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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준비 제5호] 이달의 노동자역사
1987년 8월, 이석규 그리고 1993년 여름
글 : 김 원 (한내 연구위원) / 사진 : 성공회대 사이버NGO역사자료관, 대우조선노조 홈페이지 사진자료실
지금부터 15년 전, 나는 스물 세살이었다. 막 학부시절을 마친 대학원 석사 1학기였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서울노동정책연구소라는 연구소가 있었다. 처음 노동문제에 대한 다소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 그때였다. 연남동 한 구석에서 세미나를 하다가 어느날 당시 전노협 교육국에서 현장조사를 같이 하자는 이야기가 연구소에 들어왔다. 대학 시절 당시 유행하던 서태지의 노랫말처럼 ‘환상 속의 그대’처럼만 느끼던 현장 노동자를 볼 수 있게 된 기회가 왔던 것이다. 당시 전노협 교육국의 김진순 국장과 박성희 실장 그리고 지금은 문경에 내려가 있는 고경임 선배와 함께 아무 것도 모른 채 거제도로 가게 되었다. 당시 연구소에서는 신경영전략의 일환으로 기업문화를 통한 노동자들의 ‘기업종속형 주체화’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던 때였다. 하지만 논문으로 읽은 내용보다 내 머릿 속에 떠오른 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시 이석규 열사의 죽음에 맞서 싸우던 ‘전투적 노동자계급’, 바로 그 모습이었다.

배멀미를 하며 도착한 거제도. 그리고 대우조선은 커다란 괴물, 섬 위에 떠있는 로봇 같았다. 그때는 사진을 찍어두지 못했지만, 높디 높은 조선소 위를 바라보며 나는 시골 촌놈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대우조선은 당시 대공장 민주노조의 핵심 사업장으로 알려졌고, 그만큼 기대도 많았다. 당시 심경을 빌자면, “거제도에 버려져서 일주일동안 나오지 못하는” 상태로 더운 여름날 대우조선과 그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 노조 활동가의 숙소에 거처를 정하고, 낮에는 조합 사무실에서 인터뷰와 관련 자료를 정신없이 복사하고, 저녁에는 주변 술자리를 찾아다니면서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가 경험했던 첫 인터뷰였다.
다른 글에서도 한번 밝힌 적이 있지만, 그 당시 대우조선을 방문했을 때 나의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대학시절 골리앗 투쟁이나 남성노동자들이 공권력에 맞서서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했던 비디오나 사진을 보며 자라온 세대였다. ‘노동자=전투성’이란 등식이 내 머리 속에 정확하게 입력된 상태였다. 하지만 거제도에서 내가 봤던 조합원들의 모습은 달랐다. 민주노조는 점차 현장권력을 침식당하고 있고, 적극적인 집단행동보다 무임승차를 선호하는 경향이 보였으며 쓰린 가슴에 찬소주를 붇는다기 보다, 시원한 생맥주를 즐겼다. 또 다물교육, 생산성 향상 교육 등 기업문화에 의해 의식이 점점 변화해 가고 있었다. 나는 그해 거제도에서 여름을 보낸 뒤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일까?

87년 대우조선에는 이석규 열사가 존재했다. 93년에 그들도 그의 이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76년 대한조선공사를 대우그룹이 인수한 뒤, 대우조선은 생산물량 증대로 인한 노동자 수 증가로 85년에는 3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85년 직후 세계 조선산업의 경기 불황과 과잉중복 투자 등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대량해고가 이루어져, 87년 투쟁 직전인 연초에는 1만 5천여명의 노동자만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연초 군입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상고문’이란 유인물을 공장과 기숙사 등지에 돌리면서 노조결성 투쟁이 가시화되었다. 사측이 주도세력을 해고, 부서 이동 등을 시키자 노동자들은 해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노조 결성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4월 20일경부터 네 차례에 걸친 노조 결성을 시도했지만, 사측과 상급 노조의 결탁으로 16명의 해고자만을 남긴 채 일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났다면 87년은 평범한 ‘1987년’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해 8월 8일 30여명의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결성’을 외치며 공장을 돌았고, 이에 합세해서 중장비 기사와 지게차 등이 합세, 시위대는 수 천명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지게차 등을 앞세워 거제도 중심가와 충무 신아 조선까지 진출, 차량시위를 전개한다. 한편 같은 달 11일 비상계획부 2층 사무실에서 40여 명의 부서 대표들이 모여 노조 결성식을 갖고, 오전 10시에 2백여 명의 대표단이 신고필증을 받기 위해 군청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결과, 오후 6시에 노조 신고필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민주노조’의 깃발을 꼿은 것이었다.
하지만 노조의 13개 요구사항에 대한 사측의 불성실한 태도로, 노조는 연일 거제도, 장승포 등지에서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이에 대해 경찰은 12개 중대 1천 5백여 명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동시에, 투쟁에 외부 불순 세력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엄단하겠다고 선언한다. 대우조선 노동자와 국가권력 간의 ‘전면전’이 눈 앞에 놓였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8월 22일,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시위대 3천여 명은 단체교섭이 열리고 있는 ‘거제도관광호텔’ 사거리에 집결하여 호텔 진입을 시도했으나, 그 순간 경찰은 최루탄과 사과탄을 난사하며 진압, 거제도관광호텔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와중에 당시 스물 한 살의 청년 노동자 이석규가 최루탄 파편으로 인한 산소 부족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제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돈도 필요없다, 이석규를 살려내라’는 울분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2주에 걸친 대우조선 민주노조 결성과 이석규 열사의 죽음이다.

93년, 거제도에 내려갔을 때도 조합원들은 그 당시 비디오와 이후 투쟁 현장 비디오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외부에서 사람들이 오면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90년대 초반이후 2007년까지 대우노선은 파업 결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2007년에 16년 만에 파업결의를 했다는 신문기사를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2008년 그들은 산업은행의 일방 매각 반대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15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그때 거제도에서 우리를 조합원들에게 소개해주던 활동가 동지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간 15년이란 시간은 그에게 어떻게 흘러갔을지, 그들에게 15년의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이제 노동운동사 속에서 조금 빗겨나간 그들의 시간을 다시 끄집어야 하지 않는가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87년 이석규 열사의 죽음과 투쟁이 그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93년 거제에서 일주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경험이었다는 것을 그 분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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