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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시기 : 1990년 4월 28일 ~ 5월 10일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의 배경
현대중공업노동조합은 결성부터 어려웠다. 현대그룹의 주력 기업인 데다 중공업 사업장의 폭발성 때문에 그룹 내 어떤 사업장보다 치밀한 노무관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87년 7월 21일 노동조합이 설립될 때부터 회사쪽의 사주를 받은 어용노조가 만들어졌고, 회사의 폭력에 맞선 기나긴 결사투쟁 끝에에 민주노조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렇게 건설된 노동조합은 1988년 6월 9일 단체협상을 시작한 뒤, 12월 12일 총회 형식의 파업에 돌입해 1989년 3월 30일 노태우 정권이 공권력을 투입하기까지 무려 128일간 총파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1989년 1월 8일, 회사가 고용한 제임스리(본명 이윤섭)라는 노조파괴 전문가가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 등으로 노조운동가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사건은 현대재벌의 노사관을 그대로 보여줬다.
1990년 상반기 들어서면서 정권과 결탁한 현대그룹은 치밀한 각본 아래 현대중공업노조에 대한 도발을 시작했다. 1990년 2월 6일, 1989년 파업지도부에 대한 부산고등법원 항소심에서 1심보다 오히려 더 높게 구형했고, 9일에는 이영현 5대 위원장 연행·구속과 함께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어 10일에는 완전무장한 사복경찰 250여 명이 노조사무실에 난입, 압수수색을 해 노동자들을 분노케 했다. 조합원들은 사측의 도발에 대해 즉각 집단 월차, 사내시위로 맞서기도 했지만 1990년 상반기 투쟁의 방향과 기조를 둘러싸고 혼란과 동요가 계속됐다.
구속자 석방투쟁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과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을 통해 조합원의 경제적 실리와 복지증진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 간의 대립, 총자본의 공세에 밀려 물러설 수는 없다는 의견과 더 이상 희생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하나로 모이지 못했다. 1990년 4월 23일자 <민주항해 속보>는 “이 상태로 잘 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다. 힘을 모아 투쟁해도 될까 말까 한 판국에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라며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으로 기울어지는 분위기에 우려를 표한 반면, 김영환 프랜트사업부 부위원장은 유인물을 통해 “싸움은 단협과 임투로 해야 하는 것이다. 무모한 희생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조합 지도자라면 마땅히 조합에서 총력전을 펴야 할 주택·후생복지에 대해 무엇 하나 한 것이 있는가? 더 이상 현대중공업 조합원은 총알받이 타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런 와중에 3월 12일 진민복 위원장 권한대행이 ‘구속자 석방투쟁 철회’를 선언하고 이후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을 위한 준비와 교섭에 착수했지만, 자본측은 의도적으로 교섭을 회피했다. 사측은 5대 집행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이 확고했다. 그러다 4월 20일 수배 중이던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이 연행·구속되자 팽팽했던 대립 선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며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했다.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의 구속과 총파업 돌입
4월 20일 오후, 현대중공업 투쟁과 전국 투쟁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던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이 동대구톨게이트에서 연행·구속됐다. 현장에는 이튿날에야 구속 사실이 알려졌는데, 그 소식은 그동안의 다양한 논쟁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단협이냐, 임금이냐, 해고자복직이냐 하는 논쟁이 아니라 사측의 총체적 공격 속에서 노동조합을 어떻게 지켜내느냐가 당면한 현실로 닥친 것이다. 2월 9일 이영현 위원장이 구속되면서 쟁의발생 투표가 대의원대회에 부쳐졌을 때만 해도 84대 116으로 부결됐지만, 권용목 현대엔진노조 위원장의 구속에 이어 우기하 수석부위원장까지 구속되자 현장 조합원으로부터 즉각 분노가 터져 나왔다.
