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새끼 보다 ‘쥐새끼’가 욕인 시대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말은 경우에 따라 대화하는 상대방을 즐겁게 할 수도 있고,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각각의 성격에 따라 감정에 따라 말을 구사하는 방식과 느낌이 다르다.
이 중에 특히 욕이라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직·간접적으로 입에 올린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버릇처럼, 때로는 매우 의도적으로 감정을 담아 쏘아붙인다. 그렇지만 욕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내 뱉는 건 아니다. 사람에 따라 습관적이기도 하고, 분노와 감정의 표현으로 생각 없이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욕도 언어임에는 분명하다. 언어는 인간만이 구사하는 기호로써 상대방에 따라, 장소에 따라, 분위기와 감정에 따라 각각 차이가 있다. 아울러 시간이 경과하고 세월이 흐르면 욕도 변화발전할 거 같지만 가치를 규정하는 기준에 따라 다를 거 같다.
2년 전, 용산참사 남일당 현장에서는 매일같이 첨예한 대립전선이 만들어진다. 밤·낮 없이 , 남일당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들과 마찰을 빚는가 하면, 중단한 철거를 진행하려는 건설자본이 고용한 용역들과 대립전선은 매우 치열하며 온갖 욕이 난무한다.
교양과 인격을 훌륭히 갖춘 사람도 삶과 생존의 전선에서, 계급 대립의 전선에서 상상도 못할 욕이 튀어나온다. 의도적으로 하는 욕은 아니겠지만, 누적된 분노의 표출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현장에서 입씨름이 계속되면 매우 살벌한 욕설이 오가지만, 맨 처음 시작은 ‘개새끼’라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욕이다.
하루 투쟁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분노를 삭이지 못한 사람들은 ‘개새끼’들 어쩌고 하다가 대화는 개잡는 문화에 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개를 잡을 때, 경상도는 개목에 밧줄을 걸고, 전라도는 패서 잡는다는 등, 한참을 듣고 있던 선배가 처음부터 개 소리만 하는 게 귀에 거슬린 모양이다.
"니네가 개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개를 들먹거려!"느닷없는 짜증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선배가 인생의 많은 부분을 불심에 묻었다는 걸 감안할 때, 짜증내는 이유가 이해는 갔다. 그리고 '개에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뭘 해 줘야 하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개새끼’란 말의 유례는 알 수 없지만 짐작해보면 첫째, ‘근친상관을 거리낌 없이 한다’.
는 의미가 담긴 거 같고, 둘째는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근성과 아무 곳에서나 볼일을 보며, 사람의 똥을 먹고 산다.(예전엔 그랬음)는 가장 미천한 존재라는 뜻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얼마 전 중국에서 한 마리의 개가 화제가 되었다. 티베트 출신인 살아있는 전설(?) '장오'라는 개다. 사자와 흡사하게 생긴 이 개는 개 같지 않게 몸값만 무려 28억이라고 한다. 누군가 이 ‘장오’를 35억에 다시 사가려고 흥정을 붙이는데 ‘장오’를 모시는 사람은 택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린다. 한마디로 매우 귀하신 몸이다.
‘장오’는 그 명성에 걸맞게 수발을 드는 사람들이 10여 명이나 되는데, 영양사, 수의사, 훈련사, 등등이 따라붙어 '장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매 끼니때마다 최고급의 양젖은 물론이고, 소고기와 당근, 다시마 등 다양한 영양소를 배합하여 적량을 먹인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렇게 고귀한 녀석은 잠자리도 예사가 아니다. '장오'를 관리하기 위한 저택은 작지 않은 산과 함께 왕궁과 흡사한 별장촌 모두가 개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개에 대한 사고와 인식이 예전과 다르게 통용되는 것은 꽤 오래되었다. 애완견을 보유한 사람들이 늘어남으로써 개 병원도 많이 생겼고, 개의 사료를 판매하는 샾도 도처에 늘려있으며 개 카페도 있다. 그리고 애완견 한 마리 사려면 몇 백 만원 줘야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11개월밖에 되지 않은 '장오'는 상식으로 통용되는 ‘개새끼’가 아니며 신분이 상승된 채로 나타나 화제가 되고 있다. ‘부의 상징’인 ‘장오’는 교환가치와 생산가치를 동시에 지닌 채, 인간을 10여 명씩 고용하는 일종의 간접고용주 신분으로 등장했다. 화제의 ‘장오’를 접하면서 놀라움과 동시에 ‘개새끼’가(?)라는 말이 입에 담겼지만 그냥 삼켰다. ‘개새끼’로 비하되는 ‘분노의 비유’는 적절치 않은 거 같고, 또 선배의 말처럼 내가 ‘개에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작용했을 것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가치의 변화에 따라, ‘개새끼’라는 욕보다는 ‘쥐새끼’라는 말이 현실 인식에서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새끼’의 유례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가지만, ‘쥐새끼’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건, 3년 전 촛불집회를 통해 대중화 되었으니 세대의 감성에도 어울릴 거 같아서 말이다.
혹 ‘쥐새끼’도 가치가 상승된 형태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미래가치일 것이기 때문에 그 때 생각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