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 시기 : 1988년 6월 18일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인천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화학공업의 대기업노동자들이 지역투쟁을 주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어용노조의 벽을 뛰어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는 주로 중소사업장의 신규노조에 계승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역 내 노동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조 건설 공동실천위원회’를 결성하는 한편 인천지역 민주노조 대표자들의 모임도 진행했다.
1987년 9월 초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농성에 공권력이 투입된 것을 시작으로 태연물산, 한광산업 등의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자 이에 맞서 ‘노조탄압저지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연대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기간 계속된 한독금속 직장폐쇄 철폐투쟁이 1988년 3월에 승리로 끝나자 연대투쟁을 전개해온 사업장들은 자신감을 가졌고 다른 사업장에서도 연대활동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어 이를 계기로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원회(인노협준비위)’가 결성됐고, 이때부터 지역조직 건설이 본격화됐다.
이렇게 1988년 6월 18일에 결성된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는 창립선언을 통해 △노동3권 완전 확보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권리 신장 △공동교육 지원, 참여 노동조합의 강화, 노동자 문화 창조와 보급 △사회민주화를 위해 제민주세력과 연대투쟁 전개를 천명하며 인천지역의 민주노조 연합체로 자기위상을 확고히 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소강상태에 빠지고, 지역 내 탄압이 한층 거세지기 시작한 10월 들어 10~11일 인천지역 14개 노조 대표와 간부 35명이 수련회를 개최했다. 이어 10월 20일에는 동성개발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해고에 공동대처하기 위해 30개 노조 위원장이 모였고 , 11월 22일에는 69개 노조 600여 명의 간부들이 참가한 ‘신규노조 대잔치’가 개최됐으며, 12월 9일에는 부평1동 성당에서 ‘노동조합 탄압 규탄대회’가 열려 지역 연대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88년 들어서도 노동조합들 사이의 연대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2월 3일에는 16개 노조 100여 명이 참가한 ‘임금과 임금인상’에 대한 교육을, 2월 10일에는 12개 노조 80여 명이 참가한 ‘임투사례와 투쟁계획 수립’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 2월 29일에는 16개 노조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그 간 지역연대 활동의 성과를 공유하고 인노협준비위 결성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3월 16일에는 12개 노조 7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인노협준비위 결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으며, 3월 27일에는 22개 노조 1,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원회 발족 및 1988년 임금인상투쟁 전진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인노협 건설을 위한 본격적인 사업이 이어졌다. 인노협준비위에는 한독금속, 대흥기계, 남일금속, 코스모스전자, 대한마이크로, 청보산업을 포함하여 총 22개 노조 3,500여 명이 참가했다.
인노협 초대의장에는 당시 구속 중이었던 황재철 한독금속노조 위원장이 선출됐다. 수석부의장 겸 의장 직무대행에는 신안식(대흥기계노조 위원장), 부의장에는 최승기(남일금속노조 위원장), 류권상(청보산업노조 위원장)이 선임됐고, 회계감사에는 박복록(신광기업노조 위원장), 박평숙(진성전자노조 위원장), 사무처장에는 김해숙(코스모스전자노조 위원장)이 선출됐다.
인노협은 1988년 6월 18일 27개 사업장 4,000여 명의 조합원을 기준으로 배정된 대의원대회를 통해 창립했다. 대의원은 조합원 100명 미만까지 1명, 100~299명까지 2명, 300~499명까지 3명, 그 이상은 500명 단위로 1명씩 추가 배정하도록 함으로써 최고의결기관인 대의원대회가 지나치게 대공장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지했고, 중소사업장에서도 최소 1표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배려했다. 인노협은 결성 이후 총회, 대의원대회, 의장, 운영위원회, 사무국, 각 국(교육국, 조직국, 쟁의지도국, 문화국, 홍보국, 조사통계국)으로 이어지는 운영체계를 확립했으며 창립 4개월 후인 1988년 10월 27일에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규약을 개정하고 새 임원을 선출하는 등 조직을 정비했다. 인노협 창립 때 참가조직과 조합원수는 27개 노조 4,000여 명에 이른다. 이는 준비위 시기인 3월보다 조합원수에서 배 이상 늘어난 숫자이며, 결성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10월 27일 임시대의원대회 때에는 총 47개 노조가 가입했다.
인노협은 신규노조 결성 지원과 가입노조에 대한 교육선전 등 상급조직으로서 일상활동을 강화함과 동시에 노조탄압 저지투쟁, 노동법개정 투쟁, 위장폐업 분쇄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주안지역의 세창물산 위장폐업 분쇄투쟁은 주안지역의 연대활동을 촉진하여 인노협 조직확대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노동법개정 투쟁 과정에서 단위노조를 순회하면서 슬라이드 상영, 교육, 선전선동을 실시해 조합원 대중의 정치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성과는 11월 13일 여의도 집회 및 행진에 2,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인노협 가입 조합원에 대한 대중적 지도력의 강화는 물론이고 지역 전체에서도 그 지위와 역할을 획기적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창립 이후에도 인천지역 내 대공장들의 민주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인노협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일각에서는 “한국노총 인천시협의회 참가와 의무금 납부”를 주장하기도 해 많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