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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항일운동의 분수령:조천만세운동 _송시우 (34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1-10-17 조회 1365
 
제주 항일운동의 분수령 조천 만세운동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운영위원)
 

1919년의 3?1 운동은 서울에서 전국 각지로 자주독립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식민지 압제에 항거한 거족적인 운동인데, 지방에서의 양상은 특정한 지도부 없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그 대오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투쟁이라기보다 충분한 운동의 주체적 조건이 성숙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보면, 각 지방마다 선진적인 투쟁의 대오 형성이 그 이전부터 움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제주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섬이라는 특수한 상황보다 제주이기에 가능한 투쟁들이 일어났다. 1918년 중문지역 투쟁, 1932년 좀녀투쟁과 이를 지원했던 제주 야체이카(사회주의 비밀 조직 혹은 단체. 공산당 조직의 기본 단위인 세포의 러시아어)의 활동, 그리고 적색농민운동 등 식민지 해방 투쟁 등이 존재했었다. 변방으로 인식되거나 귀양처로 존재했던 제주가 반골 기질을 발판으로 변혁운동의 열망을 내뿜었다고 할 수 있다.


조천 만세운동 추진세력의 사상적 토대는 주로 유림의 영향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제주에 유배되었던 최익현의 척사론에 영향을 받은 김희정, 그리고 김시우로 이어지는 계보, 그리고 김윤식, 박영효 등과 같은 개화파 인사들의 유배왔을 때의 영향들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1910년을 전후로 신학문의 도입과 종교의 유입, 근대교육기관들도 생겨나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인층이 성장함과 동시에 선도적인 항일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조천은 조선시대 육지와의 관문이었고, ‘김정의(金旌義) 신대정(愼大靜)’이라 불리울 정도로 토착양반세력들이 주로 거주하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의 터전이었다. 거사일도 유림이었던 김시우의 소기일에 맞춰 잡았으며, ()을 선고받은 23명 중 무려 15명이 김씨(金氏)라는 특징을 보여 준다. 조천지역을 중심으로 1919321일부터 324일까지 4일간에 걸쳐 진행된 조천 만세운동은 당시 휘문고보 4학년인 조천 출신 김장환이 경성에서 3?1 만세운동에 동참한 이후, 시위자 색출 작업이 진행되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향하면서 구체화 되었으며, 이보다 전국의 소식을 접하고 있었던 김시범, 김시은 등과 규합하여, 육지에서는 장날을 이용했지만, 제주지역에서 명망이 대단했던 유림 김시우의 소기일에 자연스럽게 규합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321일 조천 미밋동산(만세동산. 옛날에 신당(神堂)이 존재했었다 함)에 규합된 14인 동지를 비롯하여 조천리 주민과 함덕, 신흥, 신촌 등지의 서당생도 등 150명이 모였다. 14인 동지 중의 한 명인 김필원은 더 많은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혈서를 쓰자 500여 명의 인원이 운집했다. 그들은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높이 꽂아 놓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김시범, 김시은, 김장환, 황진식 등 4명의 주도하에 제주성내(城內)로 행진하던 중 신촌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13명이 연행된다.
2차 시위인 322일에는 조천장터에서 백응선, 박두규, 김필원 등의 주도하에 200여명이 전날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신촌리를 향해 행진한다. 도중 박두규와 김필원이 연행된다.
323일의 시위는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 김년배, 이문천 등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문천은 100여 명을 이끌고 함덕리로 행진하게 된다. 함덕에 도착하자 시위 행렬은 800여 명으로 늘어났고, 8명이 연행된다.
4차 시위날 324일은 조천 오일장날이었는데, 김년배를 중심으로 1,500여 명의 군중들이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가 전개 되었다. 이 만세운동은 조천 오일장을 보러 나왔던 부녀자들이 상당수가 합세하였다. 김년배 등 4명이 체포되자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 든다. , 운동의 핵심적 인물인 14인이 모두 검거되어 버리자 만세운동은 일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조천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41일 밤 서귀포 해상에서 어선 수 십 척이 등불과 태극기를 선두(船頭) 돗대에 높이 달고 북을 울리면서 해상 시위를 벌이는 한편 삼매봉에서 불을 피워 놓고 만세를 부르다가 1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저지리 및 조천리를 중심으로 전도(全島)의 서당 생도를 모아 시위운동을 전개하려던 격문사건 등 조천 만세운동은 제주지역 전역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정환의 생가터 _사진 연꽃 _네이버 블로그>

조천 만세운동의 핵심 인물 14인은 출소한 뒤 1921년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한다. 이들은 감옥에서 새끼를 꼬아 얻은 금액을 공동 관리하는 한편 일본 경찰의 고문과 옥고로 인하여 19203월에 사망한 백응선의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고재륜은 1923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기도 하였고, 김시범과 김연배는 조천 도서회관 교사로 활약한다. 또한 박두규는 조천사립학교 교사로, 김시은과 김형배는 192311월 조천노동단을 조직하였으며, 김장환은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하였다.

조천 만세운동의 영향은 실로 대단하였는데, 1932년 일본 고등법원검사국 사상부에서 작성한 제주도 치안상황에 의하면 조천, 함덕, 신촌 세 지역의 백성들에 의해 일어난 독립 시위운동은 그 후 청소년의 뇌리에 불온한 사상을 심어주는 출발점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안세훈은 1942년 신좌소비조합사건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1919년 제주도 조선독립만세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자극을 받고 점차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는 3?1 운동 이후의 식민지 독립투쟁 일선에서 활약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와 같다 하겠으며, 사회주의자 또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실지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민족주의 노선에 한계가 있음을 확인하고 김순탁, 김시범 등은 사회주의 노선을 택하게 된다. 19253월의 신인회, 1927년의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의 결성, 19273?1 운동 주도자들(김시범, 김순탁, 김운배 등)의 참여로 결성된 신좌소비조합운동, 1927년 문고(文庫)의 조직과 1929년 표면조직인 우이계(宇利契)의 결성 등으로 나타난 아나키즘 운동 등이 있으며,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유일한 식민지 해방투쟁으로 자리를 잡았다. 1930년 혁우동맹의 조직, 1931년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조직, 1930년대의 적색농민조합 활동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천 만세운동은 1920~30년대 제주지역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청년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1921년 제주청년수양회, 제주청년흥학회와 1923년 제주청년연합회, 1928년 제주청년동맹 등의 결성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식민지 차별교육에 항거하는 학생운동 및 민족교육을 활성화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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