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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방직 민주노조 사수투쟁(1976년 4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76-04-23 조회 353

동일방직 민주노조 사수투쟁

 

⦁ 시기 : 19764~ 19805

⦁ 요약 : 1976년 전국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사수 투쟁. 남성노동자들을 내세운 어용노조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인분까지 뿌리며 파괴했고, 경찰은 방조했고, 회사는 무더기 해고로 도왔다. 어용노조는 해고자들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작성·배포해 사회적으로 매장하고자 했으나 해고노동자들은 한국노총 점거까지 불사하며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끈질기게 벌여냈다.

 

 

1973년에 이어 1976년에 다시 동일방직 인천공장 지부장에 민주파 이영숙이 당선되자 회사는 노동조합에 대한 회유와 탄압을 계속했다. 1976423일 대의원대회에서 자신의 형부가 회사 쪽과 친한 고두영으로부터 받은 2만 원을 대회장에 뿌려버린 강성례와, “일주일쯤 서울 가서 푹 쉬고 오라. 필요하다면 돈도 주겠다는 회유를 폭로한 김윤자의 사례는, 야비한 수법으로 민주파 지부장에 맞설 어용 대의원들을 양성하고자 한 회사의 간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러한 회사의 탄압 와중에 고두영이 노조사무실에 와서 이영숙 지부장을 폭행하고, 캐비닛 열쇠를 빼앗고 사무집기를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리자 노조는 고두영을 제명하고, 다른 3명을 정권 조치했다. 그러나 고두영은 서울 민사지방법원 인천지원에 30만 원의 공탁금을 걸고 징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 자기를 지지하는 대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경기도에 대회 소집권자 지명 요구서를 냈다. 결국 716일 인천지원은 가처분 신청을 이유 있다고 판결했지만, 전국섬유노조는 72268차 중앙위원회를 열어 고두영 등에 대한 징계가 이유 있다고 확인했다.

  

이영숙 지부장은 725일에 조합원 총회를, 고두영은 723일 대의원대회 개최를 결정한 가운데 경찰은 723일 오전 9시 이영숙 지부장의 조합비 횡령 혐의를 조사한다며 강제연행하고, 노조 부지부장과 대의원 8명을 조사할 것이 있다며 불러낸 후 현장 문을 잠가버렸다. 또한 회사가 기숙사 문에 못질해 조합원 200여 명을 감금한 상태에서, 고두영은 자기 쪽 대의원 24명만이 참가한 가운데 지부장에 선출돼 곧바로 새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에 갇혀 있던 200여 명의 노동자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사감과 사원들의 저지를 뚫고 노조사무실에 모여 이영숙 지부장을 석방하라” “회사는 자율적인 노조 활동에 개입 말라” “23일 대의원대회는 무효다” “엉터리 고두영은 물러가라며 농성에 돌입했다. 이날 오후 2시 이영숙 지부장과 이총각 총무부장이 잠시 석방되었다가 다시 연행되자 3교대로 일하는 노동자들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300500여 명 정도가 교대하며 농성을 3일간 지속했다. 회사는 수도와 전기를 완전히 끊었고, 화장실 문까지 잠가버렸다.

 

725일 오후 630분경, 경찰은 농성 중인 여성노동자 400여 명을 포위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의 침묵을 깨고 한 여성노동자가 외쳤다. “우리 모두 옷을 벗고 저항합시다. 우리들의 결의를 표합시다.” 그러나 경찰은 겨우 브래지어와 팬티차림의 여성노동자들을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며 연행하기 시작했다. 무참한 연행 장면이 1976823일자 <주간시민> 기사로 보도됐다.

이 참혹한 과정에서 72명의 여성노동자들이 경찰에 연행됐고, 40여 명의 노동자가 까무러쳤다. 이 중 14명은 입원했고, 한 노동자는 이때의 충격으로 5개월간 정신분열증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충격적인 연행 사태 이후 고두영이 노조사무실을 따로 차려 지부장 행세를 하기 시작하자, 조합원 300여 명은 서울에 있는 전국섬유노조 사무실에서 농성하며 연행자 석방을 요구했다.

 

