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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투 결성과 결사투쟁(1992년 10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2-10-08 조회 203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 결성과 결사 투쟁 


전국 해고자 공동투쟁의 시작

1991년 하반기에 전노협 차원에서 해고노동자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의 필요성이 제기돼 10차례의 전국 회의를 거쳐 199210월에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를 구성했다.

해고노동자들은 19911110일 세종대학교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 100여 명이 참석해 전국해고노동자대회를 했다. 이어 199236~7일 대전 매포수양관에서 KBS, 서울지하철, 대우조선, 한진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정밀, 태평양화학, 서울지역의료보험,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부산고무노동자협의회 등 10개 노조·단체 2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해고노동자 수련회를 했다. 이 수련회에서 320일을 전국 해고노동자의 날로 선포하고 전국 동시 출근투쟁, 4월 말5월 초에 ‘(가칭)해고 규제를 위한 특별법제정 촉구 공청회, 5월 중 전국해고노동자대회개최 등 공동 투쟁을 결정했다.

투쟁 계획에 따라 320일에 인천의 대우자동차, 서울의 백산전자, 천지산업 등 7개 노조, 부산의 대우정밀, 한진중공업, 거제의 대우조선, 포항의 강원산업, KBS, 전국지역의료보험노동조합총연합 등 전국적으로 5개 지역 16개 노조 140여 명이 출근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51일 노동절 대회에 수도권 중심으로 결합해서 해고자 문제를 홍보했다. 1992613일에는 전국의 해고노동자 20여 명이 구미의 양우화학, 서울의 중원전자, 원진레이온, 백산전자, 마창의 대한광학 등 고용 문제 발생 사업장과 전국노동단체연합,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등 노동단체와 결합해 고용안정 보장! 해고자 원직 복직 촉구를 위한 국회 항의방문을 전개했다. 상반기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1015일에는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현대중공업, 대우정밀, 풍산금속, 한진중공업 등에서 힘찬 출근투쟁을 전개해 현장의 조합원들에게 큰 힘을 불어넣었다.

 

전해투 결성과 결사투쟁 배경

이러한 투쟁을 거쳐 1992930‘9차 전국 해고노동자 회의에서 현대자동차 구속·수배·해고노동자 84명 연명으로 전해투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전국 해고자 회의와 전노협은 그 취지에 공감하고 긍정적으로 검토해서 마침내 108‘10차 전국 해고노동자 회의에서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 서울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대한교육보험, 한국야쿠르트, 서울대병원, 서울지역의보, 태평양화학, 나우정밀, 한양대병원, 대우자동차판매주식회사, 한국일보, 대림엔지니어링, 경희대, 해태유통, 서울지하철 등의 해고자), 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현대자동차해고자협의회, 현대중공업해고자협의회, 현대종합목재해고자 등 현대 계열사 해고자), 한국방송공사해고자, 문화방송해고자, 한국공항해고자, 기아자동차해고자협의회, 대우자동차해고자협의회,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한국타이어해고자협의회, 청주일터되찾기모임, 금호타이어해고자협의회, 대우조선부당징계해고자대책협의회, 대림자동차해고자협의회, 기아기공해고자협의회, 세일중공업해고자협의회, 코리아타코마해고자협의회, 세신실업해고자협의회, 창원금성사해고자협의회

이렇게 구성된 전해투는 28개 해고자협의회, 해고자 150여 명이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해고노동자 원직 복직을 위한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118일 전국노동자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전노협의 조사에 따르면 노태우 정부가 등장한 1988년부터 1992년 말까지 1,849명의 노동자가 구속되고, 전교조를 제외하고도 3,226명의 노동자가 노조 활동과 관련해 해고됐으며, 수많은 수배자가 발생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군사정권의 잔재 청산과 대화합이라는 명목 아래 36건국 이래 최대라는 사면을 감행했지만 1993131일 현재 125명의 구속노동자 중 단 15명만 석방됐고, 노동부장관의 해고자 복직지침 발표 후에도 구체적인 후속 조치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남발한 노동자들에 대한 구속·수배를 정당화시켜준 것은 물론 김영삼 정권의 개혁 조치가 전시효과를 노린 일회성 선언임을 드러낸 것이다.

