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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라면 노동자의 기억(15)
첨부파일 -- 작성일 2022-03-16 조회 207
 


 N라면 노동자의 기억  (마지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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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개미와 진딧물이 떠올랐다. 개미가 진딧물의 천적인 무당벌레를 퇴치 해주고 진딧물의 똥구멍에서 단물을 빨아먹으며 공생한다는 얘기였다. 노조위원장과 대의원 선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해 어용노조를 만든 후 연 7억을 주고 받은 N라면과 어용노조 역시 영락없는 개미와 진딧물과 같은 공생관계였다.

삼청교육대를 갓 출소한 안양지역 조직폭력배를 구사대로 특채해 민주파 노동자들을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하는 일을 전담시킨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는 개미와 진딧물과 같은 선순환적인 공생과는 전혀 다른, 사회를 분열과 반목 속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적인 공생이었다. 19894월부터 지급해야 할 주 2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을 노사가 야합해 차일피일 미루다 8월부터 지급한 것도, 4월부터 7월까지 4개월분은 이미 지난 일이라며 시치미를 떼며 노사가 합심해 임금착취를 한 것도 그랬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고 명시한 민법 2신의성실의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기도 했다. 사회적 타당성이 인정되지 않는 위법한 행위로 부당이득 죄이기도 한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N라면과 어용노조의 악순환적인 공생은 1975년부터 시작한 셈이었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자재과 주임인 성낙선을 내세워 어용노조를 만든 후 이후 14년간 반장출신 어용노조 위원장들과 밀실야합을 일삼으며 서로 돕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위한 단체협약이 아닌 사용자만을 위한 단체협약을 만들었다. 회사 측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징계할 수 있도록 애매모호한 징계조항들을 40여 가지나 나열하고, 징계위원회 의결 시 노사동수일 경우 회사 측 대표인 징계위원장이 결정할 수 있도록 명시를 한 것이다. 인사권을 회사 측의 고유권한으로 못 박아 보복 징계성 인사이동을 마음대로 하며 습관적인 부당노동행위를 만끽하게 한 것도, 노사합의 없는 일체의 홍보물을 식당 게시판에 게시할 수 없게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노조 공고문조차 노무과의 검인을 받아야 게시활수 있고, 그러다보니 노동조합의 홍보부가 홍보물 하나 제대로 만들지를 못했던 것이다. 대의원들의 조합원 상대 공청회나 설문지, 대의원회의 소집요구서 서명까지도 불법과 선동으로 매도했다.

N라면과 어용노조는 32세의 노동자를 두 번이나 죽이기도 했다. 1978년 임석철 노동자가 저임금에 항의해 신길동 대신공장의 우물 속으로 투신했을 때도 은폐와 조작에 급급했다. 평소 바른 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임금인상에서 불이익을 받고 연장과 휴일 근로에서도 배제돼 쪼그라든 월급봉투에 분개한 나머지 저녁에 술을 먹고 들어와 일으킨 사고였다. 그럼에도 조간신문인 D일보와 K일보는 야근 때 잠을 자다 들켜 징계를 당한 데 대한 분풀이로 난동을 부렸다고 거짓 보도를 했다. 노동자를 상대로 취재를 해 비교적 사실에 입각해 보도를 한 H일보와 주간H는 발매 두 어 시간 만에 정체모를 사내들에 의해 수거되었고, 오후에 발매된 주간H 2판엔 그 기사가 빠진 채 여성생리용품인 템포 광고가 실렸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은 꿀 먹은 벙어리였던 것이다.

이들의 공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노동자가 죽어나가고 콘베어에 손가락이 끼는 등 크고 작은 사고들이 줄을 이어도 정문 앞 재해기록판을 일년 365일 녹색 무재해사업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회사 이미지와 불이익 등을 이유로 대부분의 사고를 산재처리 대신 공상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197711월 내가 야근 때 라면포장기를 정비 중 오른손 엄지 두 번째 마디가 톱실러에 물려 전치 6주의 진단을 받아 후유장애 보상을 받으려하자 절단이 아니면 산재보상이 안된다며 사인을 거부했다. 그래 두어 달을 구로노동상담소를 들락거리며 실랑이를 하다 675천원을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1983년엔 김숙희 등 세 여성 노동자들의 원풍모방 근무사실을 귀신같이 알고 이력서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사 28일 만에 내쫓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은 노조 가입을 원천봉쇄하기도 했다. 노동법상 고위 임원이 아닌 경우 조합원의 자격이 인정됨에도 노사가 단체협약에 생산직 근로자로 한정해 하위직 관리직들과 라면과 스낵을 대리점으로 배송하는 운전기사들까지 노조가입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1975년 노조창립이래 14년간 노조가입을 요구했다 회유와 협박을 이기지 못해 사표를 쓰고 나간 배송과 기사들이 수십 명이나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1987년 노조위원장 선거가 끝난 직후엔 부산공장 민주세력의 구심점인 공무과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기도 했다.

단언컨대 이런 기업주와 어용노조의 부조리를 확대 재생산 해온 책임의 절반은 노동부라는 게 13N라면 노동자 생활을 통해 체득한 나의 확신이다. 제삼자 입장에서 노사 공히 노동법을 준수하도록 감독해야 할 노동부가 일방적인 기업주 편들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부당노동행위와 근로기준법 위반을 시정해 달라는 진정을 해도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뤘고, 진정인은 며칠 후 관리자들에게 불려 다니며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고 부서이동까지 당했다.

