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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지역 1987년 노동자대투쟁
7월 27일 안양 한국제지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투쟁을 시작으로 일어난 경인·수원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우중공업 군포공장 투쟁을 거쳐 8월 중순경부터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초기 투쟁은 전국적인 투쟁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요구 조건을 쟁취하는 사업장이 많았지만 8월 20일 이후부터는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 정책과 그에 힘입은 기업주의 협상 회피로 쟁의가 장기화되었으며 구사대·경찰의 침탈도 계속돼 투쟁은 어렵게 전개됐다.
또한 경기남부지역 주요 대기업에서는 자본측이 매우 공세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예를 들어 8월 11일 투쟁을 시작한 금성전선 중기사업부의 경우 지역 내에서 모범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럭키금성 그룹의 방침에 따라 협상을 거부하고 21일 공권력을 투입해 투쟁을 분쇄시켰다. 이러한 대기업의 고압적 자세는 하청회사에 대한 강요로 이어졌다. 기아산업 하청회사인 서진산업의 경우 기아산업의 방침에 따라 협상을 거부한 것이 단적인 예다. 즉 이석규 열사 장례식 이후 정부의 강경방침을 재벌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협상이 아닌 공권력에 의존한 해결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대기업군의 이 지역 계열업체들은 다른 지역 업체들과 지역간 연대투쟁을 활발히 벌였다. 대우중공업의 경우 군포공장은 창원·인천·서울공장과 연대투쟁을 전개했고, 한일합섬 수원공장의 경우 마산공장과, 금성사 평택공장의 경우 창원·마산·구로공장과, 태평양화학 수원공장의 경우 서울 대림동 공장과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이 먼저 이 지역에서 시작되기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투쟁이 옮겨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편 이 지역의 노동운동은 수도권지역에서 취업한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나 현장 활동가들의 숫자에 비교해볼 때 사업장 내의 활동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1986년 화천프레스 임금인상 투쟁에서 학생출신 활동가가 해고돼 출근투쟁을 한 사례와 국제전기에서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파업이 전부였고, 1987년 초 임금인상 투쟁도 겨우 2곳에서 진행됐다. 이에 반해 자본가들의 탄압은 매우 거칠어서 창화기업의 경우에는 아무런 현장투쟁이 없었음에도 3명을 해고시켰고, 강제사표를 받거나 위장취업을 빌미로 구사대를 조직하여 폭력을 행사했다.
경기남부지역에는 삼성재벌이 밀집해 있기도 했는데 이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예방하기 위해 자진해서 임금을 18% 인상하고, 적극적인 고충처리 정책을 펴는가 하면 해고경력자 1명이 발견되면 같은 부서 노동자 20명을 해고하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 이중적인 대처로 노동자대투쟁의 불길을 피해나갔다. 삼성그룹이 창원이나 거제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던 데 비해 타협적으로 대응한 것은 삼성전자, 삼성전관 등 삼성그룹의 주력기업을 확실히 보호하겠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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