전해투는 331일 노태우 정권에서 해고된 3,226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현대자동차 등 전국 10개 사업장 18,838명의 조합원 서명을 첨부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구속노동자 석방, 해고노동자 복직, 수배노동자 해제를 청원했지만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이에 전해투는 목숨을 건 선도투쟁을 전개했다. 김영삼 정권 출범 후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투쟁이었으며,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의 환상을 깨고 본질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9347일 현재 전국 주요사업장 해고노동자 현황 : 현대자동차 17(수배 13, 구속 2), 서울지하철 11(수배 1, 구속 1), 현대중공업 20(수배 2), 대한교육보험 9, 대우조선 27(수배 1), 대우자동차판매 42, 대우정밀 43, 서울대병원 16, 기아기공 12(구속 2), 태평양화학 2(수배 4), 세신실업 5, 한국야쿠르트 21, 세일중공업 22(수배 1, 구속 1), 서울지역의보 9, 대림자동차 19, 의보총련 32, 동경전파 2, 한국일보 33, 한양대병원 1, 풍산금속 안강 수배 3명.

 

1차 중앙 단식투쟁(199347~24)

전국 각지의 수배·해고노동자 70명은 구속·수배·해고의 심각성을 알리고 정권과 자본의 실질적인 조치를 촉구하기 위해 47일 오후 2시부터 기독교회관 7층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47일 전해투 단식농성자들은 종로 5가에 있는 K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긴급 대표자 회의를 열어 상황실, 총무, 홍보, 대외협력, 진행 등의 실무체제를 구성하고 결단식을 한 뒤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28개 노조 단식자 37, 동조 농성자 32명은 구속노동자 석방, 수배 해제와 6공 하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조치와 사용자들이 해고노동자의 복직에 적극 나설 것을 요구했다.

48일에는 25개 언론사가 참여한 가운데 1차 기자회견을 열어 단식투쟁의 의의와 요구 조건을 천명했다. 9일에는 농성자들이 6개 조로 나누어 서울 전역에 대국민 홍보물 1만 부를 배포했으며 농성 지원대책위 구성을 위한 협조공문과 정부와 정당 및 경총 등에 면담 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단식투쟁 4일째인 10일에는 조찬보고회에 참여해 문익환 목사 외 9명이 주축이 된 농성 지원대책위원회를 구성했는데, 대책위에서는 여론화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농성장 지지방문을 조직하기로 해 이후 대책위원회 참여 인사들이 농성장에 방문했다. 11일에는 현총련 대의원대회에 참여해 투쟁 상황을 보고했다.

12일에는 이기택 민주당 총재, 김종필 민자당 대표, 노동부 장관, 법무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하는 공문, 한국노총 및 경총에 보내는 복직 촉구 공문 등을 발송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민자당에 보내는 청원서 및 각 언론사에 413일 기자회견 관련 협조공문도 발송했다. 13일에는 대우그룹 항의방문과 기자회견을 진행했는데, 항의방문 도중 52명이 연행되기도 하였다. 기자회견에는 15개사 기자 17명이 참석했다. 14일에는 이기택 대표와 청와대 김정남 수석과의 면담을 진행했는데, 이기택 대표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고 김정남 수석은 공감대를 확산하는 것은 좋으나 급박하게는 해결될 수 없다고 했다. 이날 한양대병원에서 단식자들의 건강 상태를 점검했는데,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사람이 많아졌다.

15일에는 탑골공원에서 구속 수배 해고노동자 원상회복 지원대책위원회주최로 구속 수배 해고노동자 원상회복 촉구대회를 열고 명동성당까지 가두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날 집회에는 울산, 마산, 창원, 거제, 부산, 경주, 포항, 인천, 부천, 경기남부, 서울 등 여러 지역의 수배·해고노동자와 가족 및 노동자들을 비롯해 노동, 정치, 종교계 인사들과 재야원로, 시민 등 500여 명이 참가했다. 시민들은 모처럼 열린 시위를 보고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즉석에서 188,430원이 모금되기도 했다.

단식 17일째인 23일에 이인제 장관이 경제 5단체장의 공동선언을 통해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적극 주선하겠다고 발표함에 따라 정부의 전향적 자세를 확인하고 24일에 지역과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복직을 현실화하기로 결의하면서 단식농성을 해산했다.