4월 21일 조선사업부 조합원들이 중심이 된 아래로부터의 투쟁 돌입은 노조 지도부의 동요와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즉각적인 파업투쟁을 강제했다. 22일 긴급히 소집된 대의원 간담회에서 25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키로 결의했다. 이어 23일에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24일부터는 소위원, 선봉대, 기동대, 정당방위대원들의 철야농성과 대의원 천막농성이 시작됨으로써 투쟁 열기가 뜨거워졌다. 노동자 2천여 명이 농성을 벌이며 투쟁의 의의와 방향에 대해 천막별로 토론을 계속해 나가는 한편, 공권력 투입에 대비해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천막 주변에 ‘민주박격포’(장작불로 포신을 달구고 그 안에 스프레이 가스를 집어어 그것이 폭발하는 힘으로 안에 집어넣은 볼트와 너트가 파편처럼 날아가게 만든 장치)를 설치하고, 화염병을 제작했다. 조합원들은 “우리는 금번 생존권을 내건 총파업 투쟁에 있어서 공권력 개입 등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결코 전체의 뜻을 거역하거나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최후까지 투쟁을 결의한다”는 내용의 결의서에 서명했다.
이것으로 파업이 합법이냐 불법이냐의 문제는 이미 대중적 수준에서 극복되고 있었다. 현대그룹과 공권력을 중심으로 한 총자본, 현대중공업 노동자와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총노동 간의 피할 수 없는 격전이 시작됐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1989년 이후 침체돼 온 노동자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위기설’ ‘임금 한자리수 억제’ 등 일체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국가를 상대로 정면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편 현장노동자들의 투쟁 열기가 치솟자 비상대책위 지도부의 동요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4월 23일 진민복 직무대행을 의장으로 해서 구성된 비상대책위는 다음날 진민복 의장이 잠적함에 따라 김영환 부위원장을 비대위 의장으로 인준한다. 그러나 26일 오후 2시 비대위 전체회의에서 김영환을 포함한 부위원장 5명 전원이 “정치파업은 못하겠다”며 퇴진함에 따라 이갑용 사무국장을 총책임자로 선임하고, 오후 5시 대의원 간담회에서 비대위 대표로 이갑용 사무국장의 대표권을 인정하게 된다. 이로써 현대중공업은 흔들리지 않는 파업지도부 구축을 마무리 짓게 됐다.
4월 27일에 발행된 <총파업 투쟁속보>는 “사무국장 이갑용 동지, 최후의 총대를 메고 전열 재구축” 이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쉰 살이 넘어 뵈는 늙은 우리의 동지가 붉은 머리띠를 동여매고 정방대원의 일원이 되어 힘찬 구보를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뜨거운 동지애의 눈물을 삼키며 승리를 읽는다. 또 한편에서는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가진 듯한 비대위 의장 및 일부 국장단이 꼬리를 감추고 노골적으로 본심을 드러냈다. 종합운동장에서의 ‘결사항전’ 등으로 조합원의 눈을 가려놓고 실질적인 싸움의 준비는 뒷전이었고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극소수의 지도부가 자취를 감춘 상태에서 현대중공업노조의 굳은 의지를 팽개칠 수 없음을 직시한다.”
4월 27일, 경찰은 4월 28일을 공권력 투입일로 잡고 동구를 중심으로 울산 전역에 12,000여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같은 날 현대중공업은 중역회의에서 공권력 투입 요청을 결의했고, 몇 차례의 노사정 간담회를 통한 협상 시도는 상호 차이점을 좁히지 못하고 끝났다. 경찰은 다이아몬드호텔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경찰병력을 현대중공업 주변에 집중 배치한 뒤 헬기를 동원해 현장 내 파업노동자들의 상황을 수시로 확인했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하자 현대중공업 파업노동자들은 ‘공권력 개입 반대 장례식’을 하고 화염병 투척 연습을 하는 한편 사업부별로 현대계열사 인사부 점거농성, 공권력투입시 골리앗 점거농성, 가두투쟁 준비를 해나갔다. 또한 투쟁지도부를 골리앗지도부와 야전지도부로 이원화하고 최종 결정은 골리앗지도부가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투쟁지도부는 4월 26일 밤 11시경 골리앗 위로 이동 인원 일부를 올려보낸 뒤 공권력 투입이 확실시된 4월 27일 밤 10시경 골리앗 결사조 78명을 82m 높이의 골리앗으로 올려보내 점거농성 준비를 완료했다. 야드에서 <파업전야>를 관람하던 8,000여 조합원들은 갑작스러운 비상에 공권력 투입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철야에 들어갔다.
