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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5월 전국총파업투쟁(1990년 5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0-05-01 조회 271

19905월 전국총파업투쟁

 

1990년 전국총파업투쟁의 요구사항과 참가 현황

전국 총파업 투쟁의 요구는 크게 전노협 사수, 노동운동 탄압분쇄, 구속자 석방 등을 포함한 노동운동 탄압중지와 민자당 해체, 노태우 정권 퇴진 등의 정치적 요구, 그리고 물가폭등, 집값 및 전세금 안정 등 경제개혁 관련 요구들로 이루어졌다.

울산, 마창, 부산에서부터 5151개 노조 109천여 명이 참여하면서 시작한 전국 총파업은 53일부터 수도권이 참여하면서 77개 노조 10만여 명, 54145개 노조 12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투쟁을 전개, 비로소 전국적인 투쟁 전선을 형성했다. 전국총파업투쟁은 51, 3, 4일에 집중됐고 참여 노조는 312, 조합원 수는 34만 명이다. 참여형태는 영남권의 경우 전면파업이, 수도권과 중부호남권의 경우에는 총회, 집단휴가, 오후파업 등의 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경남권과 수도권 일부를 제외하고 여타 지역은 총파업 투쟁에 대한 참여가 저조하고 파업 자체도 국지적, 한시적 성격을 띠었다.

  

1990년 전국총파업투쟁의 성격과 방향

19905월 전국총파업은 당시 노동조합운동에 가해지는 탄압을 뚫고 노동조합운동이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분수령이자 전노협의 사활을 건 투쟁이었다. 자발적인 단위사업장의 파업을 전국으로 결집해 나가는 자생적인 파업이 아니라, 1987년 이래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적 노동조합들이 전국적으로 통일된 요구를 걸고 투쟁을 전개하는 조직적 연대파업이었다. 구속자 석방, 노동운동 탄압분쇄, 노동부장관 퇴진 등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대정부투쟁이었다.

투쟁 방향은 첫째, 단위사업장 차원의 대중적 요구와 기존 투쟁 일정을 전국총파업투쟁의 요구와 일정에 최대한 결합하는 것이었다. 둘째, 주택·물가 등 민중 생존 문제를 적극 제기함으로써 전국총파업투쟁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형성하고 민중연대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셋째, 전체 투쟁 전선의 높은 요구와 조합원들의 의식상태를 고려해 노동자의 생존권 및 기본권쟁취투쟁을 바탕으로 한 반민자당 투쟁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1990년 전국총파업투쟁의 목표

주체역량 강화의 측면에서 전국총파업투쟁의 목표는 첫째, 전국노동자의 전투적 투쟁으로 대중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전체 투쟁국면을 수세에서 공세로 반전시키는 것이었다. 둘째, 대공장노조를 전노협의 조직적 주체로 확고히 세워내고, 업종과 중간노조를 파업투쟁 대열로 견인함으로써 전노협의 조직력을 확대·강화하는 것이었다. 셋째, 전국적으로 통일된 요구를 걸고 투쟁 시기를 통일해냄으로써 전노협의 권위와 지도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넷째, 자본과 정권의 탄압을 전국노동자의 연대파업으로 돌파함으로써 노동자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대외적 측면에서 전국총파업투쟁의 목표는 전국노동자의 단결 투쟁으로 생산과정을 마비시킴으로써 노동자 투쟁의 위력을 과시하고 자본가와 정권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둘째, 노동자의 생존권과 기본권에 대한 요구를 바탕으로 범국민적인 반민자당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1990년 전국총파업투쟁 지침

전국총파업투쟁은 1차 지침을 통해 51일 마창과 부산지역의 연대파업을 시작으로 59일 민자당 창당일에 맞춰 집중시켜 진행하기로 했다. 이후 광주항쟁 기념주간 투쟁을 설정해 5월 총파업 성과를 이어내며, 520전국노동자대회를 열어 총파업투쟁의 성과를 재점검하기로 했다.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을 극대화하기 위한 영역별 준비계획도 마련했다.

전노협에서는 전국 총파업에 대한 총괄적 지침 외에 51일 이후 계속되는 투쟁을 지도하는 지침을 내려보내 전국 투쟁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투쟁을 독려했다. 2차 지침은 자본측의 후퇴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아직 파업에 돌입하지 못한 지역은 집단조퇴, 잔업거부, 연월차 휴가 등을 통해 투쟁을 조직하고 오후에는 지역집회를 개최함으로써 지역 분위기를 고양해 나가도록 했다. 또한 3일과 4일 시한부 총파업을 결정한 지역은 5~6일 휴일 공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고 59일까지 투쟁을 연결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게 했다. 민족민주운동 진영 전체적으로 59일 민자당 창당일을 계기로 총력투쟁이 추진되고 있으므로 이에 적극 결합해야 했다.