이 나라의 기업주들은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성실한 노사협상을 할 필요성도 이유도 없었다. 노사협상 자리에서 강경파들을 외부불법단체의 사주를 받는 불순세력으로 매도하며 노노 분열과 불신을 부추기기 바빴다. 그렇게 시간끌기를 하며 파업을 유도했다. 그리고는 노동쟁의조정법에 따라 모든 절차를 거친 합법적인 파업도 불법이라는 악선동을 일삼았다. 그것도 모자라 노동자들을 업무방해 등으로 고발하고 수십억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럼 경찰과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강경파들을 잡아들이고, 법원 역시 몇 년씩 징역을 선고하고 노동자들의 급여까지 가압류시켰다. 언론과 학계 등도 파업의 경위와 과정은 무시한 채 파업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손실만 강조하며 기업주 편들기 바빴다. 노동법이 있지만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며 절규했던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동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다.

공동체 세상의 절대적인 가치인 서로 돕고 사는 공생관계가 선순환 구조만이 아닌 악순환 구조도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노동자들 사이의 불신과 분열은 물론 노사, 나아가 사회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는 이 나라의 적폐중의 작폐임을 절감한 것이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있고, 이기는 게 정의이고, 반대자들을 불령선인, 반동으로 매도하고 숙청시킨 일제, 공산독재 시절이 아닌 가 착각이 될 지경이었다.‘거짓말을 하려면 크게 자주 하라. 그럼 대중들이 믿는다고 선동했던 괴벨스의 나치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쟁만이, 그것도 강경투쟁만이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길이라는 얘기였다. 분노를 강요하는 사회, 분노를 하지 않으면 이나마 가지고 있는 권익마저 빼앗기는 세상이란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분노는 필요악이었다. 예수님도 선한 목자지만 성전을 더럽힌 장사꾼과 환전상들에게는 의로운 분노로 정화시킨 것이 그 반증이기도 하다.

분노는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누구든 예외 없이 자지러지게 울며 세상에 나오고, 울지 않으면 젖도 주지 않고 기저귀도 갈아주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울부짖으며 자라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사이는 물론 혼자 있을 때도 분노가 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장하고,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내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세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는 법언과 함께 공소시효를 두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권리 주장을 할 수 없게 한 것도 그런 맥락일 터였다.

따라서 하루이틀 하고 말아버릴 분노가 아니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말처럼 차분한 분노를 하자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감정적인 분노가 아닌 히죽거리며 하는 즐기는 분노를 하자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분노는 울화병으로 암이나 정신병에 걸리거나 자살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3N라면 노동자 생활을 통해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내는 쪽이 지는 것임을 체득한 터였다.

노사협상 때나 부장이나 과장 등 관리자들에게 불려가 말 같지도 않은 말에 히죽거리면 너 미쳤냐며, 내 말이 말 같지 않냐며 길길이 날뛰며 흥분을 했다. 난 능글거리며 그럼 대성통곡을 해야 하냐며, 웃어야지 우냐며 이죽거렸는데, 야근 때 구사대가 술을 먹고 들어와 빨갱이 새끼들 때려죽인다며 멱살잡이를 하며 난동을 부릴 때도 그에게 내 몸을 맡긴 채 히죽거리면 제풀에 지쳐 손을 풀고 빨갱이 새끼라는 말만 중얼대며 스적스적 사라질 때가 많았다. 같이 욕지거리를 해대며 멱살잡이를 하면 반작용으로 기가 살아 더더욱 길길이 날뛰며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우습지도 않게 해탈을 하고 보니 두려워 마라, 별것 아니다하며 해탈 시를 읊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해묵은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현장을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힐끔거렸다. 노조민주화운동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냐느니, 복권에 당첨됐냐느니 하며 묻기도 했다. 기계를 뜯어벌인 채 정비를 하다 호출 당해 왕짜증을 부리며 간 사람이 싱글벙글 들어오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애써 그들을 무시한 채 정비 중이었던 기계로 향했다. 그들의 호기심을 즐기듯 히죽거리며 기름 범벅인 장갑 속으로 손을 끼워 넣었다. 기계 옆에 붙어선 채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6호 운전자인 이양이 연신 흘끔거렸으나 그를 흘끔거리며 기계정비를 시작했다.‘두려워마라, 별것 아니다’. 목젖을 타고 이 말이 솟구쳐 올랐으나 꼴깍 삼킨 채 실성한 사람처럼 히죽거리며 기계정비를 했다. 핏대를 세우며너 미쳤냐며, 내 말이 그렇게 우습냐며 흥분을 하는 관리자들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제풀에 지쳐 손을 풀고 빨갱이 새끼들이라는 말만 주문처럼 외우며 스적스적 사라지는 구사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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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N라면 공장의 민주노조운동 과정에서 해고되었으며, 2007년에는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경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N라면 공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픽션을 비롯하여 단편소설, 수필 등을 쓰며 글쓰기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노동자 자기 역사쓰기의 일환으로 진행한 개미와 진딧물 - N라면 노동자의 기억연재를 종료합니다. N라면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하고 또 함께 읽어주신 많은 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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