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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
⦁ 시기 : 1979년 8월 9일 ~ 1979년 8월 11일
⦁ 요약 : 1979년 YH무역 노동자들이 위장폐업에 맞서 기숙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쫓겨나자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으나 경찰력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YH노동자 김경숙이 살해당했다.
1979년 4월, YH무역 회장 장용호는 국내에서 벌어들인 엄청난 돈을 계속 미국으로 빼돌려 공장운영을 어렵게 만들고는 폐업을 선언한 뒤, 아무 대책도 없이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노동자들이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정부는 기동경찰을 투입해 해산시켰다. 노동청의 권유에 따라 약 200여 명의 노동자가 다른 회사에 취업했지만, 대부분이 불완전한 취업이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실업자로 전락했다. 노동자들은 채권자인 조흥은행, 청와대, 국무총리실, 노동청, 재무부 등에 생존권 사수 차원에서 공장운영 정상화를 호소했고, 공장을 정상화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회사는 부품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핑계 삼아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만 있었다. 국회에서도 YH무역의 부도와 폐업에 따른 노동자들의 장기농성 투쟁이 거론됐지만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1979년 8월 6일, 회사에서 2차 폐업을 공고하자 노동자들은 기숙사에서 전원 농성에 돌입했다. 회사는 8월 8일, “8월 9일 자로 기숙사를 폐쇄하고 단전 단수하니 불상사가 나기 전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공고를 게시했다. 이어 다음 날 새벽 5시경, 남성 10여 명이 여성노동자들을 끌어내려고 기숙사 철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불과 몇 초 만에 여성노동자들이 몽둥이를 구해 들고 버텼지만, 더는 기숙사에서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8월 9일, 새벽부터 4~5명씩 2분 간격으로 기숙사를 빠져나온 노동자 200여 명이 신민당사 주변의 식당과 다방 등에 은신해 있다가 9시 30분 집결과 동시에 신민당사로 뛰어들었고 오전 10시부터 신민당사 4층 강당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한편 회사 주변을 지키고 있던 형사들은 노동자 50여 명이 남아 마치 200여 명이 남아있는 것처럼 농성 중 녹음해 둔 노래와 구호를 확성기로 내보냈기 때문에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처절한 투쟁이자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직접적 계기가 된,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시작됐다.
8월 9일, 오후 2시경 홍성철 보건사회부 장관의 지시로 신민당사를 방문한 박정원 YH무역 사장은 “적자가 생기는 이유가 뭐냐?”는 신민당 간부들의 질문에 “현재의 여공들로는 작업능률이 떨어져 적자가 생긴다”며, “작업능률이 오르면 공장 문을 다시 열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노동자 대표와 대질시키자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다가 “은행관리 절차를 밟겠다”며 자리를 뜨고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신민당 쪽에서도 여러모로 정부와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당 간부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당사에서 함께 밤을 새웠다.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노동자들을 안심시킨다며 “너희는 결코 두려워 말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희를 붙들리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8월 10일, 황낙주 신민당 총무는 최영희 유정회 총무, 김용호 공화당 수석부총무 등과 총무회담을 갖고 보사위원회를 소집해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자고 했지만, 임시국회를 폐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오히려 오후 5시에는 이순구 서울 시경국장이 신민당으로 전화해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했다.
저녁부터 사복경찰들이 당사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하자 동요하던 농성노동자들은 오후 10시 30분경 마지막 총회를 열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진정한 묵념, 노동자들을 위해 분신한 전태일 열사에 대한 묵념, 부모님에게 보내는 묵념을 하자 대회장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그리고 김경숙이 YH 노동자들을 대표해 투쟁결의문을 읽었고, 박태연 사무국장이 성명서를 낭독함으로써 대회가 끝났다. 농성노동자들은 총회를 끝낸 뒤 창문에 매달려 밖에 서 있는 형사들에게 “사건 해결 없이 너희가 들어오면 우리는 여기서 집단으로 떨어져 죽는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신민당 국회의원들에게도 극도의 불신감을 표하며 농성장 출입을 봉쇄했다. 그러자 김영삼 총재가 가까스로 단상에 서서 “경찰은 절대로 야당 당사에 안 들어올 테니 안심하라. 여태껏 경찰이 야당 당사를 습격한 일이 없다. 내가 최선을 다해 여러분의 사정을 정부에 반영하겠다”며 장내를 안정시키려 했고, 집행부도 농성노동자들을 설득했다. 이 과정에서 이미 공권력의 폭력에 무참히 당해본 노동자들은 극도로 흥분해 8명이 실신했다.
새벽 2시, 이순구 시경국장이 전화를 걸어 농성노동자의 해산을 종용하며 “총재 바꿔, 총재면 다야?”라고 외치더니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길게 두 번 울려 퍼졌다. 소위 ‘101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조명용 소방차 2대가 불을 비추고 고가 사다리차 3대, 물탱크차 2대가 동원된 가운데 기동경찰은 닥치는 대로 기물을 부수며 4층으로 돌입해 무차별 폭행을 가하며 농성노동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황낙주 총무, 박권흠 대변인, 김형광, 정대철 의원 등 국회의원도 무참하게 폭행당했다. 약 40분간의 광란극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청소부들이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내고 깨진 유리창도 갈아 끼웠다. 이 자리에 있던 기자들도 취재수첩, 카메라 필름 등을 빼앗겨 제대로 취재한 기자가 없었다. 당사 앞의 녹십자병원에는 다친 노동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고 있었는데, 이때 김경숙은 시체로 변해 있었다.
김경숙의 죽음과 관련해 경찰에서는 △경찰 진입 직후 4층에서 추락하는 것을 경찰이 받아내 살았다 △동맥을 스스로 절단, 투신자살을 기도했고 경찰이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숨졌다(시경국장) △1시 30분에 4층에서 추락해 사망했다는 등 세 차례에 걸쳐 사인을 번복하면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신민당 조사단(단장 박일)은 사체 해부 사진 등을 분석해 진압과정에서 예리한 흉기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상태에서 무참하게 구타당해 살해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경찰이 주장하듯이 자살도, 투신도, 실족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공권력이 자행한 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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