실천협의회” 후보로 출마한 우리 후보가 1차에 당선되었다.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깃발을 휘날리며 출마한 우리는 그야말로 현장의 고통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것 같았다. 나도 당시 안양지부 초대 사무장을 맡아서 활동했다. 그해 말부터 시작된 단체협약 갱신투쟁으로 나와 2명의 동지가 함께 구속되었고, 이 때 경험은 내가 노동조합 활동을 떠날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참으로 많은 회유와 협박이 동시에 나를 위협했다. 그러나 이미 병역특례자로 징계를 경험한 나에겐 그리 큰 위협이 되질 못했다. 오히려 하늘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던 자본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만 키워 놓은 셈이었다. 강산이 두번이나 바뀌어 버린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면 한순간도 쉼없이 달려 왔다. 힘차게 펄럭였던 “노동해방”의 깃발은 아직도 내 가슴 깊이 펄럭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