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하지만 아직도 아픈 기억의 평화시장과 청계천
서동석
조그만 손수레에 나무궤짝으로 만든 통이 실려 있는데 주인이 통밖에 삐죽 튀어나온 손잡이를 돌리면 통 안에서 그림이 돌아갔습니다. 동전 몇 푼을 주고 그 통에 뚫려 있는 구멍에 눈을 바짝 대면 돌아가는 그림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걸 요지경이라고 했습니다. 학교 앞에는 여러 부류의 장사꾼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요지경장수도 있었습니다.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서 그걸 몇 번 봤습니다. 나는 지금 또 그 요지경을 보듯 눈앞에 옛날을 돌립니다.
서울 을지로6가 국립의료원, 그때는 메디칼센터라고 했던가, 뒤편에 학교가 있었습니다. 동대문국민학교입니다. 나는 그 학교 24회 졸업생입니다. 일제 때 지은 학교로 건물이 두 채였습니다. 앞쪽 3층짜리 교사는 양회(세멘트)벽돌로 지어졌고 뒤쪽에는 1층짜리 목조건물의 교사가 있었습니다. 꽤나 넓은 학교 마당의 동쪽, 철망으로 경계를 가른 그 너머에 덕수상고가 있었습니다. 철망 부근에 철봉대와 모래판이 있었고 마당 쪽으로 무척 오래된 고목 두 그루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아름으로는 서너 명이 둘러서야 했지요. 밑둥치에서 가지를 친 곳은 그리 높지 않아 가끔 그 나무를 타고 올라서는 가지가 갈라진 곳에 걸터앉기도 했습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서쪽 끝 편에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마당을 파고 양회로 가장자리를 마감하였는데, 일제 때 지은 학교의 특성 가운데 좀 나은 학교의 자랑이 이 수영장이랍니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 들어간 뒤 이 수영장에 물이 차 있는 날은 없었습니다. 4학년 때 이후엔 아예 메워져서 마당으로 쓰였습니다. 다시 서쪽으로 학교 담을 넘으면 바로 담과 붙어서 보건소가 있었습니다. 보건소에서 길을 건너면 서울대 음대가 있었죠. 학교 수업 중에 가끔씩 그 음대에서 매혹적인 여성의 고음이 바람을 타고 건너 왔습니다. 메디칼센터와 학교 사이의 길을 지나 보건소와 음대 사이의 길로 들어서면 평화시장입니다. 그 시장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은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시장 안으로 들어오면 왼쪽으로는 통일상가, 오른쪽으로는 동화시장입니다. 그곳을 지나 청계천으로 나오면 개천을 따라 동쪽으로 늘어선 상가가 있습니다. 여기가 평화시장입니다만 이 일대를 싸잡아서 그냥 ‘평화시장’이라 합니다.
흔하게 표현하듯이 ‘전쟁이 할퀴고 간 자리’는 참담했습니다. 온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노녁(북)에서 내려 온 사람이랑 마녁(남)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뒤섞여 그 폐허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버둥거렸습니다. 집이 있는 사람은 그나마 부서진 집이라도 찾아 들어갔지만 등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개천을 따라 판잣집을 지어 내 집이라 했습니다. 그마저도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개천 위에 까치발을 세우고는 거기다 판잣집을 지었습니다. 개천위에 지은 집과 시장 쪽의 판잣집 사이에 골목이 생겼고 이 골목을 따라 국밥집이니 구제품집이니 헌옷집이니 따위가 들어섰습니다. 1962년 1월 30일(화)자 동아일보는, ‘서울수복직후 이북피난민들에 의하여 70개의 판자집으로 벌려놓은 이 시장은 지금 8백 개의 현대식 건물의 시장으로 확장되었다’고 1면에 보도하였습니다. 평화시장 얘기입니다. 그래요. 난 그 수복 직후, 1954년 한여름, 거기서 함경도가 고향인 어머니와 충남이 고향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정말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전쟁보다는 좀 낫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썩 나을 게 없던 전쟁직후. 살 곳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장은 만들어졌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국밥집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장의 ‘주먹’이었습니다. 모두가 전쟁에 넋이 나가고 잔뜩 허기진 터라 난민촌 같은 시장통의 어디서든 무법지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그런 시장의 질서를 법보다 일상에 더 가까웠던 주먹으로 잡았습니다. 그런 위세로 국밥집은 안전하게 꾸려갔고 온종일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고 합니다. 시골에 계시던 나의 삼촌과 고모도 50년대가 가기 전에 그곳으로 왔습니다.
1958년부터 청계천엔 건설장비들이 투입되었습니다. 1단계로 광교부터 동대문 전차종점이 있는, 지금은 동대문종합시장인, 청계천6가까지 개천을 콩크리트로 덮는, 복개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썩은 냄새가 가득했던 개천에 뚜껑이 덥혔습니다. 개천가의 판잣집 점포들이 헐렸습니다. 그 자리에 동아일보의 보도대로 ‘현대식상가’가 들어섰습니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국가재건회의의장이 된 1961년의 일입니다. 난민촌에 모여든 이들 중 몇 사람이 판잣집에서 재봉틀로 미군들 군복이나 담요를 뜯어고쳐 옷으로 만들던 봉제업이 이제 본격적으로 기성복제조업의 도매시장이 되었고 전국에서 옷장사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시장도 ‘평화시장주식회사’로 바뀌었습니다.