1차 농성투쟁은 지역 해고노동자들의 지대한 관심과 동참 속에서 전개됐다.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 박상철, 김영균이 정문 앞 바리케이드에 쇠사슬을 묶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해 결사 의지를 전국의 해고노동자들에게 전달했으며, 거제 대우조선에서도 412일부터 최은석 위원장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마창지역에서는 414일부터 창원 민주당사에서 8개 사업장 해고자들이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인천에서는 대우자동차 동지들이 49일부터 출근투쟁을 전개하며 투쟁의 불꽃을 지폈으며 5년 역사를 자랑하는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415일 노동청을 항의방문했다. 서울에서는 대우그룹 해고노동자들의 본사 항의투쟁이 다른 사업장으로도 확산돼 서울지역해고자협의회을 결성하고 장기적 투쟁을 결의했다. 광주지역에서는 해고노동자 5명이 중앙 농성투쟁에 결합했고, 이를 계기로 광주지역해고자협의회을 결성했다. 부산지역은 419일부터 사업장별 동시 출근투쟁을 하고 해고자협의회 대표자 10여 명(대우정밀, 한진중공업, 고무노협)이 무기한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경기남부지역에서는 412일 해고자 총회를 열어 경기남부지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를 결성, 중앙 농성투쟁에 적극 결합하기로 했다. 대구에서도 415일 해고노동자들이 노동청을 항의방문했다.

단식농성이 18일째에 접어들면서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혔고, 해고노동자 복직에 대한 정부의 전향적인 자세를 확인했다고 판단해 투쟁을 마무리한 것이다. 하지만 노동부장관의 약속을 믿고 농성 대오를 해체함으로써 막 치솟아 오르던 지역 투쟁의 열기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농성을 해산하면서 지역별로 투쟁을 지속할 것과 전노대 준비위가 전해투 문제를 받아안아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받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중앙 농성 대오라는 전해투의 상징적 구심이 없어져 투쟁 열기는 사그라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18일간의 단식투쟁은 대선 패배로 일시적으로 침체된 임금인상 투쟁 전선 강화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문제를 사회적 쟁점으로 제기 지역·그룹별 해고자협의회라는 해고자조직 건설 2차 투쟁 발판 마련 등의 성과를 남겼다.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지원대책위원회 결성(1993년 4월 10일)

1993410일 오전 730분에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전해투 주최 조찬보고회에 신창균, 박형규, 김근태, 김말룡 등 3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석했다. 참가자들은 구속자 석방, 수배자 해제, 해고자 복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다양한 차원에서의 지원을 결의하면서 이러한 사업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지원대책위원회’(지대위)를 구성하기로 했다.

지대위는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공동대표는 김승훈, 김찬국, 문익환, 박형규, 송건호, 이돈명, 이소선, 이효재, 한상범, 홍우(가나다 순)가 맡았고(19941월 계훈제, 김금수, 김진균, 백기완, 조화순 등 5명 포함) 집행위원장을 두었다.

 

2차 중앙투쟁과 전국해고노동자대회(1993년 5월 31일 ~ 7월 3일)

전해투 해고자들은 1차 단식농성 투쟁을 해산한 후 지역별로 결사투쟁을 전개했다. 마창 해고자들의 18일 단식, 울산 해고자들의 18일 단식, 경주 포항지역 해고노동자들의 형산강 로타리 35일 텐트농성, 대구지역 해고노동자들의 민주당 점거농성, 대전지역 해고노동자들의 10일 단식, 기아그룹 해고노동자들의 10일 집단 단식, 그리고 지역마다 노동부 집단 항의투쟁, 수많은 해고발생 사업장에서 출근투쟁 등이 전개됐다.

그러나 423일 노동부 장관이 약속한 경제 5단체장의 해고노동자 복직을 위한 공동선언 추진등 가시적 조치는 전혀 이행되지 않았고, 단위사업장별 해고노동자 복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대화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전국의 해고노동자들은 각 단위사업장, 지역의 산발적인 투쟁만으로 복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2차 중앙 집중투쟁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됐다. 이에 1차 단식투쟁 과정과 단식농성 해산 후에 결성된 지역·그룹별 해고자협의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전해투 지역대표자회의에서 2차 중앙 집중투쟁을 결의하게 됐다.

