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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노조 단체협약 갱신투쟁
시기 : 1990년 11월 3일 ~ 1991년 2월 20일
투쟁의 배경과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상태
1989년부터 노동운동 진영에 대한 총공세를 편 자본과 정권은 1991년 임금인상 투쟁 시기에도 한 자릿수 임금인상 등을 내걸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사전에 제압하려 했다. 특히 걸프전으로 인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과대 포장해 임금인상 억제를 위한 사회·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해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의 명분을 강화하려 했다. 이에 전노협․연대회의․업종회의 등 민주노조 진영은 더욱 강화되는 자본의 탄압에 대한 공동대응을 결의했고 전노협은 1991년 임금인상 투쟁에서 공동기구 구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우조선노조가 1990년 11월부터 단체협상을 시작해 본격적인 투쟁을 준비했다. 대우조선노조의 단체협약 갱신 쟁점 사항은 △인사·징계 △구속자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 △각종 수당 등에 대한 요구 였다. 이 가운데 특히 인사·징계, 구속자, 조합 활동에 관한 요구 등은 ‘인사․경영권에 관한 노동부 지침’ 발표와 ‘전국경제단체협의회’(경단협)의 공동방침이 천명된 이래 전국의 모든 사업장에서 쟁점이 되는 조항이었다. 따라서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1991년 공동 임금인상 투쟁을 앞두고 사전에 기선을 제압하려는 총자본 측과 승기를 잡아 임금인상 투쟁 분위기를 활성화하려는 노동 측의 일대 대결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었다. 대우조선노조에서 실시한 조합원 표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에 대한 애정이 매우 높아 “앞으로 5년 이상 근무하겠다”는 사람이 전체의 74.4%며, 이중 절반은 “정년까지 근무하겠다”고 대답했다. 또 “회사의 경영관리층과 노동자가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3.3%, “기업주와 노동자는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1.4%, “회사의 발전이 나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7.6%나 됐다.
그런데도 85.3%가 “노조가 파업을 감행하면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특히 노동조건에 관한 조사에서 임금에 대해서는 약간 불만(27.6%)과 매우 불만(16.7%)을 합하여 44.3%가 불만이라고 답했다. 노동시간(59.8%), 노동강도(50.0%), 작업환경(64.8%), 승진기회(84.8%), 인사고과 공정성(83.7%), 고충처리(58.9%) 등에 대해서도 큰 불만을 표시했다.
1990년 단체협약 갱신투쟁의 목표와 방향
대우조선노동조합은 1990년 단체협약 갱신투쟁의 목표를 다음 세 가지로 정했다. 첫째, 요구 조건의 관철을 통해 실질적인 생존권과 노동권을 확보한다. 둘째, 그간 온갖 어려움 속에서 지켜온 노동조합을 더욱 민주적이고 공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아 1991년 임금인상 투쟁을 확실히 준비할 수 있는 조직 강화의 계기로 만든다. 셋째, 고립된 일개 단위사업장 노조의 투쟁이 아니라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는 고리가 되도록 한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단체협약 갱신투쟁의 기본 방향은 첫째, 요구 조건의 관철을 통한 실질 생존권, 노동권의 확보로 조합원이 투쟁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고 대중의 신뢰감을 바탕으로 한 교섭과 투쟁을 한다. 둘째, 조직 지도부를 유지하여 민주노조의 조직발전과 강화를 기한다. 셋째, 연대의 실천구도 구축을 위한 고리를 형성한다. 넷째, 지역민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특히 조합원 가족을 조직한다. 디섯째, 1990년 단체협약갱신 투쟁과 1991년 임금인상 투쟁은 그 시기가 분리돼야 하고 또 불가피하게 단체협약갱신 투쟁과 임금인상 투쟁이 겹쳐질 경우도 예상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섯째, 탄압의 빌미 이외에 단체협상 갱신투쟁의 목표 달성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준법투쟁보다는 조직의 단결력과 정세의 역동적 변화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1990년 단체협약 갱신투쟁의 진행
1991년 1월 23일 오후 1시부터 PDC#2 해방광장에서 조합원 7천 명이 모인 가운데 지도부의 단체협약 갱신투쟁에 대한 보고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백순환 위원장은 단체협약의 조기타결을 위해서 “사랑하는 우리의 직장이 극한 투쟁으로 마비되는 것을 막고 공권력 개입의 명분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조합원 개개인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부분파업, 파상파업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고 공권력 침탈이 있을 시 목숨을 건 극한투쟁을 불사할 것이며, 1991년 임금인상 투쟁에 대비한 별도의 준비를 진행한다”는 내용을 밝혔다.
1월 29일에는 노래가사 바꿔부르기 경연대회가 열렸다. 오후 1시부터 PDC#1 민주광장에서 조합원 8천여 명과 신문기자, KBS, MBC 방송사, 조합원 가족 등의 참여로 대단한 관심 속에서 진행됐다. 24개 부서 중 19개 부서투쟁위원회에서 부서별 작업 특성에 맞는 노래들을 만들어 출전했다. 최우수상인 노동해방상에는 도장부 남녀 혼성팀의 ‘원점’에다 가사를 붙인 ‘동규는 바보’가 차지했다. 노동해방상에는 상품과 상금 8만 원이 수여됐다. 노동자 가족협의회에서 출전해 ‘아빠와 크레파스’를 개사한 ‘우리 아빠’를 부를 때는 전조합원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으며, 전원 여사원으로 구성해 출전한 사무직 투쟁위원회의 ‘단체협약을 그리며’는 ‘널 그리며’를 개사한 곡으로 가장 많은 환호와 앙코르까지 받았다.
