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② 마도로스 꿈 접고 대우전자부품 입사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원하지 않았던 학교, 원만치 않았던 학교생활 오랜만에 성남 집에 도착했고 아버지는 단단히 계획하고 계셨는지 “네가 저지른 사고로 재산손실이 만만찮았으니 그 돈을 네가 다 갚아야 하고, 공장 다녀서는 갚을 가능성이 없으니 대학을 가는데 학비는 전액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당장 내가 돈이 없으니 입학금만 책임진다”고 하셨고 “대학을 가도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항하고 반대할 명분은 있었지만 명분을 내세울 상황도 아니었다. 서울 명륜동 2년제 전문학교 전자통신학과에 시험을 봤고 경쟁은 치열하지 않았으며 학생 수도 많지는 않았다. 그 학교는 의상, 일본어, 영어, 무선통신, 전자공학 등등의 학과가 있었고 동급생 중에 나에게 형이라고 하는 녀석들이 많았으며 친구뻘도 몇 명 있었다. 몇몇 써클이 있었고, 나는 태권도 써클과 독후감 모임에 참여했으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적극적 활동은 불가능했다. 학교에 가려면 성남에서 버스를 타고 을지로 5가 종점에서 내려 종로를 거쳐 3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70년대 초반의 대학로는 살벌했다. 경찰들이 늘 눈깔을 까고 널려 있었고 불심검문은 일상이었다. 심지어 여학생들에게는 동성고등학교(혜화동로타리) 정문 옆 경비실 뒤로 끌고 가 유인물을 찾는답시고 옷 속까지 뒤지는 만행도 일상적으로 저질렀다. 그런 광경을 보며 느꼈던 분노도 있었지만 살벌한 분위기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분노를 표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요일에는 성남에 있는 장갑공장에서 미싱으로 장갑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장갑 한 장당 얼마씩 받는 조건이었고 대신 불량이 나오면 돈을 제하는 거여서 불량품이 나올 때는 수입이 확 줄었다. 그러다가 장갑공장에서 알게 된 아주머니 소개로 중학교 2학년 네 명을 모아 과외를 하게 되었는데 장갑 만드는 것보다는 수입이 늘어나 등록금 마련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학교 같은 과에는 대부분이 동생뻘이고 다른 학교 다니다 온 형뻘도 있었으며 친구는 극소수였다.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어머니는 창신동 동덕여중고 앞 골목길에서 분식집을 운영하고 계셨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조심스럽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한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분식 가게에 창신동 양아치들이 죽치고 앉아 소주를 마시며 행패를 부리고 있어서 장사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태생적으로 싸움을 못 해서 부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손 좀 봐 달라”고 부탁을 한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친구의 부탁이니 외면할 수도 없어서 과외가 없는 날 분식 가게로 갔다. 친구가 얘기했던 놈들 3명은 여전히 소주병을 탁자 위에 놓고 마시며 한창 떠들고 있었다. 친구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나에게 와서 “저놈들 3명이니까 싸우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싸우러 왔는데 그냥 간다는 건 쪽팔리는 일이었다. 친구에게 “어머니 좀 어디 다녀오시라고 해” 하자 어머니는 나가셨다. 나는 다른 탁자에 앉아서 가게 지형을 파악하고 어떻게 기선을 제압하고 선방을 날릴 지 궁리에 몰두했다. 길지 않은 시간에 판단은 났고 그놈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놈(실제는 흉악한 욕을 함)들아 여긴 주로 여학생들이 이용하는 분식집인데 니들이 와서 죽치며 소주까지 까고 나자빠져 있으면 장사는 어떻게 하냐. 지금 당장 꺼지지 않으면 니놈들 대갈통에서 빨간 거 쏟아지니까 말로 할 때 빨리 꺼지라”고 했는데 피식 웃으며 한 놈이 “겁대가리 없다”며 다가온다. 나는 나를 향해 오는 놈 목덜미를 후려쳤다. 그놈은 캑 하고 쓰러졌고 두 놈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모양이다. 친구에게 “이놈들 다 죽여 버릴 테니까 가게 문 빨리 잠가!”라고 소리쳤다. 쓰러진 놈을 부축해서 셋이 문을 빠져 도망 나갔고 나도 식식거리며 죽인다고 쫓아나갔다. 50미터쯤 갔을까. 도망가던 한 놈이 갑자기 주저앉더니 병을 깨서 자신의 얼굴을 찌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는 순간 경찰들이 옆에 와 있었다. 그놈은 경찰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가 병으로 긁었다고 했다. 근거 없이 덤터기 씌우는 유치함에 그놈 얼굴을 한 대 쥐어박고 파출소로 끌려갔다. 그놈들은 세 명 모두 내가 깨진 병으로 긁었다고 계속 우기는 양아치 짓을 했다. 경찰은 “학생이니 합의를 보라”고 하는데 억울해서 합의를 볼 수가 없었다. 분식집 친구와 어머니까지 파출소로 왔고, 친구는 나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억울하지만 네가 어차피 목도 치고 했으니까 합의를 보자”고 한다. 분식집에서 100만 원과 내가 과외로 일해서 좀 벌어놓은 돈 50만 원, 150만 원에 합의했는데 억울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놈들 세 명을 더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3명을 불러서 한마디 더 보탰다. “이후에 분식집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때는 창자를 꺼내 씹어 버릴 테니 오고 싶으면 오라”고. 그 뒤로 그놈들이 분식집에는 오지 않았다며 그 친구(전봉우)가 몇 번씩 고맙다고 했다. 그 시절 양규헌 무산된 마도로스의 꿈 무선통신사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은 실기와 이론으로, 이론은 전자공학, 무선측정과 전파전화, 통신영어 등이었고 실기는 모르스 부호(CW:continuous wave) 통신에 따른 송수신을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한다. 오실레이터(Oscillator)를 구입하여 집에서 실기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저녁 경찰이 들이닥쳤다. 오실레이터에서 나오는 소리 “삐삐…삐삐”를 누군가 듣고 간첩신고를 한 것이다. 졸지에 파출소도 아닌 경찰서로 끌려가 상황설명을 하고 학생증까지 제시해 풀려났지만 하마터면 간첩이 될 뻔했다. 무선통신사 꿈을 가졌던 건 어느 날 마도로스파이프를 입에 문 선장의 사진이 너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장, 기관장, 통신장이 배의 3장이다. 