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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택시 완전월급제 쟁취투쟁(1987년 4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4-06 조회 245

서울 택시 완전월급제 쟁취투쟁

  

시기 : 198746~ 410

  

 

완전월급제 투쟁의 시작

 

19874월 서울 택시노동자들의 완전월급제 쟁취투쟁은 지역연대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1984년의 대구와 부산 택시노동자들의 시위·농성투쟁과 함께 택시노동자들의 투쟁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투쟁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413헌법개정반대조치를 발표하고 억압적인 통제를 강화하려던 시점에 터져 나온 2,0004,000여 택시 노동자들의 완전월급제 투쟁은 동조농성, 가두시위, 차량경적 시위로 발전했으며, 이는 198779월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어났던 운수노동자 연대파업의 예고편이었다.

 

서울택시의 임금협상은 전국 각 도시의 택시 임금협정의 현실적인 기준으로 작용해 왔다. 따라서 서울지역의 임금협상은 서울은 물론 전국 택시노동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임금협상에 들어간 서울택시지부는 사업조합측에 업적금제 폐지 완전월급제 실시 월급은 기본급에 수당까지 합쳐 1986년보다 10% 인상된 427,873원을 요구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임금협상은 39일 시작된 후 330일까지 무려 7차례나 거듭되었음에도 업주측의 지연책과 무성의, 그리고 서울택시지부의 미온적인 자세가 결합돼 아무런 성과 없이 시간만 끌었다. 업주측은 업적금제를 폐지하면 기사들이 일을 게을리한다” “성실운전사와 불성실운전사간의 동일한 대우로 동료간의 갈등이 예상되고 성실운전자의 근무의욕이 떨어져 운전자 자신과 회사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며 완전월급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택시기사들은 타코메타가 차마다 설치되어 있어 모든 운행상태를 일일이 감시할 수 있고, 업적금제도가 택시기사들의 불친절, 난폭운전, 과속, 승차거부, 동료간의 분열과 경쟁의 근본원인이며 업주들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사업조합과의 임금협상이 진전이 없자 33040명의 조합장들로 구성된 서울택시지부 운영위원회는 7차에 걸친 임금교섭 진행상황을 보고받고 서울지부 집행부에 대해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한 결연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호된 비판을 가했다. 이광남 지부장을 비롯 지부 집행부는 이 비판을 수용하고 완전월급제 쟁취리본달기, 완전월급제의 내용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유인물 발행을 방침으로 세우는 한편, 46일 서울시내 택시노조 조합장들이 모여 서울택시 지부총회를 열어 행동방침을 결정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46일 오후 2시 서울시내 택시노조 조합장 임시총회가 조합장 148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회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광남 지부장은 완전월급제 투쟁의 고충과 함께 8차까지의 임금교섭 결과를 보고했다. 이에 조합장들은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해 사업조합과 임금교섭위원들로부터 응답이 올 때까지 농성에 들어갈 것을 결정한 후 350분부터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사업주측에서 아무런 응답도 없자 조합장들은 연맹회관에서 잠실 교통회관 회의실까지 행진해갈 것을 결의하고 650분쯤 일제히 건물을 나섰다. 그러나 이때 대기하고 있던 전경들이 최루탄을 터뜨려 2명의 조합장이 부상을 당한 채 병원으로 후송됐고 다른 조합장들은 최루가스가 가득한 건물 안으로 다시 쫓겨 들어갔다. 최루가스로 인해 온 얼굴이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조합장들은 단호한 결의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농성에 돌입하자 신신기업, 덕인택시, 삼도상운, 영진통운 등 많은 노조간부들이 농성중인 조합장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옷과 음식물을 사다 날라 근처 식료품 가게의 빵과 요구르트 등이 바닥이 났다.

