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청주 군시(郡是)제사공장 동맹파업(맹파) 김미화┃노동자역사 한내 1932년 12월 20일, 충청북도 청주군 사직동에 있는 군시제사공장 여공 4백여 명이 일제히 동맹파업을 단행했다. 일본인 감독 추산(秋山)과 여자감독 일기(壹岐), 두 감독 밑에서는 절대로 작업할 수 없다는 것을 내세우고 △대우 개선 △임금인상 △기숙사 확장 △운동장 설비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청주 군시제사공장은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으로 생사(명주실)를 생산했다. (1950년대) 청주경찰 당국은 동맹파업에 외부세력이 개입한 건 아닌지 의심하여 경찰을 총동원해 청주 시내 경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시내 곳곳을 수색했으며 기숙사와 공장 안팎을 에워싸고 며칠 동안 감시했다. 한편 사측은 노동자들의 요구 중 운동장설비 문제와 기숙사 확장은 겨울이 지나면 즉시 공사에 착수할 것과 성과급 지급을 약속했으나 일본인 감독 교체는 불가함을 제시하고 복귀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파업의 근본 원인은 일본인 감독이므로 사측의 제안을 거절하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에 12월 23일 사측은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고 파업노동자 4백 명 전원을 해고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간 노동자 집을 방문해 무조건 복귀하면 해고는 면할 수 있다면서 회유와 설득작업을 벌였다. 12월 30일 청주경찰 당국은 괴산읍으로 돌아간 8명 중 전복희, 이을순, 강석분 3인을 파업주동자로 지목해 집을 수색하고 노래책, 편지 등을 압수하고 그들을 청주로 압송했으나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군시제사공장 파업은 해를 넘겨 1933년까지 계속됐다. 사측은 복귀하려는 2백 명과 새롭게 모집한 2백 명으로 1933년 2월 18일부터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파업 대오가 계속 투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상조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2개월이 넘는 완강한 투쟁으로 일본 본사는 모든 잘못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인정하며 해고한 노동자 전원을 복직시켰다. 청주 군시제사공장 파업은 노동자들이 끝까지 싸워서 요구를 관철하고 전원이 복직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한 동맹파업이었다. 1933년 3월 3일 〈동아일보〉는 “노동자가 이긴 희한한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군시제사공장이 있던 청주 사직사거리는 현재 고층아파트와 사직재래시장, 병원 등이 들어서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33년 3월 3일 〈동아일보〉는 "맹파(동맹파업)공 전부복직, 희한한 직공측 승리"라고 보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