그중에 외항선을 타고 마스터에서 일하는 통신장이 하고 싶었다. 통신기사 시험은 합격했으나 생각지 않은 난관은 집 안에 있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 배를 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극구 만류하셨다. 무선통신사는 해상근무가 있고 육상근무가 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육상근무를 생각해 봤는데 쉽지 않았다. 작은 섬에 있는 등대에 일자리가 나왔는데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사용하고 빨래도 세수도 그 물로 해야 하는 곳이었다. 선배에게 상담을 해 봤는데 절대 가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6개월에 한 번씩 육지에 나오는데 가치관과 인생관 자체가 완전히 바뀐다고 한다. 철저하게 격리된 생활을 하다가 이후에 육지로 나오면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영장을 받았고 군대에 가게 되었으며 아버지가 원호대상자(형이 군대 가서 사망)여서 2년 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됐다. 대우전자부품(당시 대한마루콘) 입사 원호청에서 내가 취업대기자인지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왔다. 취업하고 싶은 곳을 얘기하면 취직을 시켜준단다. 원호대상자인 아버지가 연세가 많고 내가 아버지 부양자이므로 내가 미취업 상태에서는 매월 쌀을 한 포대씩 지급하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나는 군납 통신장비 업체로 유명한 동양정밀(OPC)을 희망했고 면접을 하러 갔다. 인사과장이 서류를 훑어보며 나보고 “형님 덕분에 왔네”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형님이 죽었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는 거 아닌가. 내가 앉아있던 의자로 인사과장을 후려치고 사무실을 다 뒤집어버렸다. “개새끼들, 잡놈들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회사는 돈을 발라주며 오라고 해도 안 온다.”며 사무실 앞에 오줌을 내깔기고도 분이 삭혀지지 않았다. 집으로 오면서 원호청 소개는 절대 안 받겠다고 다짐했다. 인사과장은 다음날부터 3일간 계속 집으로 찾아와 사과하며 회사에 나와 달라고 한다. 이렇게 그만두면 자기가 잘린다며 매달렸으나 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3일째 찾아온 날, 인사과장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적성에 맞지 않아 안 간다는 확인서를 써 줬다. 박정희 정권에서 원호청의 기세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일자리는 스스로 찾아다녔고 삼영전자에 들어가게 됐다. 1년도 되지 않은 때 몇 명이 모여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조합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잘렸다. 최초의 해고였으나 해고답지 않은 해고였고, 대응할 수도 대응하는 방법도 몰랐다. 삼영전자에 과장으로 있다가 이직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자기는 “지금 대한전선그룹에 와 있는데 같이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냐”며 “생각 있으면 좋은 조건으로 받아 줄 테니 오라”고 했다. 일종의 스카우트 같은 거였다. 성남에서 군포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과장은 그곳엔 노조가 있는데 노조활동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그런 단서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면서 1977년 2월에 입사했다. 당시 회사 이름은 대한마루콘(한일합자)이었고 몇 년 후 대우그룹의 대한전선 전기전자분과 흡수와 함께 대우전자부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병(위염)을 빙자한 야간업소 생활 대한마루콘 입사 초기에는 점심시간마다 병원에 가야 했다. 위염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다녀도 차도가 없었다. 속병으로 돌아가신 엄마와 같은 과정을 밟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 계속 다녀도 차도가 없자 의사는 취미생활을 권유했고 나는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회사 안에서 9명을 모아 연습을 하기로 하고 신협에서 대출을 받아 악기를 사들였다. 앰프와 드럼, 오르간과 베이스, 기타 등을 사서 연습에 들어갔다. 한 달쯤 연습하던 중 멤버 한 명이 야간업소에 나가자고 제안했다. 밴드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해 ‘장안클럽’이라는 곳에서 일하게 됐다. 회사에서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업소로 출근하고, 업소에서는 새벽 2시에 일이 끝나는데 뒤풀이를 하는 날에는 4~5시에 집으로 갔다가 다시 출근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늘 잠이 모자라니 피곤을 달고 살았다. 업소에서 밴드하는 시간에는 소주와 콜라를 글라스에 섞어 마시며(안주 먹을 상황이 아니기 때문) 연주를 해야 피곤함을 잊을 수 있었다. 낮에는 공장, 밤에는 클럽에서 일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았으나 그렇게 했다.
낭만. 젊음_수락산에서
같은 생활의 반복이었지만 힘든 줄 모르고 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위염이 시간이 갈수록 차츰 없어졌다. 야간업소 생활 13개월째, 더는 같은 생활을 반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다른 멤버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야간업소(술집)에서 밴드를 한다는 것은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술집에 오는 손님들과 다툼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분란(싸움)과 누적되는 피로가 중단하자는 결과를 가져왔다. 악기구매 대출금은 다 상환한 상태였고 1년 동안 정신없었던 이중 직장생활은 막을 내렸다.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마신 소콜(안주없는 소주와 콜라)술은 내 생에서 마신 가장 많은 양의 술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때 이후 나에게 ‘신경성 위염’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세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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