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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서노협 단병호 의장 구속과 서울지역 총파업
시기 : 1989년 4월 14일 ~ 4월 20일
1989년 상반기 동안 극심했던 정부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은 핵심지도자에 대한 검거 선풍을 몰아왔다. 부천임투본부 한경석 본부장, 임동섭 상황실장, 구미임투본부 서상학 상황실장의 구속에 이어 서노협 의장인 단병호 전국투본 본부장이 4월 14일 전국회의가 열리고 있던 포항에서 강제연행돼 4월 16일 구속이 확정됐다. 경찰의 연행 사유는 “1988년 동아건설 파업시 열차운행 방해와 1989년 3월 19일 지하철투쟁에 대한 제3자개입금지 위반”이었다.
이에 서노협을 중심으로 4월 14일부터 석방투쟁을 시작, 4월 20일 서울지역 총파업을 전개했는다. 총파업에는 47개 노조가 파업, 총회, 잔업거부투쟁으로 참여했고, 저녁에는 동아건설과 구로공단에서 열린 집회에 3,500명이 참가해 투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 투쟁은 당시 본격 임투기를 앞두고 불붙기 시작한 대중적 열기와 결합해서 정치적 요구인 석방투쟁으로 발전했고,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 조합원들의 자신감을 확보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단병호 의장 구속과 투쟁 경과
1989년 3월 20일 노동부에서는 서울지하철노조 파업과 관련하여 단병호 전국투본 본부장을 제3자개입금지 위반으로 입건한 뒤 4월 14일 5차 전국회의가 열리고 있던 포항에서 강제연행했다. 단 의장이 연행되자 전국회의에서는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석방될 때까지 전국투본 이름으로 끝까지 투쟁 △구속될 경우 비상전국회의 소집해 적극 투쟁 △동시다발 집회와 시위 조직 등을 결의, 발표했다. 이날 서노협에서는 전체 위원장단 회의를 긴급소집해 4월 16일까지 규탄 철야 농성을 진행했다.
4월 15일에는 서울지역 노동자들 중심으로 단 의장이 연행된 동대문경찰서 항의방문 투쟁 중 전원이 연행되기도 했다. 4월 16일 단 의장의 구속이 확정되자 항의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날 동아건설 창동공장에서 ‘북부지역 및 콘크리트업종 임투 문화제’를 마친 노동자들이 단 의장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시위를 했다.
4월 17일과 18일에는 서노협 산하 비상 상집회의와 지구·업종별 확대간부회의를 잇달아 열어 석방투쟁을 결의했다. 확대간부회의는 강북지구는 동아건설에서 200여 명, 영등포지구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70여 명, 민주출판노조협의회는 일요신문에서, 구로지구는 슈어프로덕츠에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각각 대책을 논의한 뒤 4월 19일 노조별로 조합원 총회를 열어 단 의장 석방투쟁을 결의했다. 4월 20일 ‘단병호 의장 석방촉구 서울지역 총파업 및 서울집중 규탄대회’를 개최했는데, 동아건설 창동공장, 구로공단 나우정밀, 신한발브 정문 앞에서 열린 집회에 총 60여 개 노조 3,500여 명이 참여했다.
석방투쟁의 의미
단 의장 석방투쟁은 임금인상 투쟁과 노동운동탄압 저지투쟁 두 축으로 진행해 온 상반기 투쟁이 훌륭하게 결합된 투쟁이었다. 단 의장의 연행·구속에 서노협 위원장단은 신속하게 모여 상반기 동안 계속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일환일 뿐 아니라 노동법상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인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적용한 구속이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각 사업장에서 긴급 상집과 비상임시총회로 대중적 분노를 모아냈고, 마침내 4월 20일 수십 개의 노조가 작업을 멈춤으로써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과시해 노조탄압에 제동을 걸었다.
이 투쟁은 당시 상반기 투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첫째, 파업·총회 등 공장 내 투쟁에 근거를 둔 대중투쟁을 성공리에 이끌었다는 점이다. 단위노조 차원의 요구가 아닌 ‘구속자 석방’이라는 정치적 요구를 걸고 공장 내 투쟁으로 전개했으며 이를 집회와 결합함으로써 대중적 참여에 성공했고 서울지역 임금투쟁도 크게 고무시켰다. 둘째, 투쟁을 조직하며 투쟁의 의의, 중요성 등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충분히 거침으로써 조합원 대중의 주체적 동참이 가능했다. 위원장단의 농성과 투쟁계획에 대한 토론, 단위노조 상집, 지구(업종) 확대간부회의, 조합원 총회를 거치면서 조합원 전체를 설득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실천에 옮겼다. 셋째, 지도자를 제거·분리함으로써 조직적 대오를 무력화하려던 정권의 의도를 저지하고 오히려 강고한 투쟁으로 맞서 조합원들의 투쟁역량을 강화했다. 또한 1985년 구로동맹파업 이래로 지도자의 구속에 대중투쟁으로 맞서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확립했다. 넷째, 단기간에 극복하기 어려운 역량의 한계가 있었음에도 노동자들은 이 투쟁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고 세계노동절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참고자료 -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제1차 대의원대회 사업보고」(1989) - 전국투본, 「투본속보 제8호」(1989.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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