현대중공업 공권력 침탈 ‘미포만 작전’
1990년 4월 28일 새벽 3시 45분, 경찰들은 이미 ‘미포만 작전’을 개시해 서서히 병력을 이동했다. 현장에서도 긴장감으로 터질 듯한 분위기 속에 골리앗에서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쇠파이프소리와 노랫소리가 힘차게 울리고 있었다. 새벽 4시, 끝이 보이지 않는 경찰병력이 현대자동차 출고정문 앞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비상! 비상이다!”며 규찰을 서던 선봉대와 현대중공업노조 결사대가 새벽을 흔들어 깨웠다. 단체협약과 임금인상 투쟁을 놓고 철야농성을 전개하던 현대자동차에서도 대의원, 선봉대, 야근조 조합원 등이 가세해 2,000여 명으로 불어난 대오가 경찰병력을 막아섰다. 이들은 처음에는 야유와 돌 몇 개를 던지다가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경찰을 가로막고 현장의 작업물품인 쇳덩이들을 지게차로 옮겨다가 도로를 차단했다. 당황한 경찰은 최루탄과 지랄탄을 무차별로 쏘아댔다. 최루탄 소리에 숙소에서 잠들어 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까지 달려와 가세하면서 후미의 경찰차 30여 대가 완전히 무장해제당했고, 이로써 육·해·공 입체작전으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도망갈 구멍 없이 완전히 봉쇄하려던 경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공권력 투입이 한 시간 이상 지체됨으로써 조합원들이 불충분한 포위망을 돌파하고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현대 자본의 공작으로 매번 엇갈렸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마침내 투쟁의 햇새벽에 직접적 행동으로 하나가 됐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잠시 후 오전 6시 정각, 다시 페퍼포그가 앞을 식별할 수 없도록 최루탄을 퍼붓자 이에 맞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민주박격포가 발사됐다. 정문 앞 바리케이드와 담장을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백골단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헬기로 사전정찰과 상황지시, 선무방송을 했고, 미포만에는 군함이 상륙했다. 73개 중대 1만여 명의 병력이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를 통해 달려든 것이다. 새벽 5시부터 헬기가 울산만 상공을 분주하게 날아다니더니 6시가 되자 불도저가 중공업 정문을 두드렸다. 그 뒤에는 페퍼포그차가 숨어서 수백 발의 지랄탄을 쏘아댔다. 구토 나는 최루가스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침입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또다시 민주박격포가 작렬했고, 화염병이 날아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랄탄을 퍼부으며 돌진하는 페퍼포그와 전경들은 공격 개시 7분 만에 3차 바리케이드까지 무너뜨렸다. 30여 대의 민주박격포가 불을 뿜었지만 전경들을 잠시 우왕좌왕하게 하는 정도였다.
삽시간에 대오가 쪼개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눈물을 삼키며 조금씩 물러서고 있을 때, 골리앗 투쟁지도부의 지침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골리앗 지도부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지들! 현 위치를 사수하라. 여기가 누구의 일터인가? 여기서 나가야 할 놈은 바로 저들이다. 우리가 엄호할 테니 아래의 동지들은 마음껏 공격하라!” 그리고 함성과 함께 수백 개의 볼트가 날아갔다. 전경의 방패가 깨지고 머뭇거리던 노동자들이 전열을 갖추었다. 그러나 중장비까지 동원한 경찰병력 앞에서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골리앗 지도부에서 새로운 지침이 떨어졌다. “동지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공장을 빠져나가 야전지도부의 지도 아래 가두투쟁을 전개하라! 우리는 골리앗으로 간다. 골리앗은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동지들! 승리하는 그날에 만나자!”
