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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12일 연세대에서 서노협 결성보고 및 노동악법개정 촉구대회가 열렸다. 5월 29일 출범한 서노협은 권력과 노동귀족에 의해 왜곡되고 타락한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선언하였다.
다양한 업종을 넘어 서울지역 연대조직 건설로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서울지역 노동자들의 연대조직 건설
1988년 1월 25일 성동구 용답동 전주식당. 43개 노조 123명의 대표자와 간부들이 모였다. 그 중 20개 노조가 참여하여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4개월 후인 5월 29일 여성백인회관에서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총회를 열었다.
서노협은 서울지역의 90개 민주노조 3만여 명의 조직으로 출범하였다. 초대 의장은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이었던 배일도가 맡았고 의장 구속 후 의장직무대행을 부의장이었던 단병호가 맡았다. 조직을 구로지구, 영등포지구, 온수지구, 강북지구, 공기업으로 나눠 운영하였고 병원, 금융, 공사건설, 운수, 출판, 대학 등 다양한 업종의 노조들로 구성되었다.
6월 12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서울지역의 3천여 노동자가 모인 가운데 '서노협 결성보고 및 노동악법개정 촉구대회'가 열렸다.
‘노동자가 단결하여 노조탄압 분쇄하자!’ ‘뭉치면 주인되고 흩어지면 노예된다’는 현수막 수십장이 걸리고 80여 개가 넘는 노조 깃발이 휘날렸다. 노동자들은 “노동악법 개정하여 민주사회 이룩하자”고 외쳤다. 민중문화운동연합의 축하공연이 끝나고 노동악법 화형식을 거행했다. 위장폐업, 직장폐쇄, 폭력구사대, 복수노조금지, 3자개입금지를 매단 허수아비가 불타올랐다. 그 순간 노천극장은 함성으로 뒤덮이고 대회는 절정에 올랐다.
이날 노동자들은 노동부의 무노동무임금 지침 철회와 노동부장관 퇴진을 요구하였다. 노동부는 지침을 내려 “파업기간 중 조합원에게는 임금 부지급, 비조합원에게는 평균 60%지급, 파업 시 생산량이 줄어든 만큼 임금인하, 파업기간중의 휴일 무급처리”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노동조합에 대한 단결권, 단체행동권을 부정하고 노동자를 이간 분열시키려는 반노동자적 책동”이라고 규탄하였고 노동부장관 퇴진을 요구하였다. 대회 참여 노조들은 “노동부직원의 노조출입금지, 노동부가 이번 지침을 철회하고 사과할 때까지 모든 중재행위 거부”를 결의한 것이다.

뭉쳐야 산다
노동자들은 왜 지역조직으로 뭉쳤을까.
7, 8, 9 노동자대투쟁으로 그동안의 노동과 자본간 힘의 구도가 깨졌다. 폭풍처럼 밀려온 민주노조를 깨기 위해 자본가들은 위장폐업, 직장폐쇄로 맞섰다. 구사대 폭력은 투쟁 있는 곳에 늘 등장했다. [구사대는 1) 사무직 또는 조반장급의 생산직 관리자 2) 이데올로기와 물량공세로 회유 매수된 비조합원이나 비종성자 3) 계열기업의 관리자나 노동자 4) 전문 폭력집단 : 깡패나 백골단 5) 청원경찰로 구성되었다. 한꺼번에 같이 혼재된 경우도 있다. 출처 : 노동자의 소리 1988년 4월 27일] 민주노조 깃발을 지키기 위해, 노동운동 탄압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했다.
정부도 적극 나섰다. 기업내 노동조합주의, 노사협조주의 정착을 위해 각종 대책기구를 마련하고 지침을 내려보냈다. 이미 예전과 다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노동조합을 노동자의 대표조직으로 인정하고 노동조합의 결성과 일상활동에 대해서는 막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이 힘을 기를 수 있는 것들을 차단하려 하였다. 그 핵심은 연대조직 건설이나 ‘불순세력 개입’ 엄단이었다. ‘무노동무임금’ 논리를 만들어 관행으로 정착시켜 파업을 막겠다는 의지도 강력히 보여주었다. 세간에서는 파업기금이 없어서 노동자 투쟁이 소극적으로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노동부 지침을 깨기 위해 싸웠다.
자본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민주노조진영은 무차별 탄압에 상당부분 타격을 받았지만 그것이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지역 연대조직 건설과 지역 연대투쟁으로 탄압을 뚫고 나갔다. 옆 사업장에 구사대가 출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일손을 놓고 달려갔다. 철야농성을 하는 노동조합이 있다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농성을 같이하였다. 영화 [파업전야]의 장면은 사실 자체였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이 무엇을 느꼈겠는가? ‘뭉쳐야 산다.’
87년 대투쟁으로 내 사업장에 노동조합을 세우고 민주화하였다면 이후 싸우면서 연대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노동자들은 폭력, 탄압, 구속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투쟁에 의한 요구쟁취, 자신감이 더 컸던 것이다.
