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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일하며 배우되 입다물고 복종하라 : 충남예덕실업고 학생노동자 투쟁 _정경원 (38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02-09 조회 4254
 
다 나와라!”, “기숙사 시설 개선하라!”, “임금 인상하라!”, “우리 남광균 선생님을 돌려 달라!” 예덕실업고 학생들은 어렸지만 분명 노동자였다. 노동자로서의 요구를 걸고 끈질기게 투쟁하여 회사가 손들게 하였고 산업체학교 문제를 알렸다.
 
 
일하며 배우되 입다물고 복종하라 : 충남 예덕실업고 학생노동자 투쟁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친구들이 여관에 납치돼 있어요! 계장과 주임이 이럴 수 있는 겁니까?”
1988212일 저녁.
한 여성이 충남방적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와 항의하였다.
그녀는 예덕실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6시경 관리자 현창섭(코연조 계장), 이형호(로라실 계장), 정모(주전반 담임) 3명이 여성노동자 4명을 불러내 봉고차에 태웠다. 차가 멈춰 선 곳은 여관이었고 여성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끌려 들어갔다. 한 명이 뛰쳐나와 그대로 회사로 가 항의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나서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이런 만행은 회사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회사는 쉬쉬하면서 현창섭을 해고하고 피해 학생들도 해고해 폭행사실을 무마했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예덕실업고등학교는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충남방적의 부설학교였다. 산업체 부설학교는 1,000명 이상 규모 산업체에 설립 가능하였다. 1977년에 처음 5개 학교 7,208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어 계속 증가하였고 1989년에는 43개 학교 47,860명이었다. 경방, 방림방적, 태광산업, 제일모직, 한일합섬, 충남방적, 코오롱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업이 부설학교를 운영했다. 199141개 학교 33,317명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10여 개로 줄었고 결국 부산의 시온실업고만 남게 됐다.
산업체 부설학교는 왜 생겼을까? 정권과 자본은 일하며 배우고 싶다는 취업청소년들의 향학열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청소년을 교육을 미끼로 잡아두거나 임금동결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대부분 수업료를 회사가 부담하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면 즉시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현실이 학생들의 발목을 잡았다.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최소 3년간 노동자의 이직을 막아 지속적이고 원활한 노동력 확보가 가능한 것이다.
산업체 부설학교가 세워진 직종은 주로 봉제, 섬유, 고무 등 임금이 낮으면서 노동조건이 나빠 노동력 이동이 심한 부분이었다. 대부분 여성노동자였다. 임금을 보더라도 회사는 1년에 1인당 5만원씩만(1988년 당시) 학비로 부담하면 되고, 대신 3년간 임금인상 대상에서 제외하니 오히려 두 배 이상 이익을 남겼다. 교육기관에게 주는 경비, 세금 면제까지 따지면 이득이 컸다. (한겨레신문, 1988.10.9.)

산업체학교 학생들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한겨레신문 1988.10.9.)
 
이런 상황이었지만 학생들을 대변해줄 세력은 없었다. 학교 교사들도 외면하며 숨죽이고 있었다. 노조 활동을 하면 당장 해고라는 협박에 시달렸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나서 싸워준 선생님은 음악을 가르치던 남광균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쳤고 노동자의 삶에 대해 알려줬다. 학교의 미움을 받아 19882월 부임 1년만에 해고되었다. 이 소식은 학생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19878월 충남방직 대전공장 노동자 4,500여 명이 농성에 돌입했는데 노동자 90% 이상이 예덕실업고 학생이었다. 87년의 파업투쟁은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요구를 걸고 싸우며 산업체부설학교 문제를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다 나와라!”, “기숙사 시설 개선하라!”, “임금 인상하라!”, “우리 남광균 선생님을 돌려 달라!”
1988321일 새벽 430. 기숙사에서 1,600명이 넘는 학생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730분 학교에 모여 학생들은 요구사항을 정식으로 만들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어린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를 당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년에 설, 추석 포함 휴가 3일을 5일로 연장할 것, 졸업식 당일을 전 학년 휴일로 해줄 것, 방 한 칸에 8명이 숙식하고 습기로 피부병이 생기므로 이를 개선할 것, 인권존중(폭력과 폭언 근절), 남광균 교사 복직, 현 임금 초봉 7만원, 3개월 후 9만원, 10개월 후 10만원은 최저임금도 안 되므로 섬유업체 임금인상액의 20%를 더 지급할 것, 야근수당을 지급할 것 등이었다.
 
학생들은 학급 반장과 부반장 60명으로 대표단을 구성하여 회사측 대표와 교섭을 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타결하였으나 관리상무와 이사장 사인이 똑같아 다시 농성이 이어졌다. 학생들을 속여 위기상황만 모면해 보겠다는 술수였으나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가 협박하고 주동자 60여 명을 기숙사에서 쫓아내기까지 했지만 학생노동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24일 저녁 임금인상을 제외한 모든 요구조건을 수락하겠으며 임금은 노조를 통해 여론이 수렴되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서면 약속을 받고 농성을 풀었다.
예덕실업고 학생들은 어렸지만 분명 노동자였다. 노동자로서의 요구를 걸고 끈질기게 투쟁하여 회사가 손들게 하였고 산업체학교 문제를 알렸다.
 

1977년 개교해 2005년 2월 마지막 졸업식을 한 충북 양백상고 학생들이 일하는 모습 (사진 충북인 뉴스)
 
요즘은 청소년과 노동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생소하다고 느낄 정도로 학생과 노동자 구분이 명확하다. 하지만 실제 학생노동자는 주변에 널려있다. 산업체학교는 사라졌지만 실업계, 전문계 고등학교가 있고 고3 현장실습제도가 문제되고 있다. 노무현정부 들어 폐지되었던 현장실습제도를 이명박 정부는 일자리 실적 때문에 다시 부활시켰고 얼마 전에는 실습생이 쓰러져 의식불명되는 일도 생겼다.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중?고등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도 흔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8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하고 전문계고는 절반 이상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한다.
일하는 학생은 노동자다. 노동운동진영은 다시 학생노동자 문제를 관심의 중심에 두어야 하지 않겠나.
 
남광균 선생님은 1988년 예덕실업고 학생노동자 투쟁 이후 배후조종 혐의로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석방 후 충남교사협의회의 간사로 일하면서 전교조 결성과 활동에 앞장섰다. 10년이 넘는 해직의 고통 끝에 대천여중에 복직하였으나 암으로 투병하였고 2001721일 운명하였다.
  
참고한 책 : <전노협백서> 
 
 
 
이달의역사_한겨레1988100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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