조직적인 퇴각이 시작됐다. 마지막으로 8시 35분, 4도크와 5도크에서 항전하던 노동자들이 무장해제당했다. 그들은 용접봉, 장작, 볼트가 널브러진 도로 위를 따라 사복조들이 도열한 틈으로 눈물을 삼키며 빠져나와야 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연대파업
경찰의 새벽 진압작전을 두 시간 연기시키며 치열하게 싸웠던 현대자동차는 아침 출근시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이어졌고 전체 노동자가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만여 명의 가두투쟁 대오가 형성되어 현대자동차 앞 도로를 3~4km 점거한 채 경찰병력을 포위해 들어갔다. 워낙 대규모 인원인지라 한쪽에서는 싸우고, 한쪽에서는 구호를 외치고, 또 한쪽에서는 집회가 열렸다. 10시 30분경 앞 대오가 150여 명의 전경을 무장해제시키고 현대자동차 앞 주택가까지 무차별 최루탄을 쏘아대던 페퍼포그를 불태웠다. 한편 투쟁이 자연발생적으로 계속 확산되자 현대자동차노조 집행부는 본관 앞에서 모여 총회를 열고 투쟁방법을 결정하자고 제안했지만 800여 명만 들어갔을 뿐이었다. 이상범 집행부의 한계와 기회주의성이 여지없이 폭로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골리앗 투쟁을 중심으로 한 1990년 상반기 투쟁은 당시 2만 6,000여 명의 현대자동차노조 조합원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4월 28일 공권력 결사저지 투쟁은 이러한 과제에 부응하려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몸짓이었다. 5월 3일 오전 9시, 노조가 ‘7일 정상조업’을 결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한 조합원 1,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5월 2일 밤 11시부터 진행된 ‘중앙쟁의대책위’는 ‘7일 정상조업, 8일부터 단체협약과 임금인상 투쟁에 대한 재정비’ 안을 놓고 이상범 위원장을 제외한 22명이 표결한 결과 11대 11로 동수가 나오자 위원장 권한으로 5월 7일 정상조업을 선언한 것이다. 조합원들은 이같은 결정에 항의하며,즉각 총회를 소집해 이 결정에 대한 정당성을 확인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상범 위원장은 5월 3일 갑작스럽게 총회를 소집해 파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발언권을 박탈한 채 자신의 견해만 발표하고, 숫자도 대충 헤아린 뒤 “이쪽이 더 많지요?”라며 정상조업을 결정하고 말았다.
골리앗 농성 노동자들의 투쟁
1990년 4월 28일 공권력 투입 직전 골리앗을 점거한 결사대 78명은 4월 29일부터 조합간부와 선봉대장을 중심으로 사업부별로 조를 편성해 순찰과 야간 동원근무를 실시했다. 4월 29일 오후 6시경에는 야전지도부 이형근 동지를 통해 골리앗 지도부와 야전지도부와의 역할분담을 논의한 결과 골리앗지도부가 모든 상황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하며, 야전지도부는 골리앗의 상황을 알리고 협의사항을 발표하는 대변인 역할을 맡기로 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점거농성에 당황한 자본가와 공권력은 선무방송을 하며 4월 30일에 헬기로 골리앗 위를 대형그물로 덮는 고공작전을 시도했으나 골리앗 노동자들이 골리앗 끝부분에 나이론 로프를 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5월 1일 골리앗 탑에서 전체 인원 집결 후 약식 노동절 기념집회를 연 뒤 오전 10시에는 골리앗 중간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골리앗 노동자들은 가두의 사정에 대해 오직 무전기와 라디오방송, 그리고 멀리 육안으로 보이는 동구지역의 투쟁상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5월 1일 결사대 중 1명이 내려가다 연행됐고, 일반 조합원을 중심으로 동요가 생겨났다. 2일부터는 투쟁대오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집행부 요원이 요소요소에 보조근무를 서고 대의원 등 쟁의 주도 요원들이 업무연락과 조직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2일 오후 가족을 동원한 선무방송으로 다시 1명이 내려가고 3일 오후에는 전체 논의를 통해 13명이 다시 골리앗 밑으로 내려갔다. 3일부터는 물이 바닥나고 비상식량도 바닥나서 하루에 생라면 하나로 때우면서 버텨나갔다. 마침내 6일 정오에는 전체회의를 통해 ‘단식투쟁’에 돌입하기로 하고 남은 식량을 모두 바다로 던져 버렸다.
공권력 투입 직전의 역할분담에서는 골리앗지도부가 모든 결정을 하기로 했으나, 이를 직접적으로 관철시킬 수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상징적 지도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골리앗 위에서 얼마나 버티느냐가 결국 투쟁 지도력 그 자체였다. 현실적으로 투쟁의 전 과정에 대한 지도는 야전지도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나마 무전기는 방해전파로 단절됐다. 5월 4일 현대자동차노조의 정상조업 결정과 5월 5일 이후 가두투쟁의 지리멸렬함은 결국 골리앗지도부의 상징성마저도 퇴색시켜 가고 있었다. 자본은 몇 차례 협상에서 노동자들의 소박한 요구마저도 거부함으로써 여지조차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가두에서는 투쟁의 뚜렷한 방향과 목표도 없이, 그리고 골리앗지도부에 맞춰 투쟁을 끝까지 이끌어 갈 지도적 구심도 없이 무의미하게 되풀이되는 산발적인 전투 속에서 동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단식투쟁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취할 수 있었던 마지막 투쟁이었다.
