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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우리의 도전도 끝나지 않았다_대한마이크로노동조합이야기(2)_이재성 (47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11-14 조회 1315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의 역사는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다. 1984, 1987, 1994년에 걸쳐 세 번이나 민주노조를 결성했던 대한마이크로 조합원들의 이야기는 인천지역에서조차 흘러간 역사일 뿐이다. 심지어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에는 대한마이크로 노조 투쟁이 실패한 투쟁이라고 평가하는 대목이 여과 없이 적혀 있다. 하지만 옛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조의 역사는 결코 실패한 것도, 지나가 버린 일도 아니다. 특히 1984년 첫 번째로 노동조합을 결성했던 조합원들에게 28년 전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들은 지금 자기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중에 있다. 그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그들만의 도전인 것이다.


  우리의 도전도 끝나지 않았다 - 대한마이크로노동조합 이야기(2)

    이재성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유혜자
(가명)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가을 경 대한마이크로에 입사했다. 처음 시작한 공장 일이었지만 컴퓨터 칩을 생산하는 대한마이크로의 노동조건은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1984년 봄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지만 처음엔 가입하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신뢰하는 언니가 노조 가입을 권유하여 조합원이 되었다. 이후 동료들과 부천 YMCA에서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 점차 노동조합에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해 갔다. 처음 배운 노동가요는 나 태어나 이 강산에로 시작하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였다. 처음에는 공장 다니는 것도 원하던 게 아니었고 자랑스럽지도 않아서 어색했다. ‘이 노래를 꼭 해야 하나생각했다. 노래는 점점 익숙해 졌고 나중에는 악에 받쳐서 불렀다


 회사는 노동조합을 없애려 했고 조합원들은 계속 긴장과 대립 속에서 살아야 했기에 그 시간들이 너무 힘이 들었다. 결국 노동조합이 회사에서 내몰리던 상황에서 한국노총 점거를 하게 되었다. 78일에 시작된 점거농성은 9일 만에 합의안이 나오면서 해결이 될 줄 알았다. 여의도 한국노총 건물을 떠나 부평경찰서로 이송된 것이 마침 제헌절인 717일이었다. 하지만 조사를 받은 조합원들은 회사로 옮겨져 강제로 감금되었다. 술을 먹은 남자 구사대원들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폐허가 된 기숙사 건물 방방마다 여성 조합원들이 두 세 사람씩 밀어 넣고 밖에서 못질을 했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불러내어 공장 기계실 등 음침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사직서를 받아내려고 소리를 지르며 위협했다.

  

<사진 1> 안개가 자욱한 대한마이크로전자 공장 전경이다. 미국 UCLA 국제정치학과를 졸업한 최만립 사장은 사업 쪽으로 진로를 전환하여 경력을 쌓았고, 197032세의 나이에 한국에 KMI(대한마이크로전자 주식회사)를 창업했다. 현대나 삼성이 아직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 이전이었다. 업종의 특성 상 노동조건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지만 노동조합에 대해서만큼은 적대적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노동교육을 받을 당시 알게 된 구사대원들의 성폭행 사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영영 살아 나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몰려 왔다. 옆에 누가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들의 살기어린 눈매에 눌려 사직서에 사인을 하고 말았다. 제헌절이라 아무도 없는 공장에서 사직서를 쓴 조합원들이 하나 둘 씩 풀려나왔다. 사직서를 쓴 조합원들은 공장 밖 조합원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 밖에는 없었다. 그대로 자취방에 가서 한 여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몇 날 몇 일을 지냈다. 한동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박정순(가명)은 사직서를 쓰지 않고 버텼다. 동료 조합원들이 울부짖고 심지어 기절을 해서 실려 나가는 조합원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당일 사직서를 쓰지 않는 조합원들은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몇몇 조합원들은 울면서 무서워서 회사에 못 가겠다며 정문에서 뒤돌아 나오고 있었다. 현장에 들어갔지만 조합원들은 따로 격리되어 일도 하지 못한 채 정신교육을 받아야 했다. 간부들과 구사대원들은 매일같이 조합원들에게 반성과 사직서를 강요했다. 심지어 새로 태어나야 한다며 억지로 관에 넣고 못질을 한 후 얼마 후에라야 꺼내주기도 했다. 억지로 관 속에 갇혀 못질 소리를 들을 때는 산 채로 죽을 것 같은공포를 느꼈다.

 현장에 있던 조합원들은 이런 정신개조작업을 몇 달 째 겪으며 결국 두 명을 남기고 모두 사직서를 쓰게 되었다. 현장에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기숙사에 격리되어 있던 조합원들도 하나 둘 회사를 떠났다. 곽순복 위원장을 비롯하여 핵심 간부 네 명이 구속되고 각각 16개월의 형이 선고되었다. 이 재판 중인 1111일에 곽순복 위원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지만 법원은 위원장이 결국 임종을 지키게 허락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 조합원들은 부평역 근처에 있던 자취방을 마이크로의 집이라 부르며 복직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또다시 취업을 해야 했다.