1993531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2백여 명의 해고노동자들이 집회와 함께 항의농성을 시작해 경제5단체에 대한 항의방문, 해고 발생 그룹 타격투쟁, 대시민 홍보전, 여러 집회에 참여해 선전홍보 등을 6월 말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해고자 복직투쟁은 정부의 생색내기식 발표와 자본가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었다. 전국의 해고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결집해 자본을 총체적으로 압박해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해고자 복직문제는 유실될 위기에 처했다. 원직 복직 현실화를 위해서는 조직대오부터 튼튼히 꾸리고, 전국적으로 결집해 세력을 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자본을 압박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전국의 해고자들은 73일 결집투쟁을 결정했다. 전해투는 73일 집회를 계기로 전국 해고노동자들의 지지 속에 전국적 규모의 원직복직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선포하고, 자본가들의 탄압에 대해 전체 노동자의 선봉에서 투쟁해 나갈 것을 선언했다.

73일 오후 3시부터 서울역광장에서 정부 당국의 기만적 조치 규탄하고 실질적 조치 촉구 부의 공정분배를 가로막는 경제단체의 집단적 이기주의 폭로 원직복직을 투쟁으로 실현 강력한 대정부·대자본가 투쟁 결의 투쟁의 대오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지속적 조직작업 노동자 대중의 지지와 동참을 위해 노동자 전체 이해를 대변하는 투쟁 전개 등을 목표로 집회를 진행하고 서울역, 시청, 광화문, 탑골공원으로 행진하며 대국민 선전전을 벌였다.

해고노동자들의 열망을 모아 나갔던 2차 농성투쟁은 실제 중앙 집중투쟁을 힘있게 전개할 수 있는 대오를 갖추지 못했다. 결국 경제 5단체 항의방문 투쟁 이후에는 중앙 농성이 정부나 자본을 직접 타격하는 투쟁이 되기보다는 중앙 농성 자체를 유지하는 투쟁이 되어 무산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해고노동자들은 1차 투쟁과는 달리 2차 농성투쟁을 계기로 장기적 전망 하에 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방향을 잡아갔다. 아울러 지역의 해고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전해투의 조직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가시적 효과로 대기업 위주로 복직이 실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전해투 투쟁이 자본과 정권을 압박해 어떠한 형태로든 해고자 복직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정권은 해고자 복직문제 자체를 교섭안으로조차 거론하지 못하게 했던 지침을 철회하고 기업별로 융통성을 부여함에 따라 임금인상 투쟁을 마무리하며 해고자 복직이 가능하게 되었다.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투쟁(1993년 9월 ~ 1995년 12월 23일)

19936월 말부터 전해투 투쟁 기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72일 전해투 지역대표자회의에서는 구속수배해고노동자의 원상회복은 단기적 투쟁이 아닌 끈질기고 완강하게 그리고 대중적인 투쟁으로 자본과 정권에 대한 압박을 가할 때 가능하다. 전해투는 9월 정기국회를 겨냥해 투쟁하며 대규모 결사투쟁으로 천만 노동자의 사활이 걸린 노동법개정 투쟁과 결합해 이를 촉발시킨다. 9월까지는 가을투쟁 대오를 조직하고 투쟁기금을 마련하며 제 민주단체, 학생 등이 투쟁에 결합할 수 있도록 조직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내용이 73일 해고노동자 결의대회에서 대중적으로 결의되고, 74일부터 각 지역에서 2~3명씩 중앙 대오를 파견해 농성을 유지하면서 가을투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하반기에 접어들어서도 정부의 복직 약속은 반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았고, 해고노동자들도 스스로 복직이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이 상경했다.

앞서 1991년 여름, 자본과 정권은 부산지역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을 살해하고 대우정밀노조에는 폭력 경찰을 앞세워 많은 조합원들을 해고했다. 이러한 탄압은 대우정밀노조의 중심 대오인 병역특례자들을 제물로 삼아 협상의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였고, 특히 정권은 병역특례자들을 해고해 민주노조운동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이러한 정경유착을 통해 회사에서 해고하면 병무청은 곧바로 영장을 발부하는 신속한 모습을 보였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 산업역군이라는 구호 속에서 뼈 빠지게 5년 넘게 일한 대가가 해고와 구속, 그리고 수배생활로 이어진 것이다.