아울러 서울지역의 경우 다른 지역과 달리 다양한 업종의 노동조합을 포괄해야 하는 문제가 가장 큰 고심거리였다. 한편으로는 업종별 노동조합의 연대조직 결성 움직임도 일고 있던 때였는데 지역과 업종을 넘어 단결하기 위해서도 연대조직 건설이 더 절실했다. 서노협은 “임금이 월 십만 원대에서 백만 원대까지 임금차이와 근로조건의 차이가 서로 다른 측면도 많으나 다같이 기업주에 고용된 노동자라는 시각으로 서로 보완함으로써 조직의 범위를 확대”해 가겠다고 했다.

투쟁을 통한 조직 건설
지역연대조직 건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노동자들의 열망과 신뢰 그리고 투쟁이 연대조직 건설을 가능하게 하였다. 노동자들은 조직건설 원칙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노동조합에 대한 각성과 승리의 경험은 노동자들을 사업장 벽을 넘어 지역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특히 노동조합을 싸워서 건설하거나 민주화하였기에 그 요구와 열망은 더욱 컸다. [서노협신문] 창간호에 실린 조합원들이 서노협에 바라는 점을 보면 “폭넓고 심도있는 교육을 통해 노동자의식을 키워달라.” “어용노조와 가열찬 투쟁을 하자.” “업종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동질성 회복에 노력해야 한다. 특히 지역노조 활성화로 민주노조운동의 초석을 마련하는 선봉이 되어야 한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지역 노동자들은 단위사업장을 넘어 단결할 조직, 한국노총과는 다른 조직을 원했고 지도부와 간부와 조합원 모두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을 원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서노협을 건설한 것이다.
서노협의 결성은 투쟁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맥스테크사 외장폐업 철회투쟁, 지역노조 합법성 쟁취투쟁, 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부당해고 철회투쟁에 맞선 지역 연대투쟁을 거치면서 탄생하였다. 실제 서노협을 결성하자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7년 12월 15일 맥스테크노동조합 투쟁승리 보고대회에서였다. 노동자들은 지역 내 투쟁에 자발적으로 나서 지원하고 연대하였다. 투쟁기금 마련을 위하여 일일주점, 문화 공연을 열기도 하였고 연대 시위에도 적극 결합하였다.
특히 서울지역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 서울지역인쇄노동조합, 서울제화공노동조합이 지역노조로 결성되어 합법성 쟁취를 위해 투쟁하였고 이는 지역연대조직 건설의 바탕이 되었다. 1987년 노동법 개정으로 지역노조 설립 가능하게 되었으나 정부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설립신고서를 주지 않았다. 청계피복노조는 70일간 농성을 계속했고 인쇄노조도 단식과 농성으로 맞섰다. 공동으로 지역노조 합법성 공청회를 열거나 지역노조 설립쟁취 공동실천대회를 열면서 힘을 모았다. 결국 1988년 4월 28일 서울지역인쇄노조, 5월 2일 청계피복노조, 5월 3일 제화공노조가 설립신고서를 교부받았다.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에게 지역조직 건설은 절박한 문제였다. 그해 3월 안양 그린힐 공장에서 화재가 나 기숙사에 있던 여성노동자 28명 중 22명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영세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어 노조의 설립, 단결권 쟁취가 절실했다. 그러나 개개 공장에서 노조를 설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지역노조 설립은 영세 노동자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전태일 분신 후 청계지역 2만여 노동자를 대상으로 지역노동조합으로 결성되어 노동조건 개선과 합법성쟁취를 위해 싸워왔던 것이다.
투쟁을 통한 지역 연대조직 건설이 서울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87년 12월 마산창원지역에 지역조직이 건설된 이후 인천, 전북, 성남, 부산, 경기 등 곳곳에서 연대조직이 구성되거나 구성을 논의하였다.
지노협들은 노동운동 단체와의 공동투쟁을 활성화하면서 전노협 건설로 나아갔다. 노동법개정을 위한 11월 전국노동자대회, 89년 공동 임금인상 투쟁, 부천 총파업을 비롯한 서울·인천·마창 등지의 노동운동 탄압 분쇄투쟁의 결과를 모아 전노협을 건설한 것이다.
그린힐 여성노동자 사망 : 1988년 3월 25일 안양에 있는 섬유봉재공장 ‘그린힐’에서 불이 나서 기숙사에서 잠을 자던 어린 여성노동자 28명중 22명이 불타 죽은 사건이 있었다. 불이나자 그녀들은 출입구 쪽으로 몰려 나왔다가 철문이 잠겨있어서 2미터 높이의 좁은 세면장 환기창으로 다섯 명만 탈출하고 나머지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캐시미론 원단이 내뿜는 유독가스에 질식해 죽어간 것이다. (출처 : 기획창작공간 산방)
<참고> [전노협백서 1권], [서울노동조합소식], [서노협 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