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월 6일 서울시로부터 공문이 노조 사무실로 배달되었다.... 청계노조를 즉시 해산을 명한다는 내용이었다....1월 21일 합수부 보안대 요원들과 경찰, 헌병이 일제히 노조 사무실에 들이 닥쳐 '청계노조의 해산을 재차 명한다'고 하며 회계장부와 예금통장을 압수해 갔다. 그리고 이튿날 수백여 명의 경찰이 평화시장을 에워싸 간부들의 사무실 출입을 막고 노조의 모든 재산을 끌어내고 사무실 문에 못질을 해버렸다.
1981년 1월, 청계피복노조 강제 해산에 항의하다, 아프리 점거 투쟁
김 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해산 명령
신군부 집권이후 한국노총에 정화위원회란 어용기구를 설치하여 노조의 실태를 파악했고, 청계노조는 정화지침의 제1순위 대상이었다. 한국노총 정화위원회가 9.9투쟁 주동자 해임, 이소선에 대한 월급지급 중지 등을 명령하자 청계노조는 이를 거부하고 버티고자 했다. 이후 이소선이 구속되고 가을까지는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민주노조들에 대한 조사가 끝난 12월 8일에 보안사 군인, 헌병대, 경찰 등이 들이닥쳐 임현재, 이승철, 민종덕, 전태삼, 신순애 등 상근간부들을 국군보안대로 연행했다. 당시 연행은 노동운동의 흐름과 상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한 보안대의 정보수집 차원이었기 때문에, 간부 8인 가운데 4인은 1주일만에 석방되었고, 나머지 4명도 2주일 동안 보안대 지하실에서 지내다가 석방되었다.
마침내 1981년 1월 6일 서울시로부터 공문이 노조 사무실로 배달되었다. 그 내용은 서울시장인 박영수 명의로, 행정관청은 노조가 공익을 해할 위험이 인정되는 경우 노동위원회 의결을 얻어 해산을 명할 수 있다는 노동조합법 32조를 들어,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청계노조를 즉시 해산을 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집행부는 13일에 서울시장 앞으로 질의서를 보냈으나 이미 해산된 노조의 질의에 대해 답변할 필요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집행부는 매일 출근했지만, 1월 21일 합수부 보안대 요원들과 경찰, 헌병이 일제히 노조 사무실에 들이 닥쳐 '청계노조의 해산을 재차 명한다'고 하며 회계장부와 예금통장을 압수해 갔다. 그리고 이튿날 수백여 명의 경찰이 평화시장을 에워싸 간부들의 사무실 출입을 막고 노조의 모든 재산을 끌어내고 사무실 문에 못질을 해버렸다.
노조 해산이 현실화되자 조합원들은 그냥 앉아서 당할 수만 없다고 논의를 해 보았지만 대안이 없었다. 해산명령이 내려지자 얼마 전 석방된 이소선은 70년 전태일이 죽었을 때 누구보다 먼저 창동집까지 찾아와 간절히 기도를 해주었던 함석헌을 찾아가 상의를 했으나, "도리가 없지요"란 말 뿐이었다. 당시 노조 책임자였던 임현재와 이승철도 노조 해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 와중에 최종인, 임현재, 이승철 그리고 전 지부장 양승조 등이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이승철이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이하 아프리) 사무실 농성을 처음 제안했다. 1월 30일 오후 4시경에 아프리 본부장 모리스 파라디노가 한국에 와서 지부장과 면담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성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당시 현직 지부장이었던 임현재는 농성을 통해 지도부가 구속이 될 경우 청계노조 조합원들을 누가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차라리 외부에서 노조 조직 재건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니냐는 문제제기였다.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임현재, 이승철 그리고 최종인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이문동에 있던 조합원 신순애 방에서 전체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투쟁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누구 하나 누가 어떻게 하자는 말을 하진 못했다. 얼마 전 군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지 얼마 안되는 간부들도 두려움을 지닌 상태였다. 신순애 방에서 2차례, 창동 집에서 3차례에 걸쳐 진행된 집행부 회의는 논쟁만을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이미 내려진 해산명령에 맞서 투쟁한다고 해도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는 패배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청계피복노조 1차년도 대의원대회 모습 =사진 경향신문>
2. 아프리 농성을 결의하다
