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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준비4호]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연애
글 : 박문진 (발기인) 사진 : 영남대병원지부 제공 http://cafe.daum.net/ynuh1
때하나 묻어있지 않은 새파란 바다는 새까만 바위에만 가끔씩 제 몸 부딪히며 자신의 존재를 살짝 확인시키고 그 큰 몸을 살며시 뒤척이며 흐르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게 고요히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 큰 몸이 소리치며 일어설 때 우린 안다. 하여튼 넓고 깊고 우람한 것들은 주변의 사소한 것에 함부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니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소리 나지 않게 품는 것이다. 바다가 비에 젖지 않는 것처럼........
적들에게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사들를 너무 많이 잃은 장수가 느끼는 처절한 패배의 고독함과 무기력함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심전심으로 두 명의 간부와 배낭을 쌌다. 그늘 한 자락 없는 ‘제주 올레’ 길을 며칠 동안 무진장 걸었다.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꾹꾹 밟으면서 내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배낭만큼 버거운 내 팔자를 원망했다. 해고자인 우린 여행경비를 줄이기 위해 찜질방을 적극 이용했다. 지친 몸을 풀고 땀에 젖은 옷들을 뽀송뽀송하게 해결하는 데는 그만이었다. 자다가 중간에 일어나 빨래 확인을 하러 (가끔씩 주인이 걷어감) 70도가 넘는 방에 들어가 갖가지 속옷과 겉옷들이 마치 내 집 안방에 쫘악 깔아 놓은 것 같은 엄청난 당당한 양을 보면서 지난 활동들이 왜 겹쳐 일어나는 것일까.
오지나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자 간호사가 되었고 사회의 안락한 유혹에 뒤돌아보지 말고 떠나자 했던 것이 훌쩍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해가고 있다. 90년 어용 집행부가 3% 임금인상에 합의하고 자진사퇴한 자리를 단협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지도 모르고 덥썩 위원장을 맡았다. 참 열심히 열정적으로 가장 원칙적으로 활동했던 시절이었다. 집안 제사보다도, 결혼기념일보다도, 부모님 생신보다도, 지역 사업장의 철야농성 지지방문이 우선이었고, 파업 사수대를 자청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시절이었다.

사진 1. 2006년 영남대의료원지부 총파업투쟁 당시, 병원로비에 가득찬 조합원들
“병동가서 환자들 돌볼 손금이 아니다”라는 한 조합원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현장 내려갈 생각으로 임기 마지막 임단투 준비를 하던 95년, 그 조합원의 말이 적중이라도 하듯 6월에 병원노련 위원장을 맡게 되고 그해 7월에 영남대병원노조는 주황색 노조 티셔츠가 바래질 때까지 50일간 장기파업을 했다. 공권력 투입 후에도 재파업을 성사시키며 끈질기게 파업투쟁을 이어나갔다.
닭장차 안에서도 노래와 구호로 차를 몇 번씩 세우기도하고 밤새조사 받으며 야식과 생리대를 요구하며 기죽지 않았던 조합원들. 경찰서에서 교도소로 끌려가던 날 울면서 신발이 벗겨진 채 호송차를 따라 뛰는 조합원들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95년 민주노총 건설과 부위원장 당선 소식도 감옥 안에서 전해 들어야했다. 조합원들의 견고하고 정의로운 눈빛을 간직하고 석방되던 96년 2월부터 병원노련 활동을 시작했다. 지역에서 올라온 나에게 중앙과 전국에서 쉴 틈이 없이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의료산별노조를 만들어가는 일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사진 2. 조합원들의 활기찬 모습
김영삼의 노동악법 국회통과 준비에 맞서 민주노총은 삭발투쟁과 총파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결국 김영삼은 96년 12월 26일 새벽 들고양이들처럼 160여 명의 신한국당 의원들을 버스로 호송하여 10분도 채 되지 않아 노동악법과 안기부법을 기습적으로 날치기 통과시켰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을 선언했고 명동성당에 천막을 치고 파대본(파업대책본부)을 차렸다. 기아자동차노조를 선두로 민주노총 총파업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백골단의 최루탄가스에 아랑고하지 않고 동지들의 파업은 힘차게 진행되었다. 명동성당 천막은 국제연대와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가 끊이지 않았다, 좁은 천막안에서 수배받고 있는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7-8명의 발냄새 물씬나는 남성 동지들 틈에 끼여 여자 혼자 새우잠을 자는 것은 추위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언제나 노란 병원노련 깃발은 전선의 선두에서 당당히 펄렁이며 많은 동지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노동법 재개정 합의로 총파업은 정리되었지만 민주노총보다 야당이 그 성과를 가져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래서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을 많이 했던것 같다. 정부와 정리해고 합의로 민주노총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즉각 임시대의원대회를 진행했지만, 각목을 들고 항의를 할 정도로 조합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렸다. 민주노총 임원 모두는 총사퇴하고 비대위를 구성하여 다시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결국 비대위 스스로 총파업을 폐기하면서 조합원들에게 커다란 실망감과 분노만 남겼다.
병원노련은 총파업의 실제적 경험으로 자신감을 갖고 98년 2월 의료산별노조를 결성하게 된다. 2000년 복직하여 현장에 들어갔지만 2001년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당선된다.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서 화염병이 몇 년 만에 등장할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고, 백골단에 의해 대우자동차노조 동지들이 백주대낮에 방패로 엄청 맞아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발전산업노조의 영웅적인 투쟁을 어용적인 합의로 구속되어 있는 단병호 위원장을 제외하고, 민주노총 임원들이 총사퇴하여 다시 현장에 복귀하였다.
2006년과 20007년 영남대병원노조의 힘겨운 투쟁으로 조합원 700여 명이 조합을 탈퇴했고, 사측의 조합비 가압류 손배로 가장 치욕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7명의 해고자가 발생했다.

사진 3. 민주노조사수를 다짐하는 조합원
빼앗긴 조합원들과 빼앗긴 조합원들의 영혼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난 다시 연애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다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고, 함부로 타협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싸울 것을 명했던 조합원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소리나지 않게 흐르는 저 깊은 바다처럼 함께 해방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널려진 빨래들이 우리 조합원들의, 그리고 자꾸만 자본의 품에 안기려는 노사협조주의를 버리고, 결혼기념일보다 동지들을 먼저 챙겼던 그 뜨거웠던 사랑의 깃발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나를 챙긴다. 이런 다짐이라도 할라고 바다가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낼 지노위서 복직 판정받은 2차 재해고자들이 중노위서 정당해고로 판정받아 우린 중노위 앞에 노숙투쟁을 하러 다시 배낭을 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