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⑦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지역조직 건설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1980년 중반을 지나면서 민주노조 필요성과 공감대는 확대되고 있었다. 한국노총 안양협의회에서 지도자 연수가 잡혔고 연수 장소는 제주도였다. 위원장이 몸이 안 좋아 못 가게 되었다고 수석부위원장이 다녀와야 한단다. 제주 비까번쩍한 펜션에 도착했고 저녁 시간에 펜션 앞 넓은 공터에서 연수 개소식을 시작했다. 한국노총 지역협의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뒤이어 시장이 축사를 하고 경찰서장이 이어받았다. 그 자리 참석한 위원장들은 일상적으로 있었던 일인지 별 문제 제기 없이 손뼉 치고 있었다. 공터 한쪽에 페인트통 같은 쓰레기통이 있었는데 그 통을 집어던지며 조합원 피 빨아서 모은 조합비로 연수를 명분삼아 제주까지 와서 기관장들 축사나 시키는 게 노동조합이 할 짓이냐고 소리소리 질렀고 연수 개소식은 완전 엉망이 되었다. 그 시간부터 나를 마크하는 사람이 3명이 있었는데 대한제작소 위원장, 범양냉방 위원장, TND 위원장이었다. 평소 그들은 민주노조운동에 관심을 보였으며 수련회 등을 통해 안면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다음 날도 나는 “이게 관광이지 연수냐”고 떠들며 예정된 코스를 다녔다. 한라산에 올라가며 3명의 위원장이 이후 양수석 얘기는 다 들어줄 테니 이번만큼은 좀 참아 달라는 거였다. 그러면 “이후 한국노총에 반대하는 민주노조가 지역에도 생길 텐데 민주노조에 함께 한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했고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 3명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이 민주노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편이었고 이해가 부족했었다고 생각한다. 대우조선 이석규열사 장례투쟁 노동자대투쟁은 6.29 선언 이후부터 8월 초순까지는 비교적 원만하게 시작되어 8월 중순에는 급격하게 진행됐다. 이런 와중에 8월 28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장례식에 공권력 투입을 시작으로 정부의 대응이 강경 일변도로 변했다. 9월 3일 임금협상이 진행 중인 울산 현대중공업과 9월 4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각각 강제진압을 감행함으로써 투쟁의 기세가 꺾이며 다시 완만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점거농성과 파업 등 과격한 투쟁형태가 줄어들 뿐이었지 노조 건설은 끊임없이 진행됐다. 특히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연좌 농성으로 경찰과 대치하면서 진행된 여섯 번의 협상이 결렬되고 8월 22일 마지막 협상마저 결렬되자 협상 장소였던 옥포 호텔로 진입을 시도했다. 경찰과 백골단의 폭력 진압으로 옥포 바닷가까지 밀려났다가 재차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은 폭력시위를 하지 않는다면 길을 터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노조도 평화시위를 약속하고 앉은걸음으로 천천히 호텔로 향하던 중, 도로를 봉쇄하고 있던 경찰이 갑자기 최루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석규 열사는 경찰이 쏜 직격탄에 맞아 사망에 이른다. 우여곡절 끝에 협상은 타결되고 장례행렬이 민주열사들의 장지인 망월동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럽게 장지가 변경됐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장례를 무기한 연기했으나 정권과 언론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동쟁의 방법이라고 사건의 본질을 왜곡했다. 공권력은 시신을 탈취해 남원의 선산에 매장해 동지는 죽어서도 편안히 눈감지 못하고 또 한 번 죽임을 당했다. 장례를 앞두고 회사가 유족과 합의한 내용에는 호남지역에 대우공장을 짓겠다는 약속도 들어가 있었다. 약속대로 정읍에 5만 평 규모의 공장을 지었고 그 공장이 대우전자부품 정읍공장이었다. 공장부지는 농지 구매 시 평당 3만 원 정도였는데 공장을 짓고 난 후 땅값은 1백만 원 이상이 되었으니 이석규 열사 가족에게 베푼 시혜는 시혜가 아니라 땅 투기며 장사였다. 지역 연대투쟁으로 지노협 건설까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회오리가 경기지역도 비껴가진 않았다. 안양지역에는 신규노조 건설 열풍이 있었고, 선 파업 후 조직건설을 통해 민주노조를 설립하고 있었다. 연대가 유행처럼 번질 때 대우전자부품노동조합은 문화패가 투쟁사업장 연대투쟁에 결합했다. 