격론 끝에 결론을 내리지 못한 집행부와 달리 민종덕, 황만호, 신광용 등은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행부와 별도로 논의를 한 결과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농성에 어떻게 사람들을 참여시키느냐가 문제였다. 당시 노조의 조건상 소수가 농성을 하는 방법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들은 농성 장소를 물색하다가 아프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당시 어디서 농성을 한다고 해도 몇 분만에 강제로 해산 당할 것이 분명했으며, 그럴 경우 노조 해산명령의 부당성을 폭로하지 못한 채 조합원 구속 등 조직적 피해만 당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프리 같은 외국기관에 가서 외국인과 함께 농성을 한다면 외국기관이기 때문에 쉽게 공권력을 투입하지 못할 것이며 외국인과 함께 있으면 폭력행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느 정도 농성투쟁시간이 확보된다면 외신에 투쟁 사실이 보도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이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고자 했던 아프리는 미국 노총이 아시아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기구로, 70년대 청계노조가 어려울 때마다 금전적, 정치적 압력 수단으로 청계피복노조에 도움을 주기도 했고 노동교실 기자재를 지원받기도 했다. 과거 많은 도움을 주었던 기구를 점거농성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존재했다. 그러나 아프리는 노조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노동운동 등 민중운동의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는, 심지어 배후에 CIA가 있지 않느냐는 의혹도 있었다.
모리스 파라디노가 한국에 온다는 것을 탐지한 날이 1월 28일이었기 때문에 농성을 준비하는 데 남은 시간은 48시간 남짓이었다. 농성투쟁을 주도하기로 했던 세 사람들은 평화시장 주위 다방들을 전전하면서 회합을 갖고 김영대, 신순애, 박계현, 김성민, 서재덕, 김선주, 김한영 등을 만나 농성에 참여하기로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월 29일에는 구체적인 농성방법과 역할분담을 하고 미리 노조사무실에서 타자기와 등사기 등을 조합원 자취방으로 빼돌린 민종덕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커튼과 담요로 문을 겹겹이 가리고 농성 때 필요한 '호소문' '청계피복노조 해산명령을 철회하라' '성명서' 등을 만들었다. 당시 만들었던 '호소문'은 청계피복노조를 비롯한 민주노동운동이 어떻게 탄압 받고 있으며 앞으로 어떠한 탄압이 자행할 것인가를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80년대 중반 청계노조는 노조 합법화를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사진=성공회대노동사연구소>
3. 1981년 1월 30일, 아프리 농성과 해산
마침내 1월 30일 오후 2시 30분경부터 을지로 6가 계림극장 주변에 있는 금용다방, 은성다방, 돌체다방 등에 조합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약속했던 40명의 절반 정도인 22명의 조합원이 모였다. 그 가운데는 23살 안팎의 여성조합원들도 있었고, 다방으로 나온 절반 가량은 김영대가 이끌던 탈춤반 소속으로 경찰이나 군인들의 폭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린 여성들도 여러 명 있었다.
세 군데 다방에 흩어져 있던 조합원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 버스를 타고 오후 4시 30분까지 강남구 서초동 63의 23호 아프리가 입주해있는 건물 앞에 모였다. 전체가 모인 것을 확인하고 일시에 "가자!"라는 신호와 함께 일시에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갑자기 노동자들이 몰려들어오자 아프리 사무소의 직원들은 당황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프리 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조합원들은 모리스 파라디노를 찾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지부장이나 모리스 파라디노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외국인은 한국사무소장인 죠지커틴뿐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농성자들은 최광석의 통역아래 죠지 커틴한테 파라디노를 면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죠지커틴은 파라디노의 바쁜 일정 때문에 면담일자를 정하여 통고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조합원들은 나중에야 파라디노 일행이 공항에서 입국이 늦어져 아직 도학하지 않았고, 사무실이 점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일정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조합원들은 대신 죠지커틴을 붙잡고 농성을 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는 노동교실 개관식이나 주요 행사 때마다 조합에 찾아온 낯이 익은 인물이었다. 그는 외국인 가운데 누구보다 청계천 노동자들의 현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계속 함께 해주기를 원하라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그는 사무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때부터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는 죠지커틴과 이를 막으려는 조합원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몸싸움 와중에 신광용이 경찰이 진압해 올 때 위협하기 위한 주동자들 몰래 가져온 날카로운 재단용 칼을 꺼내들면서, "죽고 싶으면 나가!"라고 위협했다. 그제서야 죠지커틴은 현실을 인정하고 소장실에 앉았다.