59일 투쟁과 관련한 3차 지침은 55일 내려졌다. 이 지침에서는 전국총파업투쟁의 현황과 흐름, 향후 주요투쟁 계획이 담겼다. 주요 투쟁계획으로 통일중공업 이영일 열사 전국노동자장, 민자당 창당일 투쟁 계획과 전술기조를 제시했다. 59일 대회는 부문대회를 마친 후 대회장으로 이동, 상징적인 대회를 마치고 가두투쟁을 전개키로 했다.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지원활동

KBS와 현대중공업 파업현장에 노태우 정권이 공권력을 투입하는 등 노동운동 탄압이 극에 달하자 범국민적인 비상대책회의의 필요성이 긴급하게 제안됐다. 곧바로 13개 업종노조(연맹), 전노협, 국민연합, KBS지키기시민모임, 학단협 등이 참가하여 ‘KBS·현대중공업노조 탄압분쇄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를 결성했다. 이에 따라 국민연합이 포괄하지 못한 중간층까지 참여폭이 확대돼 범국민적 투쟁으로의 질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활동과정에서 국민회의가 독립된 기구로 발전을 모색하는 등 사안의 성격과 운동역량에 걸맞지 않은 활동을 전개한다는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한시적이고 한정적인 비상대책회의로 성격을 규정한다.

한편, 512걷기대회에서 경찰의 원천봉쇄에 대안없이 속수무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참가자들에게 패배감을 안겨준 점에 대해서는 강력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KBS 제작거부투쟁과 현대중공업 투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점부터 국민회의존립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잇따랐다. 전노협도 512 걷기대회 계획에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관철하지 못했다. 결국 투쟁의 범국민적 확산이나 업종과의 실질적 연대를 이루어 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1990년 전국총파업투쟁을 가능하게 한 요인들

1987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끊임없이 성장·발전해 온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역량과 그 귀결로서 전노협이 출범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을 가능하게 한 첫 번째 요인이다. 노동자대투쟁 이래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노동조합이 새롭게 결성됨에 따라 양적 발전을 이루었고, 나아가 그 이전의 노동조합과는 질적으로 뚜렷이 구별되어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지향점을 분명히 했다. 1987년 말 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지역·업종별 협의회를 속속 건설, 이를 토대로 공동투쟁과 공동활동을 강화하여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그리고 지역과 업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90122일 전노협을 결성, 출범한 지 불과 100여 일 만에 전국 총파업 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된 것이다.

전국총파업투쟁은 또한 민주노조의 상징이자 투쟁의 구심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미 현총련과 마창노련, 서노협은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 시 연대파업에 돌입하겠다는 사전결의를 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전노협이라는 전국조직이 있었고, 전노협 중앙위원회에서 총파업을 선언하고 조직함에 따라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시켜낼 수 있었다.

공동투쟁의 필연성이 증가했다는 점도 큰 요인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의 민주노조가 탄압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51절 투쟁과 임금인상 투쟁 등 대중투쟁이 준비되고 있었다. 1989년 하반기부터 경기침체=노동자 책임을 앞세우고 몰아닥친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일반화된 탄압이 5월 총파업 투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무노동무임금, 업무조사, 구속수배, 경단협 지침, 상공부 노동법 개악기도 등 정권과 자본가들의 탄압에도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민주노조들은 공동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여론지지기반도 확보돼 있었다. 현대중공업 2만여 명의 노동자는 부당하게 구속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했고, 전노협은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노태우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에 맞서 전개된 KBS 방송민주화 투쟁 역시 일반 국민의 묵시적 동의를 불러왔다. KBS의 방송민주화 투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데 대한 대중적 반발이, 이른바 중산층까지도 5월 총파업을 지지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됐다. 또한 민자당 출범 이후 일반 국민 사이에 팽배해진 실망감과 염증도 노동자투쟁을 지지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전월세와 물가 폭등 때문에 날로 가중되는 일반 국민의 생활난이었다. 더구나 안정 희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증권 투자자들마저 주가 폭락이 계속됨에 따라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은 여러모로 총파업 투쟁을 유리하게 헸다.

