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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노동자 정치동맹파업투쟁(1989년 4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9-04-15 조회 468

부천노동자 정치동맹파업투쟁

 

시기 : 1989년 4월 9일 ~ 4월 15일

 

 

1989415일 부천에서는 629선언 이후 최초의 지역 총파업이 수행됐다. 49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부천지역 임금인상 완전 쟁취 전진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1,500여 명의 노동자가 부천역에 집결해 대회 장소로 가두행진을 하던 중 경찰이 직격 최루탄을 발사해 머리가 깨지고 손가락이 절단되는 등 20여 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천투본은 대회은 부천경찰서에 항의 방문해 연행자 석방과 부상자 치료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도리어 항의방문한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강제 해산시켰다. 이에 부천지역 노동자들은 구속자들이 석방될 때까지 투쟁을 결의하고 415일 마침내 총파업에 돌입했다.

 

투쟁 경과

 

49일 부천지역 노동자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부천역에서 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부천지역 임금인상 완전쟁취 전진대회를 개최한 후 성심여대를 향해 평화적인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들이 직격 최루탄을 퍼붓자, 가두투쟁을 전개하며 성심여대로 재집결해,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격전 후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20여 명이 중상을 입고 대거 연행됐다. 본부장 등 50여 명이 항의 방문해 연행자 중 7명이 석방됐으나, 부상자 치료와 연행자 전원 석방 요구에는 답변이 없었다.

 

410100여 명이 대책을 요구하며 경찰서 대기실을 점거농성하자 백골단을 투입, 협상대표한테까지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공성통신노조 위원장(광대뼈 함몰), 풍원노조 위원장(이마 함몰) 등 많은 노동자가 크게 다쳤다. 411일 항의차 방문한 한경석 본부장과 임동섭 상황실장이 전격 구속됐고, 상황을 듣고 달려온 조합원들을 다시 구타해 6명이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크게 다쳤다.

 

412일 오전 11시 부천지역 전체 위원장단 회의에서 노동운동 탄압과 구속노동자 석방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대책을 논의했다. 저녁 7시 다시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50여 개 노조 간부 2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구속자 석방 투쟁을 결의하는 한편 지구별 규탄대회가 자발적으로 개최됐다. 413일 신광전자에서 500여 명의 조합원이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를 개최한 뒤 가두투쟁을 벌이며 내동파출소, 도당동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대중적 분노가 폭발했다. 414일 지구별로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를 열고 2개의 홍보시위대가 춘의동 사거리에서 합류, 1,000여 명에 달한 조합원들이 가두투쟁을 전개해여 전투경찰 무장해제 직전까지 몰아갔다.

 

415일 총파업을 결행한 49개 노동조합 총 4,000여 명이 결집해, 지역 내 백골단을 포함한 1,500여 명의 경찰과 약 3시간에 걸친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시위 도중 독점재벌의 상징인 현대자동차 영업소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오후 5시 대아노조에 집결해 415투쟁 보고대회로 마무리했다. 425일에는 신광전자에서 250여 명이 참여한 노동조합간부 확대평가회의에서 415투쟁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평가토론을 진행했다.

 

415 가두투쟁

 

415가두투쟁은 내동지구, 춘의지구(원미, 남부지구 포함), 도당지구 등 3개 지구로 나누어 집결해서, 부천역을 향해 풍물대, 전투조를 앞세워 진격했다. 각각은 가로막는 전경들을 소수 전투조로 막으면서 신속하게 이동해 부천역으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내동지구는 20개 노조 2,000여 명이 대흥기계 앞에 11시 집결해 내동공단 시위 후 1130분 출발했다. 오후 1시 내동파출소 앞에서 8대의 경찰버스와 대치, 본대 중 30명만 대치하고 나머지 대오는 공단 골목을 통해 내동고개를 지나 삼성반도체 앞으로 진출했다. 다시 전투조 30명이 뒤쫓아온 전경들과 대치하고 나머지는 시험장을 지나 230분 부천역으로 진출, 부천역 앞 현대그룹 건물을 타격하고 뒤늦게 진출한 도당지구대와 춘의·원미지구대로 나누어서 합류했다.

