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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함께한 전노협
..... 그 시절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첨부파일 -- 작성일 2010-07-28 조회 938
 

그 시절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김하경 (소설가 /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그 어떤 무모함도 용서가 되던 그 시절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냥 자신을 시대와 역사의 희생양으로 내던져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런 시절 말이다. 노래 말 그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과 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죽었다 깨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무모함 속으로 자청해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을! 나에겐 아무 것도!” 하는 싸파티스타의 구호처럼 말이다.
1991년 2월, 그해 겨울 마지막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동숭동 ‘학림’에서였다. 노동문학의 길을 걷는 문우들에게 제안했다. 전국노동자신문(이후 약칭 ‘전노신’)에 꽁트를 연재하자고.
그런데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에서부터, 현장 취재해서 그대로 써내기도 바쁜데, 언제 그걸 다시 꽁트로 재구성해서 마감시간에 ?겨가며 완성하겠냐 까지. 한마디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건, 과거의 연재 경험 때문이었다. 교사 재직 중이던 1976년부터 1년 동안, 해직기자들이 편집진으로 있던 <주간시민>에, 매주 한 번씩 교육현장에 대한 칼럼을 연재했다. 또한 1978~1980년 약 3년 동안은 방송작가로 하루도 빵구 안 내고 원고를 써댔다. 연재라면 몸으로 때울 자신이 있었다. 물론 꽁트는 처음이라 나도 반신반의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이럴 땐 누구든 먼저 총대를 메는 게 중요했다. 누군가 먼저 시작해서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 따라오지 않겠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좋아. 아무도 안 쓰겠다면, 나 혼자 쓰지 뭐.”

 노동문학, 다시 출발점에 서다

소설 <그해 여름>으로 전태일 문학상을 받은 1990년 11월부터 책이 출판된 1991년 5월까지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낯 뜨거운 시간이었다.
처음 출판하기로 했던 출판사는 아무 이유 없이 차일피일 미루더니 덜컥 부도가 나 자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불황을 맞아 노동소설 출판을 꺼린다고 했다. 출판이 불투명하다는 말을 들으니 실연당한 듯 자존심도 상하고 쪽도 팔렸다.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을까. 출판이 무슨 장난인가. 한두 달 앞 일도 모르면서 그럼 약속은 왜 했나.
나중에 알고 보니 단순한 돈 문제만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노동문학판’에 대해 무지했다. 정파도 인맥도 아무 것도 몰랐다. 작가, 독자, 출판사, 이 세 가지가 다 제 각각의 정파와 인맥으로 갈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정파도 인맥도 없던 내 소설원고는 축구공처럼 이 발 저 발에 채어서 굴러다닐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노협은 결성하자마자 극심한 탄압을 받고 구속자 해고자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감옥에서 대표자회의를 열 정도로 지도부는 공백상태였고, 전노협 탈퇴 압력으로 노조업무가 마비될 만큼 현장 분위기도 아슬아슬했다. 이런 위기상황에 노동문학판은 멍석을 걷고 막을 내리는 둥 파장분위기였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사회주의 이념은 폐기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전망이 없다, 길이 안 보인다는 목소리에는 ‘노동문학의 폐기처분’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숨겨져 있었다. 곧 이어 누구는 복학했고, 누구는 교수가 되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누구는 유학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사실 우리 ‘노동문학’은 역사도 짧거니와 역량 또한 일천하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빈약하기 짝이 없다. 1920년대 출범한 카프(KAPF)는 10년 남짓 활동하다가,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분단비극이라는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중단되었다. 반면에 남한의 노동문학은 1971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거쳐 자생적으로 움트기 시작해 1987년 이후 본격화되었다고나할까. 시간적으로도 10년이 넘을까 말까고, 성과라 해봤자 장편소설 한두 편이 나오기 시작하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 이런 시점에 타의도 아니고 자의로 용도폐기를 선언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노동자와 노동현장을 두 눈 뜨고 보면서도, 마치 없는 존재인양 부정하거나 시신 취급할 수가 있을까. 원래 시대를 앞질러 사는 사람들, 시대의 첨단을 걷는 사람들은 다 그런 건가? 나 혼자만의 오해인지 모르겠지만 그땐 야속하고 서운했다.
물론 훗날 어림짐작으로 안 거지만, 그들과 나는 입으로는 같은 ‘노동문학’이라고 말하면서도, 머리속으로는 서로 다른 의미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같은 ‘노동문학’이지만 그 단어가 가리키는 방향은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언젠가 그 정확한 의미를 들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당시 나는 신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히 노동문학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말이 맞고 틀리고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인의 말이기 때문에 귀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 정파의 리더급이나, 하다못해 저명한 교수나 평론가, 인기 작가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때 생각했다. 작품을 써서 보여줄 수밖에 없다. 작품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완성된 장편소설의 출판여부는 오리무중 상태니 빨리 새로운 작품을 써야만 했다. 그때 꽁트가 떠올랐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었다. 꽁트를 연재할 새로운 구상에 한참 빠져있는데 뜻밖에도 <청년사>와의 출판계약 소식이 전해졌다. 덕분에 묵은 숙제를 해결하고 홀가분하게 새로운 의욕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꽁트냐고?

