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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후레아패션 노동자 투쟁
⦁ 시기 : 1987년 4월 1일 ~ 10월
1987년 4월 임금인상 투쟁
후레아훼숀은 독일인이 투자한 기업이다. 본사는 독일의 아스코그룹으로 독일 내에 90여 개의 백화점 체인과 외국 판매망을 가진 거대 종합상사의 하청 생산공장인데, 1987년 <월간 봉제계>에 의하면 외국인 투자회사 중 가장 높은 수출 실적과 매년 100억 이상의 순이익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초임 일당 2,700원의 저임금에 주야 맞교대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회사는 전표제도를 실시해 시간마다 자기 생산량을 기입하여 하루하루 제출하게 함으로써 동료들간의 경쟁과 부서별 경쟁을 유도했고, 목표량이 나오지 않으면 온갖 욕설은 물론이고 개별면담 등을 통해 노동자들을 협박하며 노동력을 쥐어짰다. 이렇게 열악한 노동환경에도 후레아훼숀 노동자들은 1987년 임금인상 투쟁을 통해 1987년 전북지역 노동자대투쟁의 시발점을 먼저 열어젖히고 있었다. 후레아훼숀 1,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3월부터 임금인상 교섭을 진행해 회사측의 9% 인상안과 노조측의 16.5% 요구가 팽팽히 맞서오던 중 노조 위원장 황상규가 회사와 짜고 4월 1일자로 “12.5%로 교섭이 타결되었다”는 공고를 붙인 뒤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이에 교섭위원들은 1,000여 명의 조합원 서명으로 교섭 결과가 무효임을 공고하고 전표거부, 잔업거부로 맞서면서 4월 4일 오후 1시에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회사의 강제 귀가조치와 탄압에도 7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해 투쟁의 열기가 몹시 높았다. 당시 한 노동자는 “4월 4일, 회사 생활 7년 만에 정말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얼굴은 누렇게 뜨고 일주일의 피로가 온 몸을 덮쳐왔지만 우리도 뭉쳐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에 우리는 모였다”고 말하고 있다.
회사측은 보고대회에서 조합원에 의해 선출된 대표 조합원에게 4월 7일 12시까지 회사 입장을 밝히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4월 7일 새벽 5시, 야간조 작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작업을 중지시키고 강제 귀가시킨 뒤 무려 12명(1986년 대의원선거에서 당선되어 열성 간부 소모임을 꾸려가던 김인수, 황용만, 홍성규, 이순덕, 박경이, 주순래, 이금자, 오경순, 김안순, 김용숙 등)을 해고하고 휴업공고를 낸 후, 이리 수출자유지역 공단 후문을 용접해서 봉쇄해 버렸다.
4월 7일, 회사의 감시와 기만적인 휴업조치에도 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물러설 수 없는 최소한의 임금인상 요구인 16.5%를 내걸고 당당히 떨쳐 일어섰다. 이들은 “임금 16.5% 인상하라” “최저생계비 보장하라” “사람 잡는 전표는 철폐하라” “민족성 팔아먹는 관리인 물러가라”(사장 F.아들러는 10년 넘게 사장으로 역임했다) “부당해고 철회하라” 등으르 요구하며 후문 앞 차디찬 아스팔트에서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한편 4월 추운 밤임에도 바로 옆 광전자 회사에서는 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 대형 에어컨을 틀어놓고 자본가끼리의 유대를 과시했다.
4월 8일 아침, 추위와 협박과 허기 속에서 밤을 꼬박 새운 노동자들이 조금씩 동요하고 있을 때 검은 장갑을 낀 특수경찰대원과 함께 회사 관리자과 깡패들이 ‘구사대’란 띠를 두르고 나타나 강제 해산시키고, 농성지도자 10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회사는 깡패를 구사대로 고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노동자들 300여 명은 창인동 성당에 모여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사흘간 농성을 벌였고, 4월 10일에는 가두홍보에 나섰다가 50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은 연행된 노동자들을 협박할 목적으로 그들의 가족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연락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도 연행자들과 함께 오히려 경찰에 항의함으로써 연행자 석방에 힘을 주었다. 석방된 노동자들은 일단 투쟁을 중지키로 하고 정상출근에 들어갔다.
4월 30일, 해고자에게 빵과 우유를 사줬다는 이유로 바지부 이명옥 조합원이 해고되고, 이에 항의해 중식거부 쪽지를 돌렸던 조합원도 해고되는 등 회사측의 노동탄압이 계속되는 데 항의해 ‘후레아훼숀 노동운동탄압 규탄대회’를 창인동 성당에서 개최했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한 회사측의 방해공작은 집요했다. 길목마다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고, 조합원들에 대한 개별면담이 이루어져 빨간줄, 파란줄이 그어졌다. 이렇게 삼엄한 분위기 속에 코트부 주부노동자 정경희(당시 33세)가 화장실에서 손목의 동맥을 자르고 자살을 기도했다. 12명의 해고자 이름과 그들을 복직시키라는 말, ‘늙은 노동자의 노래’가 적힌 유서를 남긴 채 병원으로 실려 갔고, 그녀는 “누군가가 죽어야지 회사의 노동자 탄압이 중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도 막고 말도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해”라며 절박함을 호소했다. 정경희의 자살미수(회복되어 회사에 근무함) 사건은 해고자들에게는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반성을 가져다주었다.