1976115, 동일방직 문제 해결을 내세운 김영태가 방순조를 밀어내고 전국섬유노조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그는 동일방직을 사고지부로 처리하고 전국섬유노조 이풍우 기획실장을 수습대책위원장으로 삼아 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수습대책위원장이란 자가 조합원 몰래 노조에 불리한 단체협약을 회사 쪽과 체결한 사실이 밝혀져 노동자들의 불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동일방직 사건은 해를 넘겨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197726일 오후 2시 천주교 명동 문화회관에서 동일방직 사건 해부식을 하기로 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자, 노동청이 개입해 24동일방직 노동분규 수습대책이란 안건으로 노동청 박창규 차장, 신연호 국장, 정종화 동일방직 사장, 이유복 전국섬유노조 부위원장,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진행해 대의원 선출을 자율적으로 하고, 조속히 대의원대회를 소집한다는 등 6개 항에 합의했다. 197744, 사태수습을 위한 대의원대회가 남성들을 중심으로 한 고두영 쪽의 집요한 반대 공작을 뚫고 개최돼 노조 총무부장 이총각을 지부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회사와 어용조합원들의 노조에 대한 공격은 집요했다. 19782, 정기총회를 앞두고 221일에 실시할 예정이었던 대의원선거를 둘러싸고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성 직원들과 일부 여성노동자들이 조합원들에게 인분을 먹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일방직 지부 규약은 조합원 25명당 1명의 대의원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부서에 따라 25명이 넘거나 부족한 곳이 있어, 인접 부서 간에 이를 통합·조정해 선거인 명부를 게시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당한 조치에 남성 직원들과 극소수 여성노동자들이 선거인 명부에 부정이 있다고 항의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다닌 것이다. 이렇게 되자 집행부는 220, 인천 동부경찰서에 치안 유지 병력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고, 경찰 측은 선거 당일에 경찰관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전국섬유노조도 이들 어용 조합원의 편을 들어 조직국장 우종환 등을 보내 대의원 선거 연기를 강요했고, 이 와중에 난입한 남성 조합원 10여 명은 조합 간부들을 집단 폭행했으며, 이를 지켜보던 우종환은 , 여러분들 왜 이러느냐? 이러면 안 돼. 알았다. 선거를 연기하자는 여러분의 의견을 잘 알았다. 해산하자운운하며 난동을 말리는 척했다. 조합 간부들은 오후 내내 부서진 투표함 40개를 수리하고 노조사무실에서 밤새 투표함을 지키며 투표를 강행할 준비를 했다

 

1978221일 새벽 540, 투표 개시 20분 전 일단의 남성들이 노조사무실 유리창을 깨고 난입했다. 이들 중 두 사람은 인분 두 양동이를 들고 들어와서 뿌리고, 여성노동자들의 얼굴에 짓이겼으며, 항의하는 오청자에게는 인분 양동이를 뒤집어씌우고, 오청자, 김경수, 양영자에게는 입에다 인분을 쑤셔 넣기까지 했다. 일부 도망치는 여성노동자들을 악착같이 쫓아가 목덜미, 젖가슴, 심지어는 귓속에까지 인분을 집어넣고, 탈의실과 목욕탕에까지 인분을 뿌렸다. 당시 정복경찰관 4명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도와달라는 비명소리에 , 이 쌍년들아, 입 닥쳐. 이따가 말릴 거야라고 오히려 욕설을 퍼부었다. 이러한 만행은 무려 두 시간이나 계속됐다. 이총각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은 이 와중에도 오후 2시부터 투표를 강행하기로 하고 준비를 계속했다. 그러나 오후 140분경 노조사무실을 다시 습격한 남자들 30여 명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고, 오후 5시경에는 형사들에 의해 노조사무실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한편, 전국섬유노조 우종환은 인분 만행을 저지른 그 날 아침, 경인 지방 각 지부에 전화를 걸어 지부 및 분회 간부들을 소집해 40여 명으로 동일방직 조직 내분 수습을 위한 조직행동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부 사무실 점령조’ ‘주위 감시조’ ‘여관 대기조로 나눈 뒤 222일 행동을 개시해 동일방직지부 사무실을 점령하고, 노조사무실 주변과 정문 근처를 감시하며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일체의 외부 행동을 차단했다. 전국섬유노조는 위원장 김영태와 조직국장 우종환의 주도 아래 36일 중앙위원회를 열어 이총각 지부장, 부지부장 2, 총무부장 등 4명을 반조직행위자로 제명했고, 회사는 124명의 조합원을 무더기 해고했다.

  

전국섬유노조는 김영태 위원장 명의로 해고된 124명의 노동자에 대해 동일방직(인천)에 종사하는 근로자 중 불미스러운 집단에 동조하기 위하여 작업장을 이탈하는 등의 소란으로 해고된 근로자들의 명단을 별첨과 같이 통보하니 업무에 만전을 기하여 주시기 바란다업무집행에 관한 참조사항이라는 블랙리스트를 410일 자로 산하 각 분회에 발송해 사회적으로 매장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로 해고된 뒤 저희는 노동운동의 전과자가 되었습니다라는 호소문에서 지칠 대로 지쳤던 저희는 다시 일어서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더 강해졌습니다. 죽기 살기로 동일방직 회사에 복직이 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분노가 다시 무섭게 일어나 끝맺음을 볼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참담함 속에서도 해고와 구속, 무자비한 폭행을 이겨내며 의연히 투쟁을 계속했다.

 

1980년 들어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은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위원이총각)을 결성하고 41220여 명이 서울 중심가에서 복직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때 국민연합의 함석헌 선생, 공덕귀 여사, 김승훈 신부, 산업선교회 목사 등이 노동자들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하다 이 중 9명이 연행됐고, 421일 산업선교회 총무 서경석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정명자가 구속됐다. 이에 425일부터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30여 명은 한국노총 위원장 사무실을 점거, 복직을 요구하며 무기한 농성에 돌입해 한국노총 중앙위원회가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한 결의를 하도록 했다. 513일의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 궐기대회에서도 행사를 체면 유지용으로 치르려던 한국노총 간부들을 제치고 농성에 돌입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 궐기대회후 돌입했던 노동자들의 농성이 해산한 뒤에도 줄기차게 한국노총을 점거한 채 투쟁을 전개, 517일 계엄군에 의해 내몰릴 때까지 완강한 투쟁을 계속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2년여에 걸친 복직투쟁은 살길을 봉쇄당한 노동자들의 마지막 선택으로, 비장감과 함께 불굴의 단결력과 조직력을 보여줘 이후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에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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