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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TND노조의 일본출정 투쟁
시기 : 1989년 12월 9일 ~ 1990년 3월 6일
한국TND의 폐업
타나신전기는 녹음기를 조립하는 전문회사로 본사는 동경에 있었고, 종업원은 983명에 자본금 약 5,000만 엔(약 3억 원), 사장은 다나까(田中進作)였다. 한국을 비롯 홍콩(110명), 대만에 3개사(1,680명), 말레이시아(800명) 등 주로 저임금이 가능한 아시아 지역에 자회사나 관련 회사를 두고 제품을 생산했다.
타나신전기는 1975년 4월 군포시에 자본금 1억 4,000만 원, 종업원 140명으로 녹음기를 제조하기 위해 한국TND를 설립했다. 자본은 형식적으로 한국에서 51%, 일본에서 49% 출자하는 형식이었지만 원재료와 기술은 100%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다.
한국TND는 설립 이후 매년 매출액이 배 이상 늘어나는 성장을 거듭했으며 1988년에는 매출액이 673억 원에 도달했고 국내시장의 60~70%를 점유했고, 1987년에는 TND의 3배 규모로 제2공장인 AV코리아를 설립했다. 이러한 성장에 밑바탕이 된 것은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었다.
1980년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회사는 부당전출, 해고, 기숙사 추방을 일삼고 다른 노조와 연대를 방해하는 등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노조는 이러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으며, 힘을 강화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1988년 4월에는 회사측에서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노무관리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집행부에 대한 비판과 고소·고발을 남발했으며, 임금교섭도 난항을 겪었다. 같은 해 10월에 시작된 단체협약 교섭 과정에서는 회사가 세 차례에 걸쳐 기계 반출을 시도하고 구사대를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는 속에서도 최초로 25일간 파업투쟁을 전개해, 노조탄압을 주도해온 총무과장 등을 축출하고 주 44시간 노동과 상여금 630%를 쟁취했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한국TND노조는 전노협 산하 경기노련의 중심적인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1989년 4월부터 시작된 임금인상 투쟁은 경영자료 제출 거부나 교섭해태 등 회사측의 불성실한 태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6월에는 제2공장인 AV코리아를 “적자 때문에 매각하며 AV코리아와 TND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발표 이후 일방적으로 250명의 희망퇴직자를 모집하고 1988년 단체협약갱신 투쟁 과정에서 추방했던 노무관리 담당자들을 복직시켰다. 이어 회사해산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노동조합은 6개월가량 끌던 임금인상을 회사 안대로 타결하고, 이어 폐업에 관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10월 6일 회사에 단체협약 갱신요구안을 발송했다.
그러나 10월 18일 새벽 4시,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회사 안에 “10월 13일 주주총회의 결의에 따라 회사를 해산한다. 30일까지 조흥은행에서 퇴직금과 임금을 지급할 것이다. 30일 이후에는 기숙사를 폐쇄하고 전 종업원의 공장 출입을 금지한다”는 게시물이 부착되었다. 물론 책임자인 일본인 부사장과 공장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폐업철회 투쟁 TND노조는 회사의 일방적인 해산 통고에 맞서 곧바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3일 후에는 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500여 명이 TND 위장폐업 규탄대회를 개최했고, 10월 27일에는 경기노련 주최로 규탄대회를 열어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1,000명 이상이 참여해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외자기업의 부당한 철수와 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던 9개 노조와 함께 11월 3일 ‘외국자본 부당철수, 집단해고 등 노조탄압 분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공투위는 정부의 외자기업에 대한 법적 규제, 마창노련 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11월 7일부터 18일까지 민주당과 평민당 중앙당사에서 농성을 벌였고 10월 27일부터 11월 1일까지는 일본대사관에서 항의 연좌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2월 3일 오후 2시 30분에 전투경찰 650여 명과 구사대 20명이 기습적으로 노동자들이 농성하고 있던 공장을 기습해 김분종 위원장과 조합원 18명을 연행해, 이후 김 위원장은 구속됐다. 같은 날 오후 6시경에는 누군가의 방화로 기숙사 1개 동이 전소됐으며 기계와 제품은 AV코리아로 옮겨졌다. 이후 70여 명의 조합원이 매일같이 가두선전 등 투쟁을 전개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마침내 12월 9일 일본 출정투쟁을 결정했다.
일본 출정투쟁과 합의
TND노조의 일본 출정투쟁 대표단은 김혜순 위원장 직무대행 등 4명의 여성으로 꾸려졌다. 농성 중인 조합원 대부분이 30대 후반의 주부조합원이었던 데 비해 이들은 22~27세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회사에 대해 △다나까 사장이 위장폐업 사태 책임지고 한국에서 교섭에 응할 것 △AV코리아 매각 의혹 해명 △회사의 경영실태 자료 공개 △450명 해고 철회 및 회사 정상화 △구속된 김 위원장 석방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12월 12일 타나신전기와 가진 1차 교섭에 출석한 총무차장은 “우리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없다”며 문제를 회피했다. 12월 15일 2차 교섭에서는 TND 청산인 이성종이 돌연 출석해 “회사는 합법적으로 해산했으므로 더이상 노조는 없다”며 노동조합의 교섭자격을 부정하더니 이후 “일체의 교섭에 응하지 않겠다”는 팩스를 보내왔다.
이에 노조와 지원단체들은 다나까 사장과 다이나신전기를 사회적으로 규탄하고 포위하는 대중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사장집 항의방문, 본사 주변에서의 선전전, 본사 앞 항의방문이 계속되자 언론도 이를 크게 보도했고, 일본 정부는 외무성을 통해 “사태를 우려한다”는 입장을 표했다.
사회적 공분이 커지자 타나신전기 측이 결국 12월 27일 노조 대표자를 인정했다. 청산인 이성종을 입회인으로 해서 ‘TND노조를 지원하는 모임’을 포함해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돼 난항 끝에 1990년 3월 6일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서에는 출자기업인 다이나신전기의 도의적 책임이 명기됐고, 노조와 사전협의 없이 청산 수속을 행한 데 대한 사과와 동시에 고용확보 대책금, 피해보상, 쟁의경비 지불, 김분종 위원장 석방 탄원서 제출, 노사쌍방 고소고발 취하 등 대부분의 노조 요구를 반영한 내용이 명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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