안양, 수원, 안산지역이 각기 지역 연대투쟁에 돌입하면서 “담장은 달라도 노동자는 하나”라는 주장은 구호가 아니라 실천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7~9월 노동자대투쟁이 마무리되는 시기에 외자(외국자본)기업들이 철수하면서 고용과 체불임금을 요구하는 투쟁이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지역의 민주노조들은 장기투쟁사업장(안양전자, TND, 삼협정기) 투쟁에 연대하며 공장침탈을 막기 위해 밤샘을 하는 규찰조를 편성해 연대의 기운을 높여나갔다. 기업별노조의 투쟁사업장에서 벌어지는 한시적 연대가 아닌 일상적인 연대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지역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의 성과는 지역조직(지노협) 건설로 결의가 모여갔다. 지노협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사안은 복수노조와 관련된 논쟁이었고 그것은 바로 ‘한국노총 민주화론’과 맥이 닿아 있었다. 그 논쟁은 길게 진행되지 않았으며 결국 전노협 건설로 논의가 모아졌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만들어진 노조 중 일부는 지노협 사업에 소극적으로 임하기도 했다.  1987노동자대투쟁 개요 _ 한내 전시관
기존노조와 신규노조 간의 갈등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만들어진 신규노동조합들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다. “노동자대투쟁 기간에 만들어진 노조는 민주노조, 기존에 있던 노조는 어용”이라는 비논리적인 확신을 두고 ‘기존노조는 어용’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기존노조와는 민주노조운동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안양지역에는 제주에서 약속을 받은 3개 노동조합들이 민주노조 대오에 참여했는데 매우 불편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기존 노조들(대우전자부품, 대한제작소, 티엔디, 범양냉방)은 이런 상황에서 이들(신규노조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발을 빼기 시작했다. 기존노조를 버리고 갈 수도 없었고 영양가 없는 토론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토론 끝에 노동조합의 성격을 기존노조와 신규노조의 대립이 아니라 민주적 성격을 지지하는 노조와 구태의연한 활동에 머무는 어용노조로 정리하면서 논쟁은 간신히 정리되었고 경기지역노동조합연합은 기존노조들이 결합하는 지노협이 되었다. 대우전자부품노동조합 위원장 당선 어느 날 위원장이 긴히 얘기 좀 하자더니 “나는 건강(간)이 안 좋아 더는 위원장을 할 수 없다”며 나에게 차기집행부를 맡으라고 했다. 선거 준비에 돌입했다. 지부가 안양, 안성, 구미, 정읍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선대본도 지부별로 꾸려야 했다. 단독후보로 예상했으나 경선하겠다는 상대가 나타났고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양규헌 선대본은 “한 손에 연대의 깃발을 또 한 손에 노동해방의 깃발을 움켜잡고 조합원과 함께 노동해방을 향해 힘차게 전진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다우전자 위원장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대공장에서는 이런 주장을 해도 괜찮으냐”고… 선거에서 대우전자부품노동조합 위원장에 당선됐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활동의 범위도 넓어졌다. 노조위원장이 되면서 안양집 옥탑방에는 밤늦게까지 조합 간부들, 지역 동지들이 토론을 하고 회의를 했으니 아버지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신 모양이다. 아내를 불러서 “저놈이 요즘 뭘 하느냐”는 물음에 “노조위원장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버지 눈초리는 그때부터 싸늘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매우 온화해지셨다는 것을 감각으로 느꼈다. 아버지가 생각이 바뀌신 걸까(운동에 동의) 아니면 자식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신 걸까 갸웃했었는데 금세 그 궁금증이 풀렸다. 그때 아버지는 복덕방에 나가셨고 복덕방에 오는 영감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신 모양이다. “아들 하나 있는 게 평생 속을 썩인다”고. 복덕방 노인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아들이 노조를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하셨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있는 노인이 손뼉을 치면서 “양 영감은 왜 그렇게 무식하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요즘 노조 위원장하면 1년에 집이 3채 생기는 횡재를 하는 것이니 출세를 한 건데 그걸 걱정하면 어떡하느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