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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6-02 조회 1207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김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구동파와 거세된 정치적 노동운동 
 
1985년 6월 24일부터 6일간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부흥사 등 사업장에서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던 파업인 구로동맹파업, 흔히 구동파라고 불리는 구로 지역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지역차원 연대 정치투쟁이란 점에서 남한 노동운동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구동파를 둘러싼 그간의 평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학출 노동자가 중심이 된 구동파와 이후 전개된 정치적 노동운동이 전체 노동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운동의 ‘과잉정치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구동파 및 서노련을 통해 배출된 운동 주체들이 87년 이후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한 주체라는 점에서, 구동파는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물질적 기반을 형성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 시기 구동파의 ‘과잉정치화’를 주장하는 이면에는 노동운동의 ‘정치성’ 거세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혐의가 존재한다. 노동운동에서 정치와 경제 영역을 분리하려는 시도와 학출 노동자들의 개입을 ‘반지성주의’적인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치적 노동운동’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거세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정치성을 거세시키고, 그 자리에 조합주의적 실천을 새기려는 이론적 시도이다. 하지만 구로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같은 지역의 활동가 가운데에도 구동파 및 활동에 대한 평가와 잣대는 매우 상이하다. 즉 구동파 및 이 시기 운동의 '다양성'이 그간 간과되고 왔던 것이다. 
 
70년대 노동조합 운동의 극복 노력
 
80년대 초반 운동 주체들은 70년대 노조운동을 기업별 노조 하에서 소수 민주노조 중심의 경제 투쟁에 제한되었으며, 그 결과 80년대 초반 국가의 탄압에 대해 '연대' 보다는 노조의 조직보존 논리란 한계를 내포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80년 서울의 봄 당시, 70년대 민주노조운동 지도부들은 ‘노총민주화’ 이외에 신군부 정권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80년대 초반 해산 당한 청계피복 노조도 당시 활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 “준비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당시 기업별-조직보존 논리에 대해 자기 비판을 한 바 있다. 또한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에서 70년대와 다른 변화가 감지되었다. 82년 원풍모방 노조의 해산 과정에서 보여 지듯이, 80년대 들어 기독교계-자유주의적 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정치성을 거세하고, 주어진 ‘체제의 범위 내’에서 노동운동을 제한하고자 했다. 이를 반영하듯이, 조직적인 면에서, 80년대 초반 노동운동은 한편으로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유산을 이어받은 ‘노복협’이라는 흐름과 70년대 조합주의적-경제주의적 실천을 극복하고자 했던 ‘정치적 노동운동’이 공존했다.

지역과 공단을 실천의 단위로

다음으로, 구동파 직전 노동운동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하자. 80년대 초반 노동자들의 최대의 불만은 '임금 가이드라인'이었다. 구동파 직전 임투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문제의 핵심이 노조와 개별 자본가의 문제가 아닌, 정부와의 문제임을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게 되고, 문제의 근원이 정부 정책임을 파악하게 되었다.

구동파가 일어났던 구로 지역의 대부분 사업장은 의복제조,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한 여성 사업장이었으며, 구동파에 참가한 사업장은 상대적으로 대기업 사업장이었다. 특히, 주목해야할 움직임은 학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지역소모임이었다. 구동파 이전 학출 운동가들에게 있어서, 이른바 ‘소그룹운동론’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이는 준비론으로 불릴 수 있는 것으로, 노조 활동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인 투쟁에 대한 '지원'이 활동의 중심이었다. 구동파 이전 시기에, 비공개 소그룹으로 심상정, 민경옥, 서혜경 등 지역정치소모임'과 해고자들의 가두활동에 힘을 쏟았던 '노투'가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단'을 실천 단위로 한 구체적인 실천 과정에서 학출 활동가와 선진 노동자 사이의 역할분담을 하고, 비공개모임은 학습모임의 형태로 하고, 단사 차원이 아닌 공단 내 실천을 모색했다. 특히 이들 실천에서 중요했던 것이 <공단소식>이라는 유인물로, 이는 소그룹 구성원들에 의해 거주 지역의 닭장집 등을 통로로 해서 배포되었으며, 85년 5월 제1호를 발행한 이래 3호까지 발간되었다. 당시 공단 소식이 저녁에 한번 돌면 회사 분위기 자체가 바뀌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구로공단 활동가와 노동자들은 단위 사업장 노조만으로는 노동자 운동의 발전이 불가능하며, 공단이란 지역을 단위로 한 연대-정치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조간부와 학출 활동가들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는 경우도 존재했으며, 일부 사업장의 경우, 학출은 집행부의 ‘안티세력’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공단 전체 교육에 대한 조합간부의 평가 가운데에는, “교육시키라고 보냈더니 위원장 욕하는 것만 가르쳤다”는 식의 갈등도 존재했다. 또, 학출이었으나 지역 정치소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구동파를 경험한 한 증언자는, 당시 지역정치소모임 이외에 많은 소모임이 존재했으며, 노조 자체에 큰 의미를 둔 사업장도 상당히 존재했다고 전한다. 이는 구동파라는 지역연대 투쟁 이해의 복잡성을 드러내어 준다.