 꽁트와 노동자는 닮은 꼴

1990년, <그해 여름>을 쓰기 위해 창원에 내려왔을 때, 노동현장과 노동자를 자주 접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에게는 시나 소설보다 꽁트가 더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꽁트는 소설과 비교해, 분량이 짧다는 점 외에도 독특한 차별성이 있다. 삶에 대한 낙관과 해학이 바로 그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에게서 느낀 것도 바로 이 삶의 낙관과 해학이다. 그러고 보면 꽁트와 노동자는 많이 닮았다.
이러한 꽁트를 통해 노동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꽁트가 노동자와 문학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혼자만의 꿈이었지만, 그때부터 꽁트를 노동문학의 새로운 장르로 실천하고 싶은 꿈을 꾸게 되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화산처럼 폭발한 노동운동은 노동문학을 급박하게 필요로 했다. 노동문학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미천한 역량을 돌아볼 틈도 없이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데만 급급했다. 주문은 빗발치지, 빨리 성과를 내놓고 싶은 조바심은 더하지, 그러다보니 쉬운 방법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총체적 삶을 성찰하면서 깊이 있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먼저 자기 이론을 세우고, 그 잣대로 현실을 재고, 그 이론에 맞는 현실의 전형을 끌어내는 식으로, 당위에 의해 글을 썼다. 여기에 효용성의 극대화를 위해 처음부터 ‘노동해방’이니 ‘파업’이니 ‘선봉’이니 하는 고강도의 단어와 소재를 남발했다. 노동자의 구체적 일상에서 출발, 의식화 단계를 거쳐 점차 투쟁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총체적 삶의 감동이 나오는 법이다. 이게 맞는 순서다. 그런데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나까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강하게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노동자의 개인사적 가족사적 다양한 삶은 하찮은 소재나 유약한 목소리로 치부되어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노동문학은 도식을 답습하면서 점차 식상해져갔다.
노동자들조차 노동문학을 외면했다. 노동문학은 노동자로부터 멀어져갔다. 위기였다. 변화가 필요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 다만 예전과는 다르게 시작하자. 시나 소설이 아닌, ‘꽁트’ 라는 새로운 장르로 말이다. 지금까지는 노동자의 총체적인 삶을 본격적으로 제대로 풍부하게 다루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현장의 치열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 개인과 그 가족의 삶도 다루자.

 왜 하필 전노신 연재인가?

그런데 막상 쓰려니 막막했다. 엄두가 안 났다. 아무리 내 이론이 맞고, 또 의지가 강철같다해도,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무작정 쓰기만 하면 되는, 그런 작업이 아니었다. 최소한 쓴 작품을 봐주고, 함께 감동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 누군가만 있다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전노신이 들어왔다.
전노신은 전노협 기관지다. 전국노동자들이 다 보는 신문이다. 그러니까 여기 실으면 최소한 전국 노동자들이 다 본다는 말이 된다. 수천명 독자가 생기는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힘이 났다. 전국 노동자들과 약속하면 싫든 좋든 꼼짝없이 써야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 전국 노동자들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으니 도망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거야. 나는 무릎을 쳤다. 내가 필요한 게 바로 이런 강제와 구속이었다. 결국 전노신 연재는 나를 강제하고 구속하는 배수진인 셈이었다.
그런데 전노신은 전국노동자들의 투쟁기사만으로도 지면이 터질 정도였다. 이런 신문에 웬 꽁트? 안 어울려. 이런 반응도 예상 못한 건 아니다.
원래 신문이란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안 좋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뉴스로 다룬다. 그러니 신문에는 큰 사건, 안 좋은 사건만 나오고, 자잘구레한 일상적 삶이나 좋은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무겁고 진지하기만 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힘들어서 외면하고 싶고, 무서워 도망가고 싶어진다. 가끔은 가벼운 듯 부드러운 위로의 말 한마디가 백 마디의 날선 선전선동보다 더 효과적일 때도 있는 법이다.
전노신 연재를 핑계로 전국의 노동현장을 구석구석 찾아가, 기름 냄새 먼지 냄새 땀 냄새를 맡아보고 싶었다. 거친 손도 잡아보고, 마주앉아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눈물 콧물 흘려가며 굽이굽이 살아온 노동자들의 사연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사람 냄새 풀풀 나는 노동자 꽁트를 써보고 싶었다.
다음날 나는 무턱대고 전노신 신문사를 찾아갔다. 맨 땅에 해딩하듯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편집자를 물어물어 찾아간 것이다. 처음엔 편집자들이 먼저 당황해 했다. 제 발로 찾아와 꽁트를 연재하겠다니 또라인가 아니면 프락치인가? 의심할 만도 했다. 하지만 꽁트 하나에 꽂힌 나는 낯 뜨거운 줄도 모르고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열정적으로 꽁트에 대해 설명했다. 덕분에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편집자들이 헤어질 때는 악수를 청하며 환하게 웃었다.