5월 6일 단식투쟁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일교차가 20도가 넘는 악조건 속에 며칠째 비에 젖은 상태여서 건강이 악화된 데다가 회사측이 생수랍시고 썩은 물을 올려보내 여기저기서 배탈 환자가 속출했다. 탈진상태에 빠진 골리앗 동지들을 본 지도부는 한 사람의 피해자도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최후의 판단을 한다. 10일 오후 2시 골리앗 최후의 결사대 51명이 골리앗 점거농성을 해산하고 내려왔다. 그렇게 13일간의 골리앗 농성이 끝났고, 이들 중 15명이 구속됐다.
만세대 등 야드에서의 투쟁
한편 4월 28일 오전 9시 45분. 만세대 민주광장은 밀려난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 수 없게끔 백골단·전경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밀려난 노동자들의 집결시간은 12시였다. 이미 싸움으로 단련된 가족들이 먼저 투쟁을 시작했다. “당신들이 뭔데 우리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거야! 여기는 정주영 땅이 아니니 썩 정주영 땅으로나 꺼져라!” 이를 계기로 경찰과 백골단이 가족들을 공격했고 격렬한 투석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백골단은 근처를 지나던 오토바이를 잠시 세우더니 아무 말도 없이 쇠파이프로 내리쳤다. 비명소리가 울려퍼졌고, 백골단도 잠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때 한 노동자가 백골단을 향해 돌진하여 몇 번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다 백골단의 집단폭행에 기절해 버렸다. 이렇게 만세대 민주광장 일대의 가두투쟁이 시작됐다.
4월 29일부터 매일 부서별로 출근체크를 마친 노동자들은 다시 부서별로 나뉘어 동구 전역에서 치열한 가투를 전개했다. 가투가 시작되기 전 동구 일대의 작은 골목마다 가족들이 합동으로 쓰레기를 모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최루탄을 씻어낼 고무호스를 준비했다. 특히 128일 파업의 경험을 살려 가족들은 스스로 물품보급조와 구급조를 편성, 조직적으로 투쟁에 동참했다. 29일 현대중장비 앞에서는 최루탄이 다 떨어진 전경들이 시위대열에 밀려 현대중장비로 쫓겨갔다가 점심도 못 먹고 온종일 갇혀 있기도 했다. 중학생들로 꾸려진 가투부대가 나타났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돌을 날랐다. 비록 끊임없이 밀리고는 있었지만, 전선이 곳곳에서 형성돼 쫓고 쫓기는 투쟁이 쉴새 없이 계속됐다.
5월 1일에는 현대자동차노조가 효문로타리와 염포검문소 등 2개 방향으로 평화대행진을 벌였고, 현대중공업노조도 조합원 참여율이 95%에 육박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오후 3시에는 만세대 민주광장을 전경들로부터 완전히 탈환해 오후 5시에 노동절 기념집회를 하기도 했다. 현대종합목재노조, 현대정공노조 등에서도 1,500~2,000여 명씩 참여해 대규모 가두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투쟁의 열기는 5월 1일을 넘기면서 조금씩 식어가기 시작했다.
5월 4일 현대자동차노조가 조업복귀 방침을 내림으로써 투쟁 열기는 급격히 사그라졌다. 어린이날 휴식을 취하고 6일 새로운 투쟁을 전개하자는 지침이 전달됐다. 6일 집회장소인 사천세대로 노동자들이 모여들자, 경찰은 헬기를 낮게 띄워 집회를 방해하고 대대적인 진압을 개시했다. 심지어 아들의 옷일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고 모내기를 하던 할아버지까지 끌려갔다. 골리앗 투쟁이 시작된 후 5월 3일까지의 현대중공업 610명, 현대자동차 77명, 현대전동기 22명, 현대정공 10명 등 총 730명이 연행됐다.