 박정순과 유혜자는 새로 다닐 공장을 알아보았으나 취업이 쉽지 않았다.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 같았다. 겨우 동서전자라는 작은 공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매우 열악한 조건이었다. 6개월 조용히 지내고 새 봄이 되자 간부 한 명이 두 사람을 불러 대한마이크로에 다닌 경력을 이력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며 해고를 통보했다. 동서전자의 모기업인 샤프전자로부터 블랙리스트가 온 것이었다. 박정순과 유혜자는 억울한 두 번째의 강제 해고에 기가 막혔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해고 철회를 위한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단 둘 만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회사 측에서는 조폭을 동원해 이들을 막았다. 차가운 봄바람보다 동료 노동자들의 무관심이 더욱 매섭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사진2> 1993년에 결성된 세 번째 노조의 노보 창간호. 사진에는 노동조합 깃발이 보인다.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자기 사업장에서 뿐 만 아니라 지역 다른 공장에서도 민주노조를 세우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도전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역 내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다.

 유혜자는 다시 알파제약에 들어갔다. 생산직이 30명 정도의 작은 의약품 공장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라서 작은 공장에도 노동조합이 속속 들어서는 분위기였다. 알파제약에도 학출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 마침 회사에서 점심식사가 너무 형편없이 나오는 것이 화가 나서 학출들에게 단체행동을 제안했고 회사 공장장과의 면담을 통해 식단을 개선했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 사이가 좋아진 상태에서 학출이 더 들어와서 그 작은 공장에 학출이 세 명이 되고, 다른 사업장에서 노조 위원장을 하던 사람까지 들어왔다. 노조가 안 생기면 이상한 그런 상황이 되었다.

 유혜자는 여러 활동가들의 추대를 받아서 노조 위원장이 되었다. 정작 자신은 자격도 없고 위원장 감도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학출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뒤로 빠지는 성향이 있었고, 활동가들의 준비 상황에서 떠밀려서집행부가 구성이 되었다. 그렇게 결성된 노조라 몇 개월 버틸 수가 없었다. 일 년도 못 버티고 다들 쫒겨 나왔다. 알파제약 노조 위원장으로서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사실 대한마이크로 당시를 다시 떠올렸다. 나는 당시 활동가들에게 신뢰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너무 갈등이 컸고 힘이 들었다. 노조가 정리되면서 구속되어 4개월 정도 옥살이도 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곽순복 위원장이 감내해야 했던 무거운 십자가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유혜자의 경험과 비슷하게 대한마이크로 노조 총무부 차장을 역임했던 김덕선(가명)한세실업에 취업을 하여 외부 학출활동가들과 연계 속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1988년에는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활동가들 사이의 갈등과 인식의 차이 때문에 이후의 노동조합운동 과정을 다소 부정적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급진적 반공개 조직이었던 인노련활동을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김덕선도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을 이끌어 간 학출활동가들과의 간격을 좁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또한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시각과 기준에 의해서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의 투쟁과 경험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에 대해서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유혜자와 김덕선의 경험에서처럼 당시 대한마이크로 노조의 지도부는 분열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곽순복 위원장이 리더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조현숙 총무부장(사무장 역)의 의견이 많이 관철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지역 내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이는 점차 지역 내 경쟁하는 이념그룹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었다. 다른 한편에 노조 간부들 다수는 부천 YMCA에서 황주석 선생(이후 최순영 YH 노조위원장의 남편이 됨)과 이혜란 등이 진행하는 노동교육의 영향을 강력히 받고 있었고, 또한 한국노총 간부인 유종설, 박기학의 열정적인 교육과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의 전통을 이은 한국노복의 도움과 지역 종교단체의 영향, 그리고 인근에 위치한 대우자동차 노조민주화 세력과의 교류도 적지 않았다.

  

<사진 3> 사내 공간에서 문화공연을 통한 교육을 진행 중인 노조원들. 풍물과 연극 등은 부천 YMCA와 놀이기획 신명 소속의 이혜란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이라 한다. 문화운동은 민주노조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혜란은 덕성여대 80학번으로 여성노동 및 문화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한국여성대회 주간에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의 역사는 지역 민주노조운동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과 1987년 이후의 흐름의 중간 시기에 어떤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는 대한마이크로 노조의 역사를 통해서 지역 노동운동의 여러 면면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1985년 당시 확산되던 급진적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급격히 전환된 노동운동의 흐름에서 볼 때, 1987년 이전의 여러 투쟁들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87년 이전 열악한 상황에서 활동했던 민주노조들에게 자신들의 경험과 투쟁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의 차이가 지역과 전국 수준의 노동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너무 간과되어 온 측면이 있다.

 과연 대한마이크로 노조의 투쟁이 실패한 투쟁인가?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사에서 부정적으로 규정되어 굳어진 역사적 평가에 대한마이크로 조합원들은 도전하고 있다. 그들의 도전은 그동안 노동운동사에서 잊혀져왔던 많은 노동조합과 그 조합원들에 대하여도 새로운 관심과 정당한 재평가를 요청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계속

 
 
대한마이크로 노보 창간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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