 

47일 오후 2시쯤 조합장을 회유·해산시키기 위해 교통부 육상운송국장이 찾아와 완전 월급제를 실시하면 사업주들이 망하니 현재로서는 어렵다. 농성을 풀고 대화로 하자는 등 사업주 편을 드는 발언만 해 조합장들의 야유를 받고 쫓겨났다.

 

한편 노조간부와 조합원들은 오후 5시쯤 회관을 중심으로 700여 명이 집결해 완전 월급제쟁취” “최저생계비 보장등의 구호를 외치고 진짜 노동자’ ‘나빠졌네 나빠졌어’ ‘흔들리지 않게등의 노래를 부르며 대기하고 있다가 거리로 나가자는 외침을 신호로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이미 대기하고 있던 경찰버스 9대 병력의 전경들이 이들을 완전히 에워싸 대치상태에 들어갔으며 강남경찰서장은 7시쯤 이광남 지부장과 만나 아프리카 모 대통령 방한운운하며 해산시킬 것을 종용했다. 이 지부장은 이를 수락하고 조합원들에게 해산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조합원들은 내일 다시 모이자는 구호를 외치고 승차해 엔진을 조작, 폭음을 내면서 해산했다.

 

가두투쟁

 

택시 노동자들의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져 48일에도 오후 4시쯤부터 택시 노동자들이 연맹회관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편 경찰은 연맹회관 부근 골목마다 전경 1,000여 명을 배치해 막고 있었다. 오후 5시쯤 700여 명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은 회관 앞에서 연좌농성에 돌입하여 진짜사나이’ ‘나빠졌네 나빠졌어등의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쳤다.

 

노동자들은 전경들이 연좌농성을 진압하기 위해 방독면과 마스크를 착용하자 ~”하며 야유를 퍼붓고 테헤란로 쪽을 향해 2,000여 명이 이동하기 시작해 도로를 완전히 점거하고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전경들이 진압을 위해 다가오자, 1,000여 명은 550분쯤 스크럼을 짜고 테헤란로를 따라 으샤 으샤하는 함성을 외치며 역삼역까지 행진했다. 

 

이때 단식농성중인 조합장 50여 명이 옥상으로 올라가 시위기사들을 향해 완전월급제 쟁취하자” “최저생계비 보장하라고 외치자 노동자들은 따라 외치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기사들은 6시쯤 역삼역 4거리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이다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와 남아있던 노동자들과 합류해 2,000여 명은 다시 잠실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전경들이 최루탄 100여 발을 난사하자 이들은 양쪽 골목으로 흩어졌다가 630분쯤 500600여 명이 연맹회관 골목에 다시 모여 간간히 완전월급제 쟁취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후 7시쯤 강남역 4거리에 집결, 시위를 벌였으나 곧 출동한 경찰에 강제 해산됐고 이날만 대략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행됐다.

 

49일 오후 5시쯤 택시노동자들은 교대시간에 맞춰 다시 연맹회관 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이 헬멧을 쓴 사복경찰을 동원, 시위가 대규모로 번지지 않도록 노동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무조건 연행하기 시작하자 오후 620분쯤 몸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우리도 차를 무기삼아 큰길로 나가자고 결의하고 일제히 차에 올라 차량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연맹회관 부근을 빙글빙글 돌면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과 폭음을 터뜨렸다. 오후 7시쯤 강남역 쪽으로 진출하자 강남역 부근은 교통이 막히고 경적소리 및 폭음소리로 가득찼다. 경찰은 차량시위가 계속되자 제3한강교(한남대교) 앞에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시위 노동자들을 연행했지만 이들은 바리케이드를 뚫고 을지로, 광화문 등 시내 중심가를 돌며 차량시위를 계속했다. 경찰은 이날 542명을 강제 연행했다

 

투쟁지도부의 타협

 