해고자 복직과 노조 정상화 투쟁 1987년 7월,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이 더 이상 한국인 관리자와 어용노조 황상규 위원장만의 소행이 아니라 실질적인 음모와 탄압은 아들러 사장과 아스코그룹 총수에 의해 지휘된다고 판단한 해고자들은 독일대사관 항의방문 투쟁을 결행했다. 7월 2일, 9명의 해고자가 독일대사관을 찾아가 사태를 유발한 아스코그룹 와그너 총수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독일대사는 외무부에 이들을 주거침입으로 고소했고, 대사관 밖으로 쫓겨난 이들은 결국 남대문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이리(현 익산)’로 끌려 내려오게 되었다.
7월 21일, 해고자들이 국회의사당 농성으로 국회 진상조사단을 이끌고 내려오기로 하고 이에 맞춰 농성 돌입을 결정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7월 22일 작업을 마친 노동자들이 작업장 출구에서 농성에 돌입했지만 구사대의 폭력과 협박에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끌려 나가거나 빠져나가고 40여 명만 남았다. 40여 명은 흩어짐 없이 투쟁을 계속해 나가 7월 23일에는 작업이 거의 중단됐다. 그리고 7월 23일 상경했던 해고자들이 국회조사단을 이끌고 현장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으나 국회조사단은 “독일인 부사장이 해고자 복직을 8월 중순까지 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상작업 속에서 복직을 기다리자”고 발표했다. 그때까지 투쟁해온 후레아훼숀 노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허탈한 말이었다. 노동자들은 결국 국회의원에 대한 환상을 버린 채 독자적인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기술부(회사 전체의 생산라인을 통제하는 메인컴퓨터 등 각종 기계 시설 집중) 점거농성을 결의하고 한 명씩 잠입해 장악함으로써 회사 전체를 마비시켜 버렸다. 회사측에서도 경찰은 물론이고 구사대까지 동원해 위협했지만 농성장을 침탈하지 못해서 결국 위원장 직선제와 고혈수당, 휴업수당에 대한 몇 가지 개선책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2차 투쟁이 종결된 것이다. 승리한 것은 아니지만 1차 투쟁에서 완전히 패배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진전이었다.
구사대의 선봉투쟁과 직선제 쟁취, 그리고 해고자 복직
후레아훼숀의 구사대 역할을 담당했던 남성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이나 임금이 여성노동자들에 비해 훨씬 나은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 역시 생활의 곤란은 심각했으며, 구사대에 참여한 것은 그나마 회사가 문을 닫을까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몇 차례에 걸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신들의 처지를 깨우쳐갔고, 여성활동가들의 의식적인 노력도 작용해 마침내 남성노동자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후레아훼숀 구사대들이 이번에는 노동자들의 편에서 투쟁에 앞장선 것이다.
8월 12일, 남성노동자들은 몇 차례에 걸쳐 여성노동자들과의 공동투쟁을 제안했지만 이들을 철저히 의심했던 여성노동자의 현장분위기 때문에 단독적인 투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3층 재단부에 모이자는 유인물이 뿌려졌지만 재단부 남성 외에는 아무도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몇 차례 안타까운 순간들을 넘어 재단부 여성들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어 재단부가 전원 참여한 후 남성노동자들은 현수막을 앞세워 현장을 돌기 시작했다. 야식시간이 끝날 무렵 야간 근무자들 중 조장급 이상 관리자를 제외한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요구조건은 해고자 복직, 임금 1,000원 인상, 어용노조 퇴진, 사원 총회 등이었다. 이로써 후레아훼숀 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들은 8월 15일에 ‘광복절과 노동자’라는 주제의 축제를 벌이기도 했고, 창밖으로 오색 테이프를 휘날리며 승리에 대한 확신을 다졌다. 이러한 투쟁은 서독의 TV, 신문 등의 주목을 받아 취재경쟁을 불러일으켰고, 회사측은 8월 16일 사원총회 개최를 약속하고 해산을 종용했지만 이들은 만장일치로 사원총회까지 농성대오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8월 17일, 사원총회가 열렸지만 어용노조 위원장이 구사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위대를 이끌고 들어옴으로써 위장데모로 보고 맞붙어 싸우다 결국 사원총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회사측은 지연전술과 분열공작을 계속했다. 결국 8월 22일 남성조합원들은 △일당 12,000원 △어용노조 퇴진 △위원장 직선제에 합의했고, 여성조합원들도 이에 합의함으로써 제3차 투쟁이 종결되었다.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완전한 승리, 해고자들의 복직
9월에 직선제 선거를 치르고 민주노조를 구성했다. 민주노조는 해고자 복직을 전제로 출발할 것이 너무도 자명한데다, 독일대사관, 국회, 독일 현지여론의 악화 등으로 회사측은 해고자 복직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청업체를 인수케 하고, 위로금 500만 원 보상” 등의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던 중에 해고 당사자들은 ‘1인당 1,500만 원의 보상금과 자진 사퇴’에 합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복직투쟁 과정에서 열렬히 싸워왔던 박경이, 주순래는 이 보상합의를 거부하고 △해고기간 임금 지불 △조합활동 보장 △원직복직을 주장했고, 10월 비밀리에 방한한 자본주 뮬러 회장과 담판을 지음으로써 마침내 복직을 쟁취해 냈다. 후레아훼숀 노동자들이야말로 1987년 전체를 투쟁으로 수놓으며 완전한 승리를 일구어낸 주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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