투쟁 기간에는 공권력의 지도부와 사업장에 대한 침탈에 대비한 각 문 방어훈련도 실시했다. 이 모의훈련에는 안전모, 장갑, 각목 또는 쇠파이프 등으로 완전무장한 직장 사수대와 전경으로 가장한 침탈조와 방어조를 편성해 스크럼으로 밀고 당겨 전진과 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루어내는 것과 침탈을 당했을 때를 가상한 재탈환훈련도 했다. 훈련에서는 최루탄 대신 밀가루를 사용했는데, 2월 1일 동문에서 진행한 방어훈련에서 실제 사과탄이 터져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기도 했다.
1990년 11월 3일부터 시작된 단체교섭이 해를 넘겨 진행되었지만 1991년 2월 5일, 29개 조항의 미합의 사항을 남기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노조는 앞으로의 투쟁과 교섭 방향에 관해 전 조합원에게 판단을 묻고자 2월 5일 10시 민주광장에서 조합원 6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단체협약갱신 교섭 보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백순환 위원장은 교착상태에 빠진 단체교섭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조합의 요구안 중 핵심 4개 조항을 수정 제의하게 되었다고 밝혔으며, 이조차 회사가 수락하지 않는다면 총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음을 밝혔다.
총파업에 돌입하며 노조는 공권력의 침탈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2월 7일부터 이틀동안 각 문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지게차, 트랜스포터, 크레인 등 각종 중장비가 동원하여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폐호스, 족장파이프, 사다리 등을 이용해 방어진지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를 능가했다. 투석전에 대비해 각종 볼트와 너트 등을 준비하고 비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텐트도 각 문에 설치했다. 이로써 총파업의 깃발은 더욱 힘차게 올랐다. 2월 7일부터 13일까지 짝·홀수제로 부서 투쟁위원회가 돌아가며 각 문 철야 방어를 했다. 정권과 자본이 언론을 통해 공권력 침탈 엄포를 놓은 것은 물론 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각 문을 방어하는 조합원들의 의지와 열기는 드높았다. 철야농성을 하면서 조합원들은 부서별로 프로그램을 정해 오락과 장기자랑 등을 진행했으며 서문 방어부서에서는 악단도 등장했다. 조합원들은 동서남북의 모든 문을 지게차, 크레인, 트랜스포터로 막고 부서별 정당방위대 20~30명을 배치해 현장을 사수했다. 지상 108m 높이의 골리앗에는 2월 7일 오후 9시부터 백순환 위원장, 강용길 수석부위원장, 복지부장, 풍물패 7명 등 50여 명이 올라가 2개월분의 식량을 비축하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파업 하루 전인 2월 6일 11시 대의원 대회장에서 대의원·소위원 1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우조선노동조합 단체협약 갱신 상황 및 향후 방향’에 관한 내용의 기자회견을 진행했지만, 이때는 노동조합이 각 신문사와 방송사에 협조 공문을 발송했음에도 <거제신문>, <한산신문>, <동남일보>, 3개 신문사만 참석했다. 그러나 2월 8일 총파업에 돌입한 뒤 2월 11일 오후 2시 PDC#1 식당에서 대의원 간담회와 함께 진행한 기자회견에는 전국의 신문·방송사가 몰려와 취재 경쟁을 벌였다. 식당 안을 가득 메운 1천여 조합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동조합은 회사측 교섭대표로 소장이 아닌 김우중 회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90년 11월 3일부터 시작된 단체교섭이 3개월여 넘게 진행됐으나 20개 조항의 미합의 사항이 남아 노조는 1991년 2월 8일 총파업 투쟁에 돌입했다. 또한 공권력의 지도부 침탈을 원천적으로 막고 반드시 노동조합의 힘으로 1990년 단체협약 갱신투쟁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천지 작전’이라 불리는 골리앗 결사항쟁을 전개했다. 하늘에서는 골리앗 결사대 51명이 결사 항쟁했고, 땅에서는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를 모아 2월 8일부터 13일까지 매일 파업 전진대회를 했다. 전진대회 때마다 위원장이 121m의 골리앗에서 내려와 대회사를 낭독했고, 현장과 사무실의 여성조합원들까지 쇠파이프와 각목을 쥐고 지도부 호위대에 결합해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투쟁을 전개했다. 2월 13일에는 부서 투쟁위원회별로 가족과 단결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노동자 가족이 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나누고 투쟁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강용길 수석부위원장 부인이 ‘골리앗 전사들에게’라고 쓴 편지에는 당시 가족들의 지지와 지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드러나 있다.
104일간의 긴 투쟁 끝에 1991년 2월 14일 오전 9시경에 잠정합의안이 도출됐다. 2월 18일 대의원대회에서 심의한 후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을 묻는 임시총회가 2월 19일 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임시총회에서 재적 조합원 9,957명 중 8,587명(86.3%)이 투표, 5,948명(69.26%) 찬성 으로 잠정합의안이 통과됐다. 2월 20일 10시 25분, 본관 대회의실에서 노사 양측 교섭위원 18명이 참석한 가운데 1990년 단체교섭 조인식을 했다. 이로써 전문을 포함해 124개 조항이 정식 체결됐다.
한편 대우조선노조에 대한 지원을 모색했다는 이유로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 회의’(연대회의) 간부 69명이 ‘제3자개입 위반’으로 불법 연행돼 이 가운데 위원장 7명이 구속됐다. 대우조선노조 상집은 정권과 자본의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항의 표시로 2월 20일부터 23일까지 철야농성을 진행했다. 21일에는 전 조합원이 잔업 거부 투쟁을 벌여 강한 연대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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