‘전노신 꽁트 연재’라는 무모한 도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91년 4월 11일자에  처음 인사한 해동이네

 노동자와 가족이 함께 하는 노동운동, 해동이네 연작 시리즈

흔히 노동운동 하면 현장 실천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 게 전부가 아니다. 현장 밖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도 부단히 실천하는 것이 노동운동이다. 최고의 성취단계는 가족을 설득해서 가족 전체가 함께 실천하는 것이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렵지만 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첫 꽁트 <유치원>(1991.4.11)은 해동이와 해자를 유치원에 보내는 대신, 가격이 훨씬 싼 어린이집에 보내, 이웃집 해고자 두 자녀를 포함해 네 아이들이 함께 다니게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엔 해고자를 돕는다는 현장문제만이 아니라 가정의 사교육비문제까지 포함되어있다.
노동자만 하는 운동은 아무리 잘해봤자 제 자리 걸음이다. 자칫하면 퇴보하기 십상이다. 아니 제대로 될 수도 없다.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삼촌과 이모, 아들과 딸 등 가족 전체가 참여하고 이해하고 협조해야한다. 최소한 부정하거나 방해하지는 말아야한다. 그래야 노동운동이 제대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런 노동운동이 되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쓰고 싶었던 건 바로 이런 이야기였다. 현장 투쟁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펼쳐지는 노동자 가족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상생활과 온갖 애환을 함께 담고 싶었다. 노동자 가족이 사회전체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소용돌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총체적 삶을 풀어내고 싶었다. 해동이네 연작 시리즈는 이렇게 하여 탄생했다.
그러다보니 등장인물이 가족 전체가 되었다. 해동이와 해자. 해동이 엄마와 아버지, 해동이 아빠의 회사 선후배, 해동이 이모와 해동이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다 등장한다. 시점은 주인공 해동의 시점이다. 여기엔 장단점이 있다. 딱딱하고 어려운 노동현장을 쉽게 풀어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는가하면, 소년의 시점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도 뚜렷하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전쟁터 같은 투쟁현장을 어떻게 소년의 시점으로 다 담아낸단 말인가.
고심 끝에 시점을 고정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양하게 바꿀 수 있게 했다. 말하자면 해동이네 연작에선 해동이 시점으로, 중간에 사안 별로 독립된 작품을 끼어 넣어 전체적으로 변화를 줄 경우엔 해동이 아빠의 시점으로 바꿨다. 때로는 엉뚱하게 자본가나 경찰의 시점으로 변용하는 모험도 해보았다. 노동자가 상대적 위치에 놓이니까 훨씬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보였다. 또한 시점의 변화가 주는 재미나 흥미도 유발할 수 있어 좋았다.
산재사망사고 세계 제1위이자 산재왕국인, 우리나라의 산재문제를 다룰 때였다. 노동현장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고, 경찰은 수사 끝에 범인이 바로 재벌사장임을 밝혀낸다. 이런 줄거리를 경찰의 시점으로 쓴 꽁트가 <꿈이여, 다시 한번>(1992.4.8)이다.
그런가하면 전노협 탄압의 수단이었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다룬 <만병통치약>(1991.4.23.)은 자본가가 스스로 자신들의 탐욕과 술책을 폭로하는 장치로, 자본가의 시점을 활용했다.