 

1990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의 성과

40년 만의 전국 총파업 투쟁 그 자체로서의 성과가 있었다.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에 맞서 전국총파업투쟁을 수행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럼에도 5월 전국총파업투쟁의 성과 중 첫 번째로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수행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꼽는 것은 노동자는 하나라는 강고한 연대의식과 조직력, 투쟁력이 뒷받침될 때만이 가능한 노동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100여 년에 걸친 우리나라 노동운동사 속에서 전국적 총파업은 해방 직후인 19469월 총파업과 1947년의 3월 총파업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려 40여 년 만에 다시 전국적 총파업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결국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

또한 전국총파업을 계기로 투쟁력과 노동자 의식이 성장했다는 점도 큰 성과다. 총파업투쟁은 수많은 노동자가 자신감을 회복하고 투쟁 의지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고 노동자 의식의 성장과 강화에 기여했다. 현대중공업노조의 파업투쟁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여 지역과 산업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292개 노조, 연인원 30여만 명이 동일한 요구를 내걸고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속에서 노동자는 하나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나아가 투쟁의 성격이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선 노동자의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운동 탄압하는 민자당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전국의 사업장과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는 점에서, ‘노동해방! 인간해방!’이라는 노동운동의 궁극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싸워야 할 상대를 뚜렷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계기가 됐다. 정부의 온갖 탄압과 경제단체협의회의 지침을 앞세운 자본가들의 담합으로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러나 5월 총파업 투쟁으로 자본가들의 담합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며 가두로 진출하는 노동자들을 붙잡고 제발 지금 당장이라도 교섭하자면서 교섭을 애걸하는 자본가들이 늘어났고, 자기 사업장에도 총파업 투쟁의 물결이 밀려올 것을 우려한 자본가들이 노동조합의 요구를 거의 100% 받아들이는 선에서 서둘러 교섭을 타결짓는 모습 또한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국총파업투쟁은 전체 민중운동의 대중투쟁을 활성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5월 총파업 투쟁 이전의 탄압은 노동조합운동에 집중적으로 가해진 것임에 틀림없지만 단지 노동조합운동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전체 국민의 생활과 권리를 억압하고 민족민주운동을 잠재우기 위한 포석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5월 총파업 투쟁을 통해 전체 민족민주운동이 빠른 속도로 자신감을 회복했고, 투쟁 의지를 강화했다. 그 결과 59일에는 많은 학생과 시민이 운집하여 6월 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집회와 가두시위를 조직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동안의 탄압 일변도의 정세는 다소 유화되었고, 학생을 비롯한 민중들의 대중투쟁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성과는 전노협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구심으로 우뚝 섰다는 점이다. 전노협은 탈퇴사업장이 생겨나기도 했고 많은 노동자가 구속·수배되는 등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전노협을 끊임없이 매도했으며, 일부 어용노조 간부들은 전노협을 음해하고 왜곡했다. 그러나 전노협은 이 땅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구심이며, 결코 일부 언론과 어용노조 간부들의 왜곡과 바람대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그런 호락호락한 조직이 아님을 입증해 냈다.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은 전노협 가입·참관노조들에 대한 전면적 탄압이기도 했다. 따라서 전노협 산하 노동조합들은 정권의 폭압에 맞서 총파업 투쟁으로 온 몸을 던져 싸웠다. 그러므로 전국의 사업장과 거리에서, 골리앗에서 현대중공업 경찰난입 규탄과 더불어 사수! 전노협이 외쳐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노협은 1990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을 통해 전노협이야말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구심이자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정통성을 계승한 조직이며, 전체 노동대중과 더불어 노동자의 한숨과 고통을 씻어 버리기 위해 투쟁해 나가는 조직임을 입증한 것이다.

 

1990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의 한계

집중력의 부족이다. 총파업투쟁이 그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범국민적 투쟁이 예고되던 민자당 창당일 즉, 59일을 투쟁의 결정점으로 삼아 파업투쟁의 파고를 최대한 높여야만 했다. 그러나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은 54일을 기점으로 사실상 종결됐다. 그 결과 범국민적 투쟁이 예고되고 이영일 열사의 장례일이기도 한 59일에는 오히려 힘 있는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지역·사업장별 투쟁력 편차가 두드러졌다.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하고 파업투쟁을 전개한 지역과 사업장이 있는가 하면 단체행동 하나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지역과 사업장 또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총파업 투쟁을 선언할 때 충분히 예상했던 사실이며, 지역과 조직은 스스로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의 한계도 분명했다. 5월 총파업 투쟁의 주체인 전노협 또한 기업별 노동조합의 협의체이자 출범한 지 겨우 백여 일밖에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운동은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기업별 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공동투쟁과 공동활동의 전개를 통한 기업별 노조의 한계극복과 산업별 노조로의 발전을 과제로 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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