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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 기억하는 인물
..... 모택동과 한국전쟁(3)_이영민(105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7-12-21 조회 786
 

모택동과 한국전쟁(3)

 

우리글 옮긴 이: 이영민

 

파란곡절

 

108일 그날, 주은래는 임표와 함께 중공 중앙 대표가 되어 비행기로 소련을 비밀 방문했다. 스탈린과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지원하고 소련에게 군수물자 지원문제 요청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공군의 엄호문제를 상의할 예정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이미 출병 결정했지만 주은래는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갔다. 출병할 수도, 출병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스탈린과 논의할 예정이었다. 증국이 출병한다면 곧 소련에게 무기 및 장비, 그리고 공중지원을 요구할 것이었다.

 

쌍방의 회담은 결코 순조롭지 못하였다. 1011, 스탈린과 주은래는 연명으로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은 중국이 제기한 비행기, 탱크, 대포등 장비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소련 공군은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해 두 달 혹은 두달 반 뒤에 출동이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중국의 북한 출병 결정과정은 또 하나의 곡절이 등장했다. 모택동은 정치국에서 결정한 방침에 대하여 재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1012, 그는 팽덕회와 고강에게 전문을 보내어 요청했다.

“(1) 109(1) 명령은 잠정적으로 실행을 중지한다. 13병단 각 부대는 원래 있던 곳에서 훈련을 진행하고 출동하지 않는다. (2) 고강, 팽덕회 두 동지는 내일, 혹은 모레 북경에 와서 의논하자.”(2)

 

1013, 모택동은 출병문제를 팽덕회, 고강 및 다른 정치국 위원들과 다시 한번 상의했다. 모두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다 하더라도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미군이 삼팔선을 넘어 대거 북진하는 상황에서 의연히 방침을 바꾸지 않는다는 결정이었다. 그날, 모택동은 이 결정을 주은래에게 전문으로 알렸다.

 

(1)고강,팽덕회 두 동지 및 다른 정치국 동지들과 상의한 결과 일치된 견해를 확인했다. 아군은 역시 조선에 출동하는 것이 유리하다. 첫 번째 시기에는 오로지 한국군을 공격할 것이다. 아군이 한국군을 상대하는 것은 자신이 있다. 원산,평양선 북쪽의 대쾌산(大块山) 지구에 조선의 근거지를 만들고, 조선 인민들을 분발하게 하여 인민군을 다시 조직한다. 두달 뒤 소련이 공군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6개월뒤에는 소련에게서 대포와 탱크등 장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면 훈련을 마치고 미군을 공격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에는 오로지 한국군 몇 개 사단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 정세가 곧 우리에게 유리하게 변화될 것이다.

 

(2) 우리가 위에 쓴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한다면 중국 및 조선, 동방과 세계에 모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우리가 출병하지 않으면 적의 압력이 압록강변까지 이를 것이다. 국내와 국제 모두 잔동의 기세가 높아지고 각 방면이 모두 불리하게 될 것이다. 우선 동북이 더 불리하게 되며 동북 변방군이 고착당하고 남만주 전력이 통제당할 수 있다.

 

(3) 전일(11. 인용자 주), 스탈린과 당신이 연명으로 보낸 전문에 소련이 완전히 만족할 만큼 우리에게 비행기, 대포, 탱크 등 장비를 제공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빌리는 것인지 아니면 돈을 주고 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빌릴 수만 있다면 예산 2억달러를 경제,문화 방면 건설 및 일반 군정에 쓸 수 있다. 즉 아군이 안심하고 조선에 들어가 장기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국내 대다수 사람들의 단결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4) 소련이 2개월 혹은 2개월 반 내 공군으로 우리의 조선 작전을 지원하는 것은 제외하자. 소련 공군이 북경, 천진, 심양, 상해, 남경, 청해 등에 출동하여 엄호할 수 있다면, 즉 우리가 공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2개월 혹은 2개월 반 안에 미군 공습을 만나더라도 약간의 손실은 참을 수 있다.