시급한 현장 투쟁의 현안을 다룰 때도 현장 안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가정이나 사회 저변으로 확대하여 사회문제화 하는데 주력했다. 예를 들어 부서통폐합이나 해고 등 고용관련 문제나 임금인상 등, 일상적인 현장 투쟁의 경우에도 가정이나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했다. 안 그러면 현장의 특수성, 노동자끼리의 이해관계, 제 밥그릇 챙기기로 인식되어, 사회로부터 고립되거나 왜곡될 위험이 있었다.
전노협 건설 후 노동자 의식은 지역에서 전국으로, 한 사업장에서 수많은 다양한 사업장으로 열배 스무배 확대되었고, 조합원 급증으로 그들의 요구 또한 다양해졌다. 삶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하게 뒤얽히는가. 임금인상 하나만 봐도 그렇다. 회사담장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물가와도 직결되고, 공공요금 집값 사교육비 의료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는 곧 사회적 비용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호루라기>(1991.8.29)는 해동이 아빠와 엄마의 냉전을 다룬 꽁트다. 처음에 남편의 노조위원장 후보출마에 반대하던 해동이 엄마는 뒤에 찬성 쪽으로 급선회한다. 그 반전의 배경에는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최후에 웃는 자>(1991.11.14)는 그 후속편으로, 해동이 아빠가 위원장선거에 당선된 날 밤의 풍경이다.
그런가하면 <부시와 부시맨>(1991.9.12)에서처럼 간혹 노동자의 정치사회적 위치나 입장을 짚어야 할 때도 있다. 자본이 해고나 고용불안이라는 탄압수단으로 겁박할 때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대항 아니면 굴복 둘 중 하나다. 해동이 아빠가 대항하자고 주장하자 일부 대의원들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거론하며 신중한 대처를 요구한다. 해동이 아빠는 울컥한다. “언제 우리가 소련보고 노조했냐? 소련을 제대로 배우려면 페레스트로이카를 본받아라.”
정치라고해서 대의명분이 다가 아니다. ‘민주주의’나 ‘남녀평등’ 같은 보편적 가치관의 실현도 중요하다. 노조 안이나 밖 어디서든 필요하다. 특히 가정에서는 더욱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주안의 대우전자로 취재 갔을 때였다. 사전에 노조와 연락을 취했고 신분증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비실에서 가방까지 보자는 통에 1시간이나 실랑이를 벌여야했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 <괜찮아유>(1991.8.15)에서는 유원지에서 경찰이 노동자에게 불심검문과 불법수색을 남발하는 경우를 다루어보았다. 말로는 민주주의라고 떠들면서 현실사회에서는 비민주적 불법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모순을 폭로한 것이다. 남녀평등 역시 말로만 떠들게 아니라 실천해야할 가치다. <남자가 여자를 만났을 때>(1991.7.11), <가을남자1>(1991.10.17), <가을남자2>(1991.10.31)등은 노동자의 연애를 통해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장을 펼쳐보였다.
그런가하면 아주 평범한 일상생활도 보편적 삶의 무대로 등장한다. <꿈보다 해몽>(1991.6.27)은, 해동이 엄마가 우연히 점쟁이로부터 남편 잘 못 만났다는 소리를 듣고 실망하자, 해동이 아빠가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뒤집은 도발적 해몽으로 아내를 위로하는 유쾌한 이야기다.
글 쓰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가 뭔지를 알아야 제기할 게 아닌가. 문제를 찾아 구체적 현실을 파고들다보니 여기가 바로 리얼리즘 문학의 입구임을 깨달았다.


콩트작가 김하경과 삽화를 맡은 정태원. 웃고 즐기는 글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건강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담은
 이야기를 엮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노신 인터뷰)


