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산별이냐 대산별이냐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에서도 조직발전전망과 관련해서 숱한 논쟁들이 진행됐고 미세한 부분에서 끊임없는 이견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민주노총 건설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라는 문제 외에도 대공장의 입지와 업종이냐 산별이냐 문제에서 전노협은 ‘대산별 건설’이라는 입장에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산별 구획과 관련해서는 자본에 의해 금속산업 내에서도 수백 조각으로 갈라지는데, 소산별을 주장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산별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또 소산별이 동종업체라는 동질성을 갖기 때문에 조직화가 쉽다는 주장은 산별이 아니라 기업별 노조의 연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배 중에 배범식 위원장과 이재남 위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안양에서 만났다. 자총련 조직화에 집중하던 두 동지는 “업종별 산별이 현실적으로 가장 적합한 방식인데 도대체 반대하는 이유가 뭐냐”고 한다. 산별에 대해 긴 이야기를 했다. 업종별 산별은 일본 방식이 분명한데 그것은 산별이 아니라 기업이라는 것, 그러한 산별 구분은 자본의 구도와 시각에 멈추어 있는 것이라는 비판, 계급적 산별이라는 것은 업종이나 기업의 이해가 아니라 계급의 이해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긴 시간을 할애해서 설명했다. 두 동지가 그간 진행해온 산별 논쟁에서 감정적인 요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주장하는 산별에 대해 고민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토론은 평행선만 유지한 채 찜찜하게 헤어졌다. 전국전선이 필요했다 1994년 5.18 광주민중항쟁 전야제가 열리는 조선대에서 전노대 대표자회의가 잡혀 수배자들도 광주로 내려갔다. 그곳에 대우전자부품 동지들이 찾아왔는데 너무 반가웠다. 1년 이상 편지글을 통해 안부를 전하고 격려했던 동지들이다. 현장에서 소모임과 일상 활동은 물론 가투도 함께 했던 동지들이니 반가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노대 회의시간 등이 있어서 짧은 만남 후 다음날 다시 보기로 했다. 밤에 진행한 전노대 회의에서 산별에 관한 토론을 진행하는데 광주지역 자동차업종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얼굴까지 붉히며 토론이 아닌 집중적인 공격을 해왔다. 내 생각과 전노협 입장을 설명했지만 이미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상황에서 쟁점의 간극이 좁혀질 수가 없음을 느꼈다. 회의를 진행하던 중에 디데이를 잡아두고 있던 한국통신노조가 투쟁을 접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는 급하게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권영길, 단병호 위원장과 나는 한국통신노조 지도부를 만나야 했다. 지도부와 연결선을 잇고 있는 동지(특정 정파의 리더)를 만나 한국통신 투쟁이 갖는 의미 등을 얘기하며 지도부와 만날 수 있도록 급하게 자리를 만들자고 부탁했으나 소용없었다. 한국통신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전국전선 형성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현대자동차에서 양봉수 열사 투쟁을 진행하며 울산 지역 파업을 조직하고 있었다. 한국통신과 함께 전국전선으로 조직하지 않으면 울산 투쟁까지 모두 한계에 부닥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광주에서 급히 올라왔지만 한국통신투쟁 지도부를 만날 수조차 없는 우리 셋은 무기력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울산 투쟁은 현대자동차 투쟁에 그쳤고 한국통신투쟁 대오는 질서 없이 퇴각했으며, 그 결과 노동자들은 정세를 돌파해내지 못했다. 특별한 휴가 여름 휴가 때에는 수배자들도 특별한 일정이 없다. 수배 생활이 누적되면 조금씩 보안에 나태해지기도 한다. 수배 중이라고 방구석에 박혀 있으면 수배 생활의 의미가 퇴색하는 듯한 느낌에 젖어 들기도 한다. 수배 생활은 탄압에 저항하며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수배 중인 권영길 위원장과 단병호 위원장과는 중요한 사안이 있는 경우 가끔 만나는 편이었다. 수배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여름휴가 때는 우리도 바람은 쐬고 오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대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매미 소리가 귓전을 울려대는 계곡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배추밭, 밤이 되면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들이 펼쳐지는 은하수는 태고적 광야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다음날, 수배자 일행이 오대산을 오르는데 누가 아는 척을 한다. 우리 셋은 모두 모르는 사람이니 반가워하기보다는 바짝 긴장했다. 상대가 짭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고들 있었다. 상대방은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더니 봉투에 뭘 넣어 주면서 “고생하시는데 식사라도 한 끼 하시라”라며 건넨다. 그러면서 긴장한 우리들의 표정을 살폈는지 자신은 상지대 무슨 교수라고 소개했다. 약간의 안도감은 들었지만 긴장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하산했고 봉투에 들어있는 돈으로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즐기며 “그 교수 참 좋은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