 

(5) 어쨌든 우리는 참전해야 한다.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하면 이익이 매우 크고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매우 크다.(3)

 

당시 모택동이 유달리 걱정했던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소련이 무기와 장비를 제공하는데 빌릴 수 있는지, 아니면 돈을 주고 사와야 하는 것인지였다. 그것은 국내 건설에 드는 비용과 일반 군비자금을 충당할 수 있느냐 여부가 달린 문제였다. 즉 국내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느냐가 걸려 있었다. 두 번째는 소련이 2개월 혹은 2개월 반 안에 공군 지원을 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모스크바에서 며칠 머무르며 그 문제들을 다시 협상하도록 했다.

 

주은래는 모택동이 보내온 전문 내용을 몰로토프(Vyachesiav Mikhailovich Molotov 1890-1986) 를 통해 스탈린에게 전했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소련은 단지 공군을 파견하여 중국 경내에 주둔시킬 것이다. 2개월 혹은 2개월 반 후에도 조선 국경안에 들어가 작전할 준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스탈린의 결정으로 중국이 출병하여 작전하는 것이 아주 불리하게 되었지만 모택동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때, 마침 평양에서 급보가 왔다. 1015일 새벽 한시 모택동은 주은래 명의로 전문 한통을 기초하여 예지량 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전문에는 도로사정에 익숙한 동지 한사람을 보내 주시오. 그래서 1016일 안동에 도착하는 팽덕회 동지와 김일성 동지를 만나 영접하게 해주시오. 망약 예대사가 김일성 동지를 찾지 못하면 예대사에게 사람을 보내 안동에가 접대하게 해 주시오.”(4)

 

같은 날, 김일성은 부수상겸 외무상 박헌영을 심양으로 보냈다. 막 북경에서 비행기로 돌아온 팽덕회와 회견하라는 것이었다. 김은 중국이 가능한 빨리 출병하기를 요청하였다. 16, 팽덕회와 고강은 급히 압록강 북안 안동으로 갔다. 그들은 지원군 사단 이상의 간부대회를 소집하고 중앙 결정을 선포하였다.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던 중국 인민지원군은 시위에 메긴 화살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최고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즉시 압록강을 건널 태세였다.

 

최고 결정권자는 모택동이었다. 그는 이때 더욱 냉정하고 치밀하게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였다. 출병하는데 만에 하나의 실수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17일 오후 5, 그는 팽덕회, 고강에게 전문을 쳐 18일 북경으로 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주은래가 18일 북경으로 와 중앙에 보고한다. 그 뒤에 출병시간을 확정 선포하라.”고 지시했다.(5)

 

18, 모택동은 중앙회의를 소집하고 주재하였다. 주은래와 팽덕회의 보고를 들은 뒤, 지원군의 도강작전과 도강시간을 결정했다.

 

마침내 그날 저녁 21, 13병단 사령원겸 정치위원 등화(邓华)등에게 전문으로 명령했다. “4개 군 및 3개 포병사단은 예정계획에 따라 조선 북쪽에 진입하여 작전하라. 내일 19시 저녁 안동과 집안선에서 압록강 도강을 개시한다. 엄격히 비밀을 준수하라. 도하부대는 매일 해질 무렵 도강을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 4시가 되면 즉시 중지하라. 5시 이전에 은폐를 완료하고 반드시 검열하라.”(6)

 

101일 저녁 김일성이 중국에 출병을 요청한 뒤 19일 저녁 중국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 겨우 18일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에게는 마치 오래도록 길을 걸어온 것과 같았다. 방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의 앞에 여러 어려운 일이 차례로 닥쳤다. 그에게는 세계정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이 필요했다. 적과 우리, 그리고 친구등 세 방면의 상황과 추세의 진행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도 필요하였다. 복잡다변한 상황에서 침착하고 능란하게 대응해야 하며 신속하게 결단해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전우와 동지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충분한 이유와 인내심을 필요로 했으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년 후, 19701010, 모택동과 주은래가 김일성을 회견할 때 함께 그때의 곡절 많은 과정과 역사를 회고한 일이 있다.

 

모택동 : 일이 정말 곡절이 많았소, 그 때 중국이 동요하고 그래서 스탈린도 기세가 꺾였소. 됐소. 나중에 총리가 소련에 가지 않았소? 출병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가지고 가지 않았소?

주은래: 두가지 의견을 가지고 그에게 선택하라 했지요. 우리가 출병하면 그들이 공군으로 지원해 달라고 했지요.

