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④ 결혼과 함께 노동운동 본격화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대한전선그룹노조에 채용된 기획실장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면 속이 터질 정도로 말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교육이나 토론에는 매우 적극적이며 노동운동사와 운동 전반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어서 나는 그분을 정말 존경했다. 가끔 개별적 소규모 모임을 통해 노동운동의 전망과 과제를 토론하다 보면 늘 사안의 핵심을 파고드는 논리로 대응 방향까지도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해결사 같은 존재였다. 그는 당시 수도권 민주노조 활동에 힘이 되었으며 내가 그 후 운동을 이어가게 된 데에는 그의 영향이 컸다. 현장 조직력이 취약하면 노동조합이 노동조합으로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진다는 판단 아래 현장에서 ‘산들회’라는 소모임을 시작했다. 산과 들같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뜻에서 이름을 ‘산들회’로 지었다. 9명으로 시작했는데 남성보다 여성이 한 명 더 많았다. 가볍게 친목모임으로 시작해, 한 달에 두 번씩 책을 읽고 독후감 토론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데미안> <좁은 문> 등으로 시작하다가 노동조합 관련 서적(구하기도 어려웠다)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폭을 넓혀갔다.  '산들회' 모임
소모임과 활동가조직 결성 그다음 해(1980년)에는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진 동지 50여 명이 모여 ‘동심회’를 만들었다. ‘동심회’는 명분상 활동가조직이라고 했지만, 민주노조의 내용은 축적된 것이 별로 없었고 노동운동사 등 공부에 관심 있고 노조와 회사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보는 노동자들로 구성됐다. 회사 요구를 잘 들어주는 현재 노조를 어용노조라고 규정하고, 운영의 비민주성을 비판했다. 노동조합에는 신용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이 있었는데 두 개의 협동조합은 노조 대표가 사적으로 조합원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조합원들에게 은행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따라서 급전이 필요하거나 방값을 올려야 하는 조합원들은 신협을 찾아갈 때 박카스라도 사 들고 가서 대출 좀 해 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신협 이사장은 노조 위원장이 당연직으로 맡았기 때문에 위원장이 결제하지 않으면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위원장의 ‘호의’로 대출을 받은 조합원은 위원장을 은인처럼 생각했다. 이런 관행은 70년대 내내 지속됐으며 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동심회는 토론을 통해 이런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고, 노조가 회사에 너무 낮은 자세로 임한다는 비판을 이어가며 집행부를 바꾸자는 요구를 모아나갔다. 다시 말하면 동심회는 노동조합 집행부를 바꾸기 위한 조직이었다. 동심회는 여성조합원 숫자가 적은 편이었다. 여성조합원을 조직하고 활동을 독려한다는 차원에서 산악회를 구성했다. 산악회는 한 달에 2~3회 산행을 하며 조직력을 확대해갔다. 주로 회사 통근버스를 저렴한 가격에 빌려서 전국으로 다녔는데, 때로는 조를 짜서 등반대회도 했다. 결혼 그리고 갈등과 시련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식당을 향하는데 AT반 조장(조장은 모두 여성)이 잠시 얘기 좀 하자더니 “애인 없으면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퇴근 후에 만나서 소개받기로 하고 동사무소 앞에서 만났는데 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 조장(손옥자)은 같은 직장에 다니는 3명과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다. 차려준 저녁을 먹고 나서, 조장 말고 두 명은 야간 출근을 했는데 소개한다는 상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소개한다고 해서 왔는데 소개할 사람 안 오나 봐요?”라고 물었더니 “아직 눈치 못 챘냐”고 하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 하는 말이 출근한 두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다. 보름 정도 지난 뒤 마찬가지로 집으로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고 정식 소개를 받았다. 자췻집에 처음 갔을 때 나는 나랑 만날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랐지만, 그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가끔 시간이 나면 군포 삼성골프장 근처 논두렁을 거닐며 데이트를 했고, 자전거를 태워주기도 하면서 1년 정도 사귀다가 1979년 12월에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 아내는 집에서 17년간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나는 노동조합활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40년 이상을 살아왔다. 결혼 이전에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숱한 갈등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온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예전엔 가투(가두투쟁)를 하다 전신에 최루가스가 스며들어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면 잠자던 아이들이 재채기를 하면서 울어댔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왜 당당했는지 알 수가 없다. 최루가스 냄새에 울던 아이도 어느새 마흔이 훌쩍 넘었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상당 기간은 먹고 사는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내가 해고된 이후 살아가는 문제는 아내가 도맡아야 했고, 가정에 대한 나의 관심은 찾아볼 수 없다는 불만 등은 갈등을 증폭시키는 바탕이었다. 아내가 지금 “나이를 먹어서도 내가 하는 일이 있어서 좋다”며 청소 일에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면 짠한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나는 당당하지도 못하면서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면에는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수배 시절에 정보 경찰들은 학교까지 찾아가 선생들에게 아이들의 동향에 관해 묻고 아이들의 동선까지 몰래 살폈다고 한다. 한번은 큰 애 담임이 아이를 불러서 빵을 하나 주면서 “동호는 정말 훌륭한 아빠가 있어서 좋겠다”고 했다니, 좋은 선생을 만난 덕에 지금까지 잘 성장해 왔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