 역사의 현장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다

소재와 주제는 원칙적으로 자율에 맡겨졌다. 하지만 그때그때 급박하게 다루어야할 소재의 경우 전노신 편집자가 직접 관련노조와 연결시켜줘, 취재나 자료제공 등 각종 편의를 봐주었다. 덕분에 취재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첫 꽁트가 나가자마자 박창수 열사 의문사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한 달을 쉬었다. 이 사건의 직접적 계기는 전노협 특위의 하나인 대기업 연대회의다.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는 불가분의 관계다. 꽁트가 아니라도 꼭 현장 취재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안양병원에서 경수노련(경기수원노동자연합) 동지들의 피눈물 나는 사수투쟁에도 불구하고, 전경들에게 시신을 탈취당할 때는,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부산에서 하루 밤 묵으며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김진숙 동지가 목메인 추모사를 낭독할 때 영도시민을 비롯한 전 부산시민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던 모습은, 그대로 하나의 역사현장이었다.
원진 레이온에 취재 갔을 때였다. 공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매케한 독가스가 코를 찔렀다. 나도 모르게 코를 움켜쥐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이 이랬겠지 하는 짐작이 들었다. 공장안에는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오죽하면 어린 전경의 입에서 “나 같으면 이런 데서 일 안 한다. 차라리 노가다를 할망정.”이란 푸념이 나왔을까. 공장을 사수하는 원진 노동자들의 깊은 속을 나나 전경이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고 김봉환 장례식’에서 원진의 싸움이 고용 이상의 문제를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음을 어림잡아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제목은 <원진 사람들>(1991.5.30)이지만 내용은 해동이 아빠의 시점으로 그렸다.
안산의 삼양금속 조합원들과 농성장에서 밤새워 열띤 토론을 벌이던 추억도 새롭다. 회사와 경찰의 모질고도 질긴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선 젊은 조합원들의 뜨거운 열정과 패기를 <나폴레옹이 아닌가벼>(1991.7.25)에 제대로 담았는지 의문이다.
<남과 여>(1992.2.27)는 상여금 투쟁의 함성이 파도처럼 물결치던, 울산 현대자동차 파업현장을 다녀온 후 쓴 꽁트다. 투쟁의 내면이자 속살인 현장의 일상적 노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동차노동자들의 살인적 노동을 폭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녀구별 없이 서로를 챙겨주는 동료애를 통해서 뼈아픈 노동자의 현실을 실감케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과연 그 의도가 제대로 반영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1992년 투쟁의 하이라이트는 총액임금제투쟁이다. 이 투쟁의 선봉은 단연 창원 세일중공업(통일중공업)노조다. 노조는 자본과의 협상마저 지연시키면서 전국의 투쟁일정을 맞추기 위해 헌신했다. 그만큼 민주노조의 상징과 같은 노조다. 그 노조결사대와 함께 옥상에서 날밤을 지샌 긴긴 하룻밤이 <슬픈 첫사랑>(1992.6.17)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쉴 새 없이 울리던 경비조의 무전기 소리, 새벽을 가르던 헬기 소리가 지금도 귀가 따갑게 들리는 것만 같다. 결사대의 분노에 이글거리던 눈과 포효하던 함성소리를 들으면서도 눈 앞에 보이는 모든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상상 속 비현실의 세계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그 부박한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 순간, 불현 듯 슬픈 첫사랑의 이야기가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1992년 봄, 처음으로 노동자 출신 후보가 총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설렘을 안고 안산과 창원 두 군데를 뛰어다니며 취재하는 동안, 새로운 정치적 경험에 눈을 뜨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쉽게도 이런 얼굴들과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담아내지 못했다. 역량이 미치지 못해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뿐이다. 