모택동: 우리는 그저 공군지원만 해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하지 않았소.

주은래: 시작할 때는 몰로토프가 찬성했어요. 그 뒤 스탈린에 그에게 전문을 보낸 뒤 공군지원도 할 수 없다고 했지요. 공군이 압록강변까지만 갈 수 있다고.

모택동 : 마지막에 가서야 결정하였소. 그래서 국내에서 전문을 보냈는데 소련이 공군을 출동시키던 말던 우리는 간다. 하지만 우리는 소련에 감사하게 생각하오. 그들이 우리 군에 화력과 탄약을 지원했는데 반값에 줬어요. 그리고 자동차도 주었고.(7)

 

모택동이 출병하여 북한을 지원하는 방침을 결정한데 대하여 팽덕회는 일찍이 이런 평가를 한 일이 있다. “그 결심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비범한 담력과 정신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복잡한 일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과 판단력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는 모주석의 영명함과 정확함을 증명하고 있다.(8)

 

 

초전필승

 

중국인민지원군이 도강을 시작한 첫 날, 모택동은 모든 정력을 한반도의 전장에 쏟았다. 모택동은 일생동안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전역을 지휘하였다. 맥만 이상의 대군과 동시에 몇 개 전장의 작전을 지휘하였으며 하나 하나 승리를 쟁취했다. 그는 뛰어난 전략지도사상과 풍부한 전쟁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항미원조 전쟁의 지휘는 그에게도 어쨌든 새로운 과제였다. 그것은 새로운 전장일뿐 아니라 나라밖 전장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적이었는데 고도로 현대화된 장비를 갖춘 미국 군대와 작전해야 하였다. 어떻게 이 전쟁에서 새로운 승리를 얻을 것인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실천을 총괄해야 하였다.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하는 전쟁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당시 한국전쟁 전황은 아주 엄중했다. 미국과 한국군이 삼팔선을 넘은 뒤 세 갈래로 나누어 북진중에 있었다.

 

동로군은 원산을 점령하고 중로군은 양덕을 압박했다. 서로군인 미군은 평양을 포위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계획에 따라 원산과 평양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그 뒤 먼저 동서방향으로 나아가 서로 연결하고 마침내 압록강변으로 밀고 올라갈 셈이었다.

 

지원군이 출병하기 전날 저녁, 모택동과 팽덕회는 적의 상황을 연구한 뒤 의논하고 결정하였다. “적이 동서로 나아가는 시기를 이용한다. 지원군은 평양, 원산 철도선 북쪽의 덕천,영원(宁远) 공로선 남쪽지구에서 두 개 혹은 세 개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 곳은 한반도의 잘룩한 허리부분에 해당하는데 꿀벌의 허리라고도 부른다. 적이 공격해오면 진지 전면에서 그들을 분할하여 섬멸한다. 만약 평양의 미군과 원산의 한국군이 두갈래 길로 공격해오면 고립되어 취약한 쪽을 공격한다. 6개월 동안 적이 평양이나 원산을 고수하며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도 평양 및 원산을 공격하지 않는다. 아군이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완비한 뒤 공중과 지상에서 모두 적을 압도할만한 우세를 만들어야 한다. 그 후 평양과 원산을 공격해야 한다. 일이 그렇게 된다면 6개월뒤 다시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기로 하였다.”(9)

 

하지만 지원군이 도강하자 중대한 상황변화가 발생하였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맥아더가 동서로 함께 진격할 계획을 바꿨던 것이다. 미군과 한국군은 동서 양로로 분산하여 대거 북진하였다. 그 속도가 매우 빨랐으며 중국과 북한 국경에 곧바로 접근 압박하였다. 그래서 원래 정했던 방안, 즉 평양 원산 철로선 북쪽의 첫 번째 방어선에서 방어하고 6개월 뒤 다시 공격하려던 작전방침은 이미 틀어진 것이었다.

