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이철환(노동자역사 한내 자원봉사자)
‘한내’와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다른 한내 구성원들처럼 노동자 역사에 대해 투철한 의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 한내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을 때는 그저 기록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론으로만 접한 기록물이 아니라, 기록물을 직접 다루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나와 한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jpg)
기대한대로 한내에서는 전노협, 마창노련 등 노동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기록물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기록물을 정리, 등록하고 디지털화 하는 과정을 통해 전혀 몰랐던 노동운동의 역사와 역사속의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처음 참여한 프로젝트는 민주노총 공공연맹의 기록물을 전산화하는 것이었다. 공공연맹의 기록물에는 과문한 탓에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 건, 한 건 기록물을 살피면서 어느 순간 그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 했다. 만약 지금이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들의 투쟁 덕분이라는 생각도 했다. 공공연맹의 기록물을 통해 기록학에서 이야기하는 ‘기록물이 담고 있는 업무의 과정’이라는 개념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기록물을 관리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재미있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기록물을 통해 노동자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매우 중요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었다.
두 번째 참여한 프로젝트는 전국철도노동조합의 기록물을 전산화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 끝난 이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노동조합 중의 한 곳이 자신이 생산한 기록물을 갖고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철도노조가 과거 어용노조와의 투쟁을 거쳐 민주노조로 거듭나는 과정을 기록물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기록물을 보며 철도청과 어용노조의 행태에 화가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현재 철도노동조합의 역사라는 점에서 한 건, 한 건 기록물을 모두 소중하게 다루었다. 기록학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기록물의 특성인 ‘기록물이 반영하고 있는 조직의 변화’라는 것을 철도노조가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고 보잘 것 없는 힘이지만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스스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작업이었다.
.jpg)
한내는 노동자, 노동조합이 생산한 기록물을 가지고 노동자 스스로의 역사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기록물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기록학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최근에 기록학은 그 동안의 발전이 공공영역에 치우쳐져 있음을 반성하고 다양한 주체들이 생산한 기록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기록물을 수집, 관리, 활용하는 한내는 기록학적인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 이에 기록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서는 한내 또는 한내의 기록물을 대상으로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나 역시도 기록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한내의 여러 사업이 기록학계에 널리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기록이 곧 탄압의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받았고, 받고 있는 고통을 말해준다. 동시에 그것은 노동자 스스로 역사를 쓸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록이 그저 ‘있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원칙에 따라 적절히 관리되어야 하고 활용되어야만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저 ‘있는’ 기록은 기록이 아닌 폐휴지일 따름이다.
한내가 기록을 기록일 수 있게 하는 과정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의미 있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 역사’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과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고 소중한 경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