투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투쟁기간 죽어지내던 기회주의자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더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우리가 앞장서서 수습하겠다”며 근로감독관의 주재하에 서영택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가 설치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그 말을 불신하면서도 싸울 수가 없었다. 이원갑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인 야전지도부가 집회장을 돌며 투쟁을 조직하고 ‘노동해방 선동대’를 조직하는 등 피눈물을 삼키며 고군분투했지만 뒤집힌 상황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노협의 현대중공업 파업 지원투쟁
전노협의 현대중공업에 대한 지원투쟁의 핵심은 ‘5월 전국 총파업’ 성사였다. 그간 지역과 업종차원의 연대 수준에 머물러 있던 노동조합운동을 의식적인 전국투쟁으로 조직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의 한 단계 발전을 끌어내야 했다. 그리고 그 필요성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제기하고 있었다. 전노협에서 마창노련이 현총련 결의(4월 27일)보다 앞선 4월 25일 23개 노조가 참가한 비상대표자회의에서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고, 서노협은 4월 27일, 5월 3~4일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밝힘으로써 현대중공업 투쟁은 곧장 전노협 전체의 투쟁으로 확대됐다.
전노협은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된 바로 다음 날 4월 29일 오전 10시에 비상중앙위원회를 열어 “전체 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와 노조활동의 자유를 위해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더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단호히 밝히며 즉각 전국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선언”하는 한편 즉각 울산지역에 각 지역의 선봉대를 무제한으로 파견하여 총력 투쟁해 나갈 것을 결의하고 △현대중공업과 울산지역에 투입된 경찰병력 즉각 철수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구속 노동자 즉각 석방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중단과 노조활동의 자유 보장 △노동부장관·내무부장관·상공부장관 현사태 책임 지고 즉각 퇴진을 촉구했다. 전노협은 이러한 결의를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업을 펼쳐나갔다.
특히 4월 29일 비상중앙위원회에서 결의한 ‘전노협 선봉대를 울산에 무제한 파견하겠다’는 방침은 즉각 시행돼, 총 6개 지역에서 114명이 파견됐다. 각 지노협에서 파견한 선봉대 외에 공개모집을 통해 참여한 학생들을 포함하면 전노협선봉대는 200여 명을 넘어섰다. 파견된 전노협 선봉대는 5월 5일과 6일 사천세대에서 전노협 깃발을 들고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현대중공업 경찰 봉쇄선을 물리력으로 뚫고 전노협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골리앗 농성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역시 전노협”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후 울산지역에서 ‘살아있는 연대정신’의 표본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구속 중이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은 KBS와 현대중공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확실시되던 4월 27일, 당시 투쟁의 의의를 밝히며 전면적 투쟁을 신속히 조직하라는 장문의 옥중서신을 전해왔다. 공권력이 투입된 28일에는 권용목 전 현총련 의장 외 울산지역 12명의 구속자가 단식농성에 돌입했으며, 29일에는 단병호 위원장도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4월 30일에는 마산교도소에서 이종엽 마창노련 의장대행 등 130여 명의 양심수가 즉각적인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전국 곳곳에서도 지노협을 중심으로 공권력 침탈을 규탄하는 투쟁이 벌어졌다. 수도권 결의대회는 4월 29일 동국대학교에서 열렸고, 오후에는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기습적인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6천여 명이 노동부사무소 앞 종로대로를 완전히 점거하고 ‘해체! 민자당, 사수! 전노협, 퇴진! 노태우’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피카디리 앞에서 경찰차 3대를 화염병으로 공격해 전소시킨 시위대는 단성사 옆 파출소 1층을 불태웠으며, 노동부 지방청사무소 간판도 화염병에 맞아 불탔다. 30여 분간 피카디리 앞 네거리를 완전히 장악했던 시위대는 백골단에 세운상가 쪽으로 밀려났다. 백골단이 식당 안까지 들어와 닥치는 대로 연행하자 시민들이 경찰에 항의했고, 백골단은 시민들 몇 명만 모여도 사과탄을 던져 넣었다. 밀려가던 시위대 6천여 명은 동대문 앞에서 2차 가두집회를 열고 백골단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골목골목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혜화동 방면과 청계천 방면에서도 수백명씩 대오를 형성해 투쟁이 벌어졌다. 청계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1,000여 명의 시위대는 평화시장 고가다리, 이대 동대문병원 앞, 명동성당 주변 등지에서 가두투쟁을 계속했다. 저녁에는 서총련 학생들을 중심으로 150여 명이 명동성당 농성에 돌입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날 91명이 연행됐다. 참고자료 - 전국노운협, <노동운동>, 1990년 6월호 - 전노협, <현대중공업 파업투쟁 자료집>, 1990년 5월 -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 1995 - <노동해방문학> 복간호, 199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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