 

적정 변화에 따라 모택동은 신속하게 작전계획을 바꿨다. 1021일 새벽 330, 그는 팽덕회 등에게 전문을 보내 정식으로 1차 전역의 배치에 관해 명령했다. 그는 맥아더의 커다란 전략적 판단착오를 간파하였다. 그는 미군과 한국군 모두 우리 지원군이 참전한 것을 모르고 있다. 적은 동서 양로로 병력을 분산하여 겁 없이 전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 한국군 3개 사단을 섬멸하여 나라밖 첫 번째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조선전쟁에서 극히 좋은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10)고 단언했다. 한 시간이 지난 뒤 모택동은 다시 등화쪽으로 전문을 보냈다. “지금은 전기를 잡을 때이다. 며칠안으로 전역배치를 완료하라. 다시 며칠안으로 작전문제 방침을 완료하라. 이전의 방어후 다시 공격문제를 논의하는 그런 계획이 아니다.”(11)

 

초전필승, 나라밖에서 작전하는 지원군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첫 번째 주먹을 내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지원군이 북한에서 발을 붙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 시기동안 모택동은 매우 긴장된 나날을 보냈다. 그의 기밀담당 비서의 기억에 따르면 모택동은 보름이 넘는 기간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침대에서 정무를 보고 먹었으며 잠은 아주 적게 잤다고 하였다. 그는 매일 대량의 문서를 읽고 지시하거나 수정하였다. 전방에서 온 전문, 각 방면의 정보를 하나씩 검토했는데 이 전문과 문서들은 가장 빠른 속도로 모택동에게 전달되었다.

 

전장의 변화는 순식간에 만 가지로 변하였다. 모택동은 각 방면의 상황에 분석을 더해 빠르게 결정하였고 전방작전을 지도하였다.

 

그 해 모택동은 57세였으며 정력이 왕성하였다. 모택동이 제 1차 전역배치를 지도하던중 한국전쟁 전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생각하는 가운데 지도방침도 점점 노련해졌다. 그는 1023일 팽덕회의 전문에 회답하며 지적하였다. “조선 전황의 군사방면은 세 가지가 결정한다. 첫째,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전역 배치는 적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이용할 수 있느냐 여부이다. 그래서 돌발적으로 두 개나 세 개, 혹은 네 개까지의 한국군 사단을 섬멸할 수 있느냐이다. 이 전역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면, 즉 적의 새로운 배치를 압박할 수 있다면 적은 곧 피동적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돌발적인 작전의 승리가 크지 않다면 우리는 부득이 전장에서 후퇴해야 한다. 즉 형세가 적에게 유리하게 변할 것이다.

 

둘째, 적의 비행기가 우리 병력을 살상할 때 우리 활동에 얼마나 장애가 되는지 여부이다. 만약 야간행군작전을 이용하는 정도가 숙련된다면 우리는 계속 야전 및 고립된 많은 거점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미국과 우리가 외교적 담판을 진행할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된다. 만약 적의 비행기가 아군을 살상하는 정도가 크고 장애가 된다면 우리는 유리하게 작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다. 즉 우리가 비행기를 갖추지 못하는 반년이나 1년 동안 우리는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셋째, 미국이 5개나 10개 사단을 조선에 추가배치 한다면 아군은 운동전과 고립된 거점을 공격하는 작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미군 몇 개 사단과 한국군 몇 개 사단을 섬멸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헹세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된다. 그 반대라면 우리가 유리하게 된다. 이런 몇가지 점들에 대하여 모두 이번 전역, 그리고 이후 몇 개월안으로 경험과 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안정된 기반에 의지하여 모든 가능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12)

 

모택동이 제기한 전략과 전역에 대한 지도사상은 지원군이 1차 전역 및 그후 몇 차례 전역에서 승리를 얻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적의 진격속도는 매우 빨랐다. 한국군은 빠르게 청천강 부근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지원군 주력은 출동이 예정된 지구에서 아직 멀리 있었다. 1023, 모택동은 등화에게 전문으로 명령했다. 13병단 지도부가 신속하게 팽덕회를 만나 팽의 영도하에 전역계획을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부했다. “적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 전기를 포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삼일내로 적이 아군의 위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아군이 전군의 움직임이 통일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기를 잃게 될 것이다.”

 

팽덕회는 적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적이 사단, 연대, 대대 단위로 병력을 나누어 무모하게 진격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섬멸하는 방법이 난관도 많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칫하면 전기를 놓칠 위험이 있었다. 25일이 되자 서쪽의 한국군이 북위 40도선 북쪽에 이르고 있었다. 박천,용산동,운산,온정,송목동,희천선에서 지원군 제 40군에 바짝 접근하고 있었다. 적을 섬멸하는 데 일각도 지체할 수 없게 되었다.