 

춘의·원미·남부지구는 약 12개 노조 700여 명이 대아기계 앞에서 집결, 오후 2시에 출발해서 부천역 오른쪽 소신여객 방면으로 진출했다. 대오는 1시간 동안 적들과 대치, 투석전을 전개하다 내동지구대와 합류했다. 도당지구는 10개 노조 500여 명이 11시 연경전자 앞에 집결, 내동지구대가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고 게릴라식으로 이동했다. 논둑길을 통과, 부천역 왼쪽 전신전화국 방면으로 진출해 전경 약 600700여 명과 약 40분간 투석전을 벌였다.

 

이렇게 진격한 3개 지구대는 부천역에서 최종집결지인 대아기계로 귀환해 49개 노조 총 5,500여 명의 조합원이 참가한 415총파업 정리집회를 열고, 투쟁을 마무리했다.

 

415총파업 이후 탄압에 맞선 대응투쟁

 

415총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최초의 지역총파업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천 노동자들은 급격히 전투력이 고양되돼 가두시위가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정권과 자본가 역시 노동자들의 기세를 강제로라도 꺾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폭력경찰은 418일 당시 파업 중이던 대흥로크와 우일노동조합 등에 기습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해 파업 대오를 해산시키고 주요 간부 등 178명를 전격 연행해 3명의 위원장을 포함한 4명을 구속했다. 부천투본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공권력이 투입된 노조들의 투쟁에 끝까지 연대헤 승리로 이끌었으며, 419일에는 당시 외국자본 철수문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한국피코에서 외국자본 철수저지 및 노동운동탄압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러한 동력을 모아 51일에는 약 3,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고 3시간에 걸쳐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512일에는 그때까지 파업 중이던 8개 노조가 임금인상 및 민주노조사수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18일에는 파업 중인 반도스포츠에서 원천봉쇄를 뚫고 700여 명의 노동자가 구속자 석방 및 임투 완전승리 쟁취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531일 부천지역 노동조합 확대간부회의, 62구속자 석방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삼정동성당)를 잇달아 열어 대중적인 투쟁분위기를 높여나갔다. 그러던 중 611, 삼령정밀과 연경전자에 공권력이 투입되자 위원장단 전원이 13일부터 반도스포츠에서 4일간의 단식투쟁을 하고, 616일에는 구속동지 석방 및 노조탄압 분쇄 결의대회를 여는 등 쉼 없는 투쟁을 이어갔다. 부천지역의 노동자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에 대한 애정과 공감대를 확산시켜 낼 수 있었다.

 

415총파업의 의의

 

415총파업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강화되어온 민주노조 역량을 토대로 하면서도 개별사업장의 경제적 요구나 투쟁을 한 단계 뛰어넘어 지역 차원에서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수행된 정치동맹파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현대중공업 진압 작전 이후 더욱 노골화된 공권력에 맞서기에는 한계가 있었음에도 과감한 대중투쟁으로 노동운동탄압 분쇄투쟁의 전선을 다시 회복했다는 데도 의의가 있었다.

 

한편 411일 투쟁지도부의 일부가 구속된 데 대해 대중은 투쟁 의지가 솟구치고 있었으나 지도부는 수세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지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훈련은 물론 대중에 대한 헌신성과 투쟁성이 더욱 강화되어야 함이 과제로 제기된 것이다. 또한 지역 노동운동의 주축이 될 대공장의 민주노조 건설과 역량 강화도 과제로 드러났다. 부천에서 대공장 민주노조라고 할 수 있는 경원세기와 동양에레베이타 노조는 이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동양에레베이타노조는 당시 선거 중이었으므로 논외로 치더라도, 경원세기노조조차 한국노총 민주화입장을 고집하면서 부천투본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경향이 415투쟁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4915일 총파업투쟁 이후 418 공권력 투입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전국적 연대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부천지역만의 투쟁으로 마무리됨으로써 노동자의 전국적 연대조직 건설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제기됐다.

  

참고자료 :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부노협 백서> (1996.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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