신광용이 죠지커틴을 붙잡고 있는 동안 조합원들은 아프리사무소 여직원들을 내보내고,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읽어주면서 통역에게 그 내용을 조지커틴에게 통역하게 하는 등 본격적인 농성체제로 돌입했다. 한편으로 사무실 출입문 2군데에 책상, 의자, 케비넷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그리고 사무실에 걸려있는 족자를 떼어서 뒷면에, "청계노조 원상복귀시켜라"는 내용의 플랭카드를 제작해서 창에 걸었다. 다른 한편 조합원들이 농성을 준비하던 그 시각에 임현재와 이승철은 각각 농성장으로부터 조합원의 전화를 받고 강남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농성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인근 골목은 전투 경찰로 가득차 있었다. 경찰을 헤치고 아프리 사무실 앞에 가자 창문에 서서 구호를 외치는 어린 여성 조합원들이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조합원들을 향해 뛰어내리지 말라고 외치다 함께 있던 이소선과 더불어 연행되었다.
밤 9시경이 되자 경찰은 건물 주위를 새까맣게 포위했다. 경찰이 농성장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바리케이트로 출입구가 막혀있어 진입이 쉽지 않았다. 강남 경찰서장은 메가폰으로 계속해서 해산을 종용했지만 농성은 계속되었다. 경찰은 건물 주위에 그물망을 치고 출입문을 뜯고 농성장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자 부러진 책상다리를 휘두르고 기물을 던지며 조지커틴이 있는 소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신광용은 난방용 석유통에서 석유를 소장실 바닥에 뿌리며, "경찰이 들어오면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했다. 이처럼 강경하게 조합원들이 대응하자 경찰측도 조지커틴의 안전을 고려해서인지 더 이상 진압을 하러 들어오지는 않았다.
긴장 속에 시간은 흘러갔다. 자정 무렵 사무실 벽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벽이 통째로 넘어졌다. 벽 전체가 하나로 된 조립식 칸막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경찰은 소방차 사다리에서 물줄기를 뿜으며 진압을 위해 들어왔다. 경찰과 노동자 간에 비명과 고함, 욕설,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뒤섞여 농성장에서 싸움이 진행되었지만, 몸이 뒤로 날아가 버리도록 거센 소방 호스 물줄기와 최루탄가스에 노동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전태삼과 신광용이 목숨을 걸고 3층에서 떨어졌다. 전태삼은 경찰이 쳐놓은 그물망으로 떨어져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신광용은 맨땅으로 떨어져 크게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날 사무실 안팎에서 연행된 25명 가운데 총 12명이 구속되었다. 신광용은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을, 임현재, 이승철, 황만호 등은 징역 1년에서 3년을, 그 외 농성 참가 조합원들은 구류 15일에 쳐해졌다.
결국 청계노조의 아프리 농성은 애초 계획했던 대로 국제적으로 전두환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을 널리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군부가 청계노조 해산을 번복할 리는 없었다. 청계노조를 재건하는 숙제는 감옥 밖에 남겨진 조합원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조합을 재조직하려고 해도 사람이 없었다. 아프리 점거 직후 물품을 사러 빠져나왔다가 경찰이 농성장을 봉쇄하자 전국에 지명수배되었던 민종덕은 지방과 인천 등지로 도피했다가 청계노조와 연락이 두절되었고 다른 활동가들도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잠적했으며, 70년대 여성 활동가들도 결혼 이후 주부가 되어 활동에 결합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프리 농성에서 구류를 살고 나온 조합원들도 처음 겪은 공권력에 대한 공포 속에서 떠나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아프리 농성 투쟁이라는 결사적인 농성에도 불구하고 1981년 1월은 80년 광주의 국가폭력이 민주노조 운동에게도 불어닥친 '결빙의 계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