199163일 공권력 투입 이후 대우정밀노조 투쟁지도부는 부산대학교 내에 임시 상황실을 설치하고 지속적인 조합원 임시총회를 열면서 내부조직을 정비했다. 특히 65일 공권력 침탈 규탄대회를 부산대학교 본관에서 조합원 800여 명이 모여 힘차게 진행했다. 당시 지도부가 대량 구속수배된 상태였으며, 대우정밀 내에는 경찰이 상주하고 있어서 지도 집행력을 외부에 둘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공권력 침탈 이후 조합원들의 패배의식 극복과 내부조직 정비, 구속자 면회투쟁 등이 주요 사업이었다. 그렇지만 200여 명에 이르는 대량 징계로 인해 조직력 회복은 매우 힘든 상태였다.

618일 해고 후,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715일 첫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대우정밀, 현대중공업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715일부터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소속 대학생 40여 명과 함께 신민당 농성에 돌입하며 병무청 항의방문과 대국민 선전전을 전개했다. 16일에는 신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과거 학생운동 탄압의 일환으로 자행된 강제징집에 대해 반발 여론이 높자 6공화국에서는 합법을 가장하여 시국 관련 학생뿐만 아니라 방위산업체 특례 보충역 노동자에게도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성명서를 채택해 해고무효 확인소송 계류 중인 노동자는 최종 판결 때까지 징집 연기 해고되어 징집될 경우 특례복무 기간 인정 병역악법 개정 녹화사업 및 조직사건 즉각 중단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상경투쟁으로 전노협과 여러 민족민주단체에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고통을 알렸고, 하반기 민주노조운동의 주요 사업인 노동악법 철폐투쟁과 아울러 방위산업체에서 민주노조 구심을 튼튼히 하기 위해 병역악법 개정투쟁에 적극 나서게 했다.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영장 발부 전인 8월 초순에 해고무효확인소송을 부산지법 울산지청에 제기했고, 입영 정지 가처분신청도 부산고법에 제기하면서 사법부에 해고무효확인소송 중에 입영영장 발부의 부당성을 호소했지만 이틀 만에 기각됐다. 그 후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자 8명의 기나긴 수배생활이 시작됐다.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19951223일까지 48개월 동안의 수배생활은 인간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그들은 한 치도 흔들림 없이 대오를 유지했다.

()풍산, 대우정밀 등 영남지역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1991127일부터 10일까지 부산대학교 문창회관에서 강제징집 철폐와 병역악법 개정을 위한 단식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때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민주주의민족통일부산연합 등 7개 단체로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영남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1991년 하반기 단식투쟁은 69명에 이르는 영남지역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이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과 병역특례 제도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병역악법 철폐투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는 병역특례 사업장이 70여 개에서 3,200개로, 대상자는 15,000명 이상으로 늘어난 시점이었고 정부는 산업체 군인력 투입방안을 결정해 국회에 상정한 상태였다.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8명은, 19918월부터 19938월까지 부산대학교 내 대우정밀 해고자 복직실천협의회’(대정해협) 사무실에 상주하면서 노동조합 조직강화, 출근투쟁, 대의원 선거 등 주로 노동조합 조직력 강화사업에 주력했다. 출근투쟁을 전개하던 1992513, 노무팀이 윤명원 위원장을 비롯한 해고자 6명을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정해협과 대우정밀노조의 항의에도 회사가 특별채용한 특전사 출신 노무팀은 다음날 또다시 출근투쟁을 벌이던 해고자를 폭행했다. 대정해협은 부산지역 단체들과 함께 15일부터 철야농성과 항의방문을 전개하며 회사측의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맞서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