꽁트 쓰기의 어려움

말 그대로 노동문학은 ‘노동’과 ‘문학’의 결합이다. 전혀 성질이 다른 두 물질 ‘노동’과 ‘문학’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제3의 물질 ‘노동문학’으로 변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동문학은 ‘노동’도 아니요 ‘문학’도 아니면서 동시에 ‘노동’이기도하고 ‘문학’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잘 하면 ‘노동문학’이지만,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아닌 어중잽이로 전락한다. 이 외줄타기 같은 노동문학의 신산함에 대해서는 김사인(시인겸 평론가)이 <호루라기> 서문에서 누구보다 탁월하게 분석해 놓았다.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만 보고할 요량이라면 글재간이 있는 기자나 르뽀 작가로 충분할 노릇이지 왜 하필 소설가를 들이대는 것이랴.......문학은 불가피하게 상당한 기간의 발표 숙성의 과정을 내부에서 거칠 것을 요구한다........소재나 제재라는 이름의 이야기 거리가 곧바로 문학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이러할 때 당면한 단기적 상황에 대처하는 응급성은 문학의 지극히 부수적인 기능일 뿐이다. 상황의 급박함에 호응하여 이루어진 시나 소설들 가운데 걸작이 없으란 법이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평소 작가의 관심과 마음의 준비가 상황에 걸맞을 만큼 충분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의 응급적 효용을 편협하게 관념적으로만 강요할 때 고유한 방식으로 해방에 기여한다는 문학의 이상은 그 깊이와 풍부함을 상실하고 천박한 예술 도구주의로 짜부라 들고 만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전노신은 격주로 발행되니까 정확히 2주일에 한 편씩 써야했다. 꾹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시간에 ?기다보면 속이 바짝바짝 탔다. 피가 말랐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꼭 좋은 작품을 썼을 거란 보장도 없지만, 그래도 시간제약이 없었다면 달라졌을 거란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그만큼 아쉽고 성에 안 찼다.
쓸 이야기들이 충분히 숙성할 때까지,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위적으로는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익기도 전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스럽고 턱턱 어딘가에 걸렸다. 이리 붙였다 저리 뗐다 몇 번이나 바꾸는 사이에 작품은 작품대로 너덜너덜 망가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끙끙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구상을 다 마쳐도, 순탄하게 글이 끝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10%도 안 되었다. 90%는 항상 중간에서 다시 구상단계로 되돌아가거나, 아님 처음부터 아예 새로 구상한 적도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몇 번이나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정말 두 다리를 뻗고 울고 싶었다. 빵구 내고 싶은 유혹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청한 일이니 누굴 원망하겠나. 후회한들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앞으로 갈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매번 지옥 같은 형벌을 겪다보니, 그것도 3개월쯤 매를 맞다보니, 맷집이 생긴 모양이다. 처음보다 덜 아프다. 제법 뒤를 돌아볼 여유마저 생겼다.

 전국 노동자들의 호응

3개월쯤 지나니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좋다 싫다 재미있다 없다 무슨 말이든 좋았다. 듣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도 어떻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궁금하다 못해 서운했다. 내 입으로 어떠냐고 묻기가 쑥스러웠지만, 참다못해 내가 먼저 편집자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재미있다 귀엽다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실례가 될까봐 말을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입에 바른 거짓말이라도 좋았다. 그 말 한마디에 그땐 용기백배 힘이 났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기뻤던 건, 현장에 취재하러 갔을 때다. 조합원들이 해동이네 이야기를 꺼내면 쥐구멍에라도 숨고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동시에 하늘을 날듯 신이 나기도 했다. 전국 노동자대회 때였다. 한 노동자가 불쑥 다가오더니 해동이 삼촌하고 이모하고 사귀게 되냐고 물었다. 그땐 정말이지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이런 독자들의 호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느 새 6개월이 훌쩍 지났다. 6개월 동안, 꼬박 한 달에 두 편씩, 혼자서 꽁트 13편을 완성했다. 작품의 질과 수준은 둘째고 한번도 빵구 안 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뿌듯했다.
그동안 복잡했던 개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창원으로의 이주를 단행했다. 어차피 선택한 거라면 제대로 해보자. 본격적으로 노동문학의 길을 찾아가보자. 답은 누가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혼자 찾는 수밖에 없다. 현장으로, 더 밑으로, 더 낮게 내려가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문학의 화두를 붙들고 현장이 있는 창원으로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전노신 연재가 문제였다. 이제 좀 재미가 붙을 만한데 여기서 중단하기는 좀 아까웠다. 무책임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또 다시 노동문학 문우들을 찾았다. 나 혼자 되든 안 되든 용을 써서 좋은 싫은 성과를 보였으니 다시 한번 제안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안재성, 윤동수, 김응교가 합세하기로 했다. 네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면 한 사람이 두 달에 한 편씩 쓰면 된다. 두 달이면 작품 하나 완성할 시간으로 충분했다. 부담이 훨씬 적어져서 그런가? 그때부터는 작품 쓰는 일이 즐거웠다.
이렇게해서, 1991년 11월 28일부터 네 명이 돌아가며 쓰기 시작하여 1992년 12월 3일까지 연재를 마쳤다. 그동안 연재된 꽁트는 나 17편, 윤동수 7편, 안재성 4편, 김응교 4편씩이다.
지금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다. 과연 이런 작업이 개인의 모험이나 도전정신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아니다.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세계 어디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나 중국 등 어느 나라에서도, 노동자신문에 꽁트를 연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참 대단한 시절이었다. 안 그런가?


* ‘전노신’은 ‘전국노동자신문’의 약자임. 
* 전노신 꽁트연재 내용
1인 단독집필 : 1991년 4월 11일~ 1991년 11월 14일
4인 공동집필 : 1991년 11월 28일~ 1992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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