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동운동사건
.....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1989년 11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9-11-12 조회 349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

 

시기 : 19891111~ 1112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의 준비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법개정투쟁의 대중적 확산 전노협 건설 일정·사업계획 공식화 및 결의 전노협 건설을 위한 투쟁 대오 구축 전태일 열사 19주기 추모 및 열사 정신 계승 노동자·농민·도시빈민·학생 등 민중들의 연대의식 확산 등 다섯 가지 의의 속에서 계획됐다. 목표는 노동법개정투쟁 열기 확산으로 대중적 투쟁 대오 정비 전노협 건설 계획·일정 알리고 전노협 건설 투쟁 의지 정비 노동법개정 및 전노협 건설을 힘있게 추진할 선봉대 구축 전교조·업종노조협의회 합법성 쟁취투쟁과 결합해 생산직·사무직·교직원노동자 연대의식을 확대·강화로 삼았다.

 

대회 명칭은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철폐 및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로 해서 전국회의가 주관하고 전국노동자대회 조직위원회가 주최했다. 주요 요구는 노동악법 철폐, 전노협 건설, 구속자석방, 노동운동탄압 분쇄전교조 합법성 쟁취, 업종연맹 합법성 쟁취외자도입법, 산업안전보건법, 고용보장법 쟁취였다. 1111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단일 중앙대회로 개최키로 했으며, 연세대와 보라매공원이 불허됨에 따라 서울에서 진행키로 했다.

 

의장단은 각 지노협과 업종협 대표, 전교조 대표, 업종 합법성쟁취 투쟁위원회 대표로 구성하고 상임의장은 단병호 전국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맡았다. 집행위원회는 각 지노협, 업종협, 전교조, 업종 합법성쟁취 투쟁위원회 집행책임자와 대회실무책임자로 구성했다. 대회 일상 준비가 완료되고 각 지노협에서 대회장으로 진입한 이후에는 즉각 단일한 투쟁대오로 편제해 대회운영체계로 전환했다.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치러낸 대회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는 정부의 철저한 봉쇄 속에 진행됐다. 1111일 전야제가 열릴 예정이던 동국대는 당일 새벽부터 봉쇄돼 아침 7시 대회장을 진입하려던 최동식(전국회의 중집위 부위원장) 등 노동자 70여 명이 연행됐다. 수도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야제 장소에 진입하려는 시도는 11일 새벽부터 줄기차게 진행됐다. 마창지역에서 온 노동자들은 봉고차 6대로 정문을 뚫고 대회장 진입에 성공했으며, 대부분 노동자가 담을 넘어 동국대로 집결했다. 지도부가 연행된 공백 속에서도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동국대에 결집해 전야제를 치렀다. 이들은 이후 다른 대오들과 마찬가지로 50여 명씩 짝을 이뤄 본대회가 열리는 서울대로 진입했다.

 

노동자대회를 무산시키기 위한 자본과 국가권력의 철저한 봉쇄는 단위사업장에서부터 시작됐다. 노동자대회 참가를 위한 총회를 무산시키거나, 지도부를 구속하고, 사무실 압수수색을 하는 등 전노협 건설로 이어질 노동자대회에 대한 총체적 저지에 나섰다. 대회가 임박해서는 전세버스 회사에 압력을 넣어 임대 계약을 취소시키고, 서울로 이르는 곳곳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했으며, 역과 터미널에서도 노동자로 보이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소위 갑호비상경계속에서 노동자대회가 강행된 것이다. 전야제가 열린 동국대는 물론이고 서울대는 관악산 전체를 에워싸고 길목마다 백골단을 투입했다.

 

노동자들은 신문광고에 보라매공원으로 공지된 노동자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상경에서부터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과 불충분한 연락체계로 전체 대오를 효과적으로 이동하거나 분산하는 것이 애당초 어려운 상태에서 한번 연락선이 끊기면 대회장으로 집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조직적으로 동원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자들, 전국회의 미가입 사업장 등의 노동자들은 전야제 장소인 동국대를 중심으로 집결할 수밖에 없었다. 본대회장에 진입하지 못한 상경 노동자들과 수도권에서 자발적으로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2일 오후 2시부터 명동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해 오후 4시에는 동대문 일대를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렇게 하여 정부의 강력한 봉쇄에도 서울대에는 4,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 전국노동자대회를 치르고, 전노협 건설 일정을 선포했다.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 선봉대

 

선봉대는 애초 전노협 건설을 위한 선봉대 발대식을 성공적으로 치르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대회보호와 규찰은 주로 학생대오가 전담키로 역할을 나누었다. 그러나 학생대오가 대부분 연락 및 안내조로 배치됨에 따라 선봉대도 규찰과 전투 임무의 상당 부분을 떠맡게 되었다. 더구나 행사당일 새벽 5시부터 전경 병력이 대폭 증강함에 따라 예정된 프로그램을 모두 취소하고 완전 전투태세로 규찰 임무에 돌입했다. 지역별로 도착한 선봉대 총 320여 명을 6대로 나누어 각 대를 60명으로 편성하고, 다시 각 대는 5개 조로 나누어 규찰, 대회보호, 지도부 경호 및 투쟁을 전개했다. 선봉대 대오 중 대구지역을 비롯한 몇 개 지역은 동국대와 가두투쟁으로 분산 배치돼 서울대에 집중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봉대원들은 전국노동자대회를 사수하기 위해 헌신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이전글 한국수미다전기노조의 일본출정 투쟁(1989년 11월)
다음글 최동식의장 구속과 인천지역 총파업(1989년 11월)
목록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