19939월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2년간의 부산지역 투쟁을 정리하면서 상경투쟁을 결의했다. 지역 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고발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로 한 것이다. 1993911일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8명은, 서울역에서 열린 4차 전국해고노동자대회에 참가, 삭발과 단식투쟁을 결의했다. 이들은 물과 소금만 섭취하면서 서울 민주당 마포당사에서 1018일까지 무려 38일간 목숨 건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단식투쟁 26일 째부터 해고노동자들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황철이(대우정밀)는 무릎관절 악화로 다리 전체가 마비되고 있었으며 기력상실로 실신했다. 황용범(대우정밀)B형 간염증세를 보였고 체내 저항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조수원은 탈진으로 실신했고 신이철, 염성호는 몸무게가 45kg 이하로 내려가고 혈압이 40 이하로 떨어지는 등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단식투쟁이 30일을 넘어서 황용범의 목에서는 피가 올라오는 등 3명이 실신해 병원으로 급히 후송됐다. 하지만 이들은 깨어나자마자 입원 치료를 거부하고 곧바로 단식에 재합류, 강제징집 철폐와 원직복직의 그날까지 결코 단식을 풀지 않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이러한 단식투쟁에 문익환 공동의장 등 지대위 40여 명이 108일 저녁 대책을 논의하고 무기한 철야농성을 결의하기도 했다. 부산지역에서도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삭발·단식투쟁에 대한 지원투쟁이 이어졌다. 대정해협 10명이 913일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노조는 해고자 복직 조합원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부산 양산 노동법 개정 공동투쟁본부14일 노동자대회를 열어 연대투쟁 결의했고, 집회를 마친 뒤 대우정밀노조 투쟁지원을 위한 범시민대책회의’(대표 박순보 부산연합 상임의장)15일 기자회견, 18일 부산지방병무청 항의방문, 22일 대우정밀 회사 앞 범시민대회 등을 열었다.

1018일 마지막까지 남은 박정수 동지마저 실신해 병원으로 이송됨에 따라 단식투쟁은 38일 만에 일단락됐다. 한편 이날 전해투는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이인제 노동부장관을 만나 대우정밀, 풍산금속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수배 해제와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협상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이인제는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군 복무를 하고 난 후 복직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국 순회투쟁(1993년 10월 22일 ~ 12월 4일)

노동부 장관의 교섭이 실망스럽게 끝나고 구사할 수 있는 전술 폭도 제한되면서 전해투는 노동법개정 투쟁을 앞둔 시점에서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한 논의를 이어갔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전국 노동자들이 노동법 개정의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점거 등의 방법으로 선동하자는 의견과 이인제 장관의 약속을 물고 늘어지며 전국의 해고 발생 사업장들을 순회 투쟁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논의 끝에 순회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해고 발생 사업장을 돌며 해고노동자들을 전해투와 긴밀히 결합시키는 것은 물론 해고자 복직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부각시키자는 의도다.

1022일부터 대우, 금호, 풍산, 대우전자, 럭키금성, 조선내화, 효성그룹, 삼미그룹, 한진그룹, 태평양, 포항제철, 기아그룹, 소예산업, 삼성시계, 이천전기, 효성바스프, 유공, 태광산업, 한진중공업, 동양나이론, 조선내화, 동밀철강, 풍산금속, 세신실업, 효성중공업, 대림자동차, 코리아타코마, 금호타이어, 금성알프스, 동화기계, 대우전자, 대우캐리어, 남선물산, 동산의료원, 동원금속, 대동공업, 대우기전 등 해고 발생사업장, 성남, 안산, 인천, 울산, 부산, 광주 등 지방노동청과 병무청 방문투쟁, 그리고 투쟁사업장에 연대하며 124일까지 전국 순회투쟁을 마치고 서울 농성장으로 복귀했다.

전국 순회투쟁을 벌이는 해고노동자들에게 기업주들은 청원경찰, 관리자를 대거 동원해 대화조차 거부함으로써 수많은 사업장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풍산금속, 대림자동차, 효성중공업 등에서는 다수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해투는 피맺힌 투쟁으로 44개 사업장에서 교섭을 성사시키고 42개 사업장에서 해고자와 기업주 간의 해고노동자 복직을 위한 교섭 통로를 확보하는 성과를 남겼다. 또 순회투쟁을 계기로 전해투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했으며, 해고자들 투쟁의 위력을 자본과 정권에게 과시함으로써 전해투 위상도 확고하게 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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