 

1025일 오전, 한국군의 증강된 1개 대대가 온정에서 북진을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팽덕회의 지휘소인 대유동에서 겨우 십몇키로가 떨어진 곳이었다. 한국군은 지원군 제 401개 연대에게 저지당해 얻어맞았다. 꼬리와 허리를 자르는 전술에 대부분이 섬멸당했다. 항미원조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항미원조전쟁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국인민은 줄곧 이날을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입국 작전했던 기념일로 삼고 있다.

 

하지만 한국군은 여전히 병력을 나누어 돌진하고 있었다. 그중 1개 연대의 일부가 이미 중조국경에서 불과 몇키로 떨어진 초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중국 경내를 향해 포격을 가하였다. 27, 이 연대는 처지가 좋지 않음을 깨닫고 즉시 고개를 돌려 남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도중에 지원군에게 포위당했다. 희천 남쪽의 한국군 2개 대대가 그 연대의 철수를 위해 지원군과 온정 동쪽지구에서 교전을 벌였다. 29, 지원군 1개 군은 이 두 곳의 한국군을 대부분 섬멸하고 첫싸움의 승리를 얻었다.

 

한국군이 중국 지원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하였으나 맥아더는 지원군 병력에 대하여 여전히 가늠하지 못했다. 그는 중국이 상징적으로 출병했다고 여겨서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후속부대에게 계속 중조 국경으로 밀고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10월말, 미군가운데 최강군이라 부르는 기병 1사단 1개 연대가 청천강을 넘어 돌격, 운산에 이르렀다. 111일에서 3일까지 지원군 부대는 운산에서 그 대부분을 섬멸했다. 동시에 요격부대는 운산 남쪽에서 다른 1개 연대를 격멸하고 사단장을 사살했다. 운산 전투는 지원군이 열세한 장비로 현대화된 장비를 섬멸한 첫번째 사례가 되었다. 또한 최강군의 위풍을 단호하게 공격하여 떨어뜨렸다.

 

미군 기병 1사단은 운산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미군 8집단군 사령관 워커를 놀라게 하였다. 113일 새벽, 적은 비행기, 대포와 탱크의 엄호속에 모두 후퇴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는 즉시 도망치는 적을 추격,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4, 영국군 1개 대전차포 대대와 미군 1개 증강 중대를 섬멸하였다. 하지만 두다리에 의존하는 지원군은 끝내 기동능력이 뛰어난 기계화부대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3일 해질 무렵이 되자 적의 주력은 모두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적과 아군의 태세에 대하여 팽덕회는 11415시에 모택동에게 전문을 쳤다. 부대의 휴식과 정돈, 그리고 1차 전역을 끝내고 다음 전역을 준비할 것을 요청하였다. 51, 모택동은 회신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2차 전역의 지도사상을 전파하도록 제기했다.

 

지원군의 제 1차 전역은 13일 밤낮에 걸친 힘겨운 작전이었다. 15천명을 섬멸하고 적을 압록강변에서 청천강으로 밀어냈다. 이로써 한국전쟁 전황 안정의 첫걸음을 떼었다.

 

 

 

1) 108일로 추정된다.

2) 모택동이 팽덕회, 고강에게 보낸 전문, 19501012

3) 모택동이 주은래에게 보낸 전문 19501013모택동 문집6, 인민출판사 19996월판, 103-104

4) 모택동이 기초하여 주은래가 예지량을 통해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 19501015

5) ‘팽덕회 전기에서 인용하였음. 당대 충국출판사 19934월판, 407

6) 모택동이 등화등에게 보낸 전문 19501018

7) 모택동이 김일성과 대화한 기록. 19701010

8) 팽덕회가 심사를 당할 때 초고항미원조 전쟁경험 총괄중의 대화이다. 1957515

9) 모택동이 주은래에게 보낸 전문. 19501014. ‘모택동 문집6, 인민출판사 6월판, 105

10)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01021

11) 모택동이 등화쪽에 보낸 전문. 19501021

12) 모택동이 팽덕회와 고강에게 보낸 전문, 19501023

13) 모택동이 등화에게 보낸 전문, 195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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