구동파의 구체적인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면, 먼저, 구동파에 참여한 노조들의 특징은 우선 조합 내부 써클 활동, 소식지 등의 일상적 활동을 통한 노조내부의 의사소통이 매우 활발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이를 통하여 공동교육, 공동숙박교육, 연합야유회 등을 통한 노조 간의 연대 바탕이 형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구로 지역의 노동실태 조사, 위원장과 부서 간 교류 및 합동상집회의의 개최 그리고 공동임투의 준비가 이루질 수 있었다.

구동파의 발생 원인과 관련, 정부는 85년 대우자동차 파업 이후 임금가이드라인의 잇 다른 붕괴 원인이 학출 노동자와 노동대중의 결합 때문이라고 판단, 신규 조합에 대한 신고필증을 허가하지 않는 학출과 일반 노동자 사이의 분할을 시도했다. 특히 대우자동차 파업 이후, 정부는 학출 및 노조 결성에 적극적인 노동자를 탄압함으로써, ‘노동운동 정치화의 잠재적 요인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 와중에서 85년 6월 24일 대우어패럴 김준용 위원장의 연행에 대한 항의로 직접적으로 발생한 투쟁이 구동파였다.

초기 투쟁에 참여했던 조합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연대투쟁위원회’를 구성, 구체적 연대를 추진했으나 단전, 단수 등으로 인한 연락 두절로 연대파업은 사업장별로 진행되었다. 구동파 당시 제기된 정치적인 요구는 “노동운동 탄압 말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 안기부법 폐지하라”, “노동부 장관 퇴진하라” 등 맹아적인 수준의 정치적 요구가 일관되게 제기되었다.  
 
구동파와 정치적 노동운동, 평가해야 될 것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구동파를 둘러싼 평가였는데, 구동파를 둘러싼 2가지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 하나는 지역정치모임 및 소그룹 활동가의 적극적인 역할에 근거한 ‘전형적인 정치투쟁’이었다는 평가다. 이에 상반되는 평가는 구동파의 기반은 외부 그룹이 아닌 ‘노조’였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소그룹 활동가의 계획에 따라 파업이 주도된 것이 아닌, 활동가 역시 노조의 조합원으로 존재했을 뿐이며 영향력이 크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별 노조 간의 연대에 있어서 외부 그룹과 조직의 힘은 취약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후 서노련이라는 조직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였다. 구동파의 계승을 천명했던 서노련은, 구동파는 정치투쟁이며, 이를 주도한 것이 지역정치소모임의 활동가들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정치적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치적 노동운동의 정당성 내지 필연성’이라는 문제와 실제 구동파가 소그룹의 지도에 의해 전적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연대투쟁이라는 문제는 별개 차원의 문제다. 구동파 과정에서 소그룹과 지역정치모임이 구로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대투쟁을, 지역적 노동운동을 기획했던 것은 사실이며, 초보적이나마 노동운동에서 ‘정치투쟁’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동파가 본격적인 의미에서 정치투쟁이거나, 참여 조합원의 의식 수준과 지향이 정치투쟁으로, 구동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는 곤란하다. 당시 서노련의 주체들이 강조한 구동파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노동자주체와 운동적 관계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구동파의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효과로서 “노동운동은 본령은 정치투쟁”임을 표방했던 서노련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노동운동의 등장과, 노동운동에서 변혁론의 본격화를 인정할 수 있으나, 실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감지하던 계급적 경험과의 괴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구동파 1년 뒤 일꾼자료실에 의한 평가도, 서노련식의 평가에 반대하며 구동파에서 노조의 역할이 가장 컸음을 제시했다. 특히 구동파 이후 정권의 탄압으로 다수가 구속, 수배 당하자 주요 조직들은 '어린 학출' 활동가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잦았고, 이들은 가두투쟁과 데모 동원을 통해 주도권 장악을 시도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노동운동이 학생운동의 ‘제2 전선’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결국 구동파의 운동사적 의미에도 불구, 이후 개별 노조들의 힘은 점차 약화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구동파 이후 서노련으로 대표되는 그룹이 유일한 운동적인 대표성을 지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노련은 자신의 평가에 근거하여 자기역할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했고, 정치투쟁론, 대중적 정치조직론 등은 당시 학출 활동가들에 의한 ‘하나의 평가’이지, 투쟁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의 평가는 아니었고 노동현장의 상황은 고립화 및 소수화 경향이 짙어 갔다. ‘구동파=정치투쟁의 원형’이라는 하나의 흐름과 동시에 존재하던 자생적인 노조의 움직임이 병존했던 것이며, 이는 구동파 이후의 운동을 단일한 흐름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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