개천변의 집이 헐리게 되어 우리 가족은 1959년에 광희동으로 이사했습니다. 을지로6가 파출소 건너편 골목 안쪽의 집을 얻어 살았습니다. 60년 ‘4.19혁명’때, 이른 아침에 그 파출소가 불에 타던 장면이 아직도 선합니다. 소방차에 잔뜩 올라타고 몰려왔던 학생들의 손에 그렇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62년, 어머니와 아버지는 구로동에 집을 장만하여 그곳으로 가시고, 나와 바로 위 형님은 광희동의 다른 집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그리고 64년 12월쯤 나도 구로동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학교를 옮기기 싫어 그냥 구로동에서 을지로6가 동대문국민학교까지 전차와 버스로 오고갔습니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는 그곳에 갈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0년 11월 14일, 그곳에서 한 노동자가 분신자결을 했다는 신문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마침 그곳에서 태어나 나랑 같은 초등학교를 거쳐 같은 중학교를 함께 다니고 있던 동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동무는 시장 한복판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제 거기서 어느 노동자가 자살했다던데? 신문에 났어” “잘 모르겠는데. 하긴 학교 마치고 집에 가니까 어수선하긴 하더라.” 거기까지였습니다. 우리들한테 그리 큰 화제가 되지 않았고 곧 잊어 버렸습니다.
내가 태어나던 해, 부산에서 작은 규모로 봉제업을 하던 전상수씨는 어느 염색공장에 원단을 맡겼다가 장마통에 모두 못쓰게 되었고 그 바람에 부산에서 도저히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씨는 옷 만드는 기술이 있으니 어찌되었든 서울에 가면 먹고 살 수 있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해 여름 ‘무작정’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에 왔습니다. 전씨 가족은 아내와 두 아들과 딸, 이렇게 5명이었습니다. 여섯 살 난 큰아들의 이름은 태일이었습니다. 난리 뒤의 서울에서 아는 이 한사람 없이 당장 입에 풀칠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습니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서울역 근처의 염천교다리 밑에서 한뎃잠을 자야 했고 석 달 가까이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냥을 하였습니다. 죽지 못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밤에 다리 밑에서 자고 있는데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불쑥 나타나서 그때 돈으로 3천원쯤 주면서 ‘몇 달 뒤에 돌아와서 천막집이라도 살테니까 죽지 말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그 돈을 밑천삼아 채소행상, 지겟꾼을 상대로 팥죽장사, 찹쌀떡장사 따위를 하였고 아이들을 데리고 광주리에 물건을 이고 다니며 중앙시장, 남대문 육교, 중부시장, 미아리 등지로 행상을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남의 굴뚝에 기대 자기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조용래 지음『전태일평전』에서 부분인용)
태일은 자라면서 가난을 벗어나고자 어린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은 닥치지 않고 했습니다. 학교? 남대문국민학교에 잠깐 다니긴 했지만 졸업은 할 수 없었지요. 학교 갈 시간에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사는 게 힘에 부쳐 부산으로 도망을 간 적도 있지만 이내 서울로 돌아와 또다시 도시의 밑바닥 생활을 하였습니다. 사는 게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여기에 이루 다 쓸 수 없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꿋꿋한 의지를 가진 태일이 스스로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믿습니까?/벌레보다 못한 인생이지요/주인 있는 개보다도 천한 인간입니다’ 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비참한 생활이었습니다.
 
그가 ‘이상의 전부’라고 한 평화시장을 뒤로 하고 선 전태일동상.
청계천6가 전태일다리(버들다리)에 서있다. (사진=서동석)
태일이 17살 되는 1965년 가을에 평화시장의 삼일사라는 봉제공장에 ‘시다’(견습공)로 취직했습니다. 어릴 때 봉제업을 했던 집안인 덕에 금방 일에 익숙해져 미싱보조가 되었고 같은 봉제업의 공원들이 부러워할 만큼 태일은 2년도 채 안되어 봉제업의 가장 숙련공인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숙련공이 되어가는 만큼 함께 일하는 봉제노동자의 처절한 현실에 가슴이 타들어갔습니다. 14살이나 16살의 어린여자아이가 끼니를 굶지 않으려고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해야 하는 현실. 옷감에서 나오는 먼지로 가득한 봉제작업장, 그것도 일어서면 머리가 천장에 닿아 늘 구부리고 다녀야 하는 현장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고는 고작 하루 일당50원을 받는 현실에 스스로가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이런 착취의 현장을 두고 보아야 한다는 자신을 경책하였습니다. 누군가 유식한 사람이 있어 이런 개만도 못한 현실을 깰 수있는 방법을 알려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주변에 그런 ‘대학생 친구 한명’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개보다도 천하게 살아야 하는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려면 ‘조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노동자조직을 만드는 한편 평화시장의 실태를 직접 조사하여 노동청장 앞으로 진정서도 냈습니다. 그러나 모두 관료와 자본에 막혀 노동자의 절박한 삶의 몸부림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 몸을 살라 어린 노동자들이, 아니 이 땅 모든 노동자들이, 아니 민족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중이 자본의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는 세상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11월 13일, 평화시장 들머리의 은행 앞에서 그는 해방의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그의 나이 22살. ‘나는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그렇게 가면서 그는 외쳤습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옹근 40년이 됩니다. 전태일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 땅 모든 민중이 기억하기 위해 5년 전, 그의 동상을 청계천에 세웠습니다. 오늘도 그 앞에는 열사를 기리고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소식을 전하는 이들로 부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