택시노동자들의 차량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49일 오후 820분쯤 조합장 총회를 개최해 업주측이 제시한 기본급 인상안과 완전월급제 실시안을 투표에 붙였다. 투표에서 9041로 완전월급제 실시안이 채택됐고 조합장들은 업적금을 철폐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사태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조합장들에게 공갈협박을 가하기 시작해 교통부 육운국장, 서울시 교통국장, 노동부 노정국장, 안기부 등의 기관원들이 밤 12시쯤 농성자 대표 7명과 회의를 한다는 미명하에 지금 서울 시내가 발칵 뒤집혀 있다. 이 모든 책임은 농성을 주도한 조합장들이 져야 한다” “모두 다 잡아 넣겠다” “500여 명이 연행되어 있다. 농성을 해산하지 않으면 연행자 전원을 구속시킬 방침이다는 등의 협박을 가했다. 이들이 농성 대표들의 기세를 꺾은 후 새벽 4시쯤 서울택시사업조합 이사장인 이광열을 데려다 합의를 강요하자 위협에 굴복한 지도부들은 기만적으로 타협하고 말았다. 합의내용은 현행 업적금제는 개선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공동 노력 1987년 임금협정부터 노사간 업적금 배분비율 중 노동자분을 점차 하향 조정 등이다.

 

강압에 의해 조합장들은 완전월급제를 포기하고 410일 오전 730분쯤 농성을 해산하면서 앞으로 완전월급제 주장이 관철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경찰은 농성해산 전에 농성 및 시위 관련 연행자 중 용공혐의가 없는 한 전원 석방할 것을 약속했음에도 11일 서울통운의 김호성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하고 9명은 불구속입건, 22명을 구류 처분했다. 또한 교통부는 49일 오후 소집된 전국 6대 도시 택시조합 이사장 회의에서 택시기사들의 요구사항인 업적금제 폐지는 행정당국에서 정하는 정책이므로 노사협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혀 택시기사들의 요구를 외면했다. 업주측은 정부의 지원에 한층 더 기세가 등등해져 41412차 임금협정에서 현행 업적금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기본급 3%(5,688)를 인상하겠다며 종전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럼에도 서울택시지부측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미온적으로 대응, 사업조합과 적당히 비밀협상을 하려한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조합장들의 농성해산 후 사업조합이 합의한 약속을 위배하고 있는데도 당국은 모른 채 하며 혹시나 또 다시 조합장들이 모여 항의농성을 벌이거나 택시노동자들이 단결된 행동을 할까봐 지레 겁을 먹고 엄중한 감시를 펼쳤다. 서울 택시지부 집행부측에 압력과 회유책을 쓰며 422일 택시조합장들이 받도록 되어 있던 연맹 교육마저 불법집회로 규정하여 무기한 연기토록 하는 등 부당한 개입을 계속했다. 마침내 정부측은 422일부터 잠실 교통회관 회의실에 택시지부측의 임금교섭위원들을 강제로 감금시켜 놓은 상태에서 임금교섭을 425일까지 완료하도록 강요했다. , 택시노조 조합장들이나 서울 택시노동자들과 연락을 차단하고 서로 협의와 협조를 할 수 없도록 고립시켜 놓은 상태에서 무조건 버티기와 회유작전으로만 나오는 사업조합측과 협상에 응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당국은 이러한 공포와 회유 분위기를 조성하여 사업조합측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옹호했던 것이다.

 

한편, 택시지부 집행부 역시 거의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기만을 계속했다.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조합장 총회소집을 기피했고, 임금교섭 과정도 공개하지 않았다. 단위노조와 노동자들도 임금교섭위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지켜볼 뿐이었다. 결국 투쟁 이후 강력한 대응의 실패와 교섭위원들의 위축으로 425일 현행 임금제도 하에서 월급을 5.4%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기본급은 189,600원에서 201,000원으로 인상돼 승무수당 등 각종 수당까지 합쳐 급여총액은 월 267,236원에서 281,591원으로 14,335원 인상됨으로써 투쟁의 막이 내려졌다.

⦁ 참고자료 운수노보, <운전기사와 민주노조> (돌베개,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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