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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뉴스레터 창간호] 이달의 노동열사
노동운동가 박태순 열사
글 : 김갑수 회원, 박태순열사추모사업회장 / 사진 : 박태순열사추모사업회
학생운동을 하다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와 함께 하겠다는 굳은 꿈을 갖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운동을 시작했다. 위장취업한 조그만 영세사업장이지만 노동운동의 대의를 위해 묵묵히 현장에서 버티며 생활하던 박태순 동지가 1992년 8월 29일 사라졌다. 주위 동료와 가족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살아있을 거라는 한 가닥 꿈을 안고......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열사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국회앞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422일 동안 천막농성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우리는 행방불명된 박태순 동지의 진상규명을 위해 위원회에 접수하였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최초의 성과로 박태순 동지에 대해 확인하였다.

<그 당시의 신문기사 내용>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92년 2월 15일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진 노동운동가 박태순(행방불명 당시 26세)씨에 대한 조사결과 박씨가 92년 경기 고양시 벽제공원묘지에 가매장됐다가 98년 화장돼 파주시 용미리 무연고 사망자 유골 안치소인 ''''''''''''''''추모의 집''''''''''''''''에 안치된 사실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진상규명위가 조사대상 사건 가운데 행불자의 신원과 유골의 소재지를 밝혀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상규명위는 앞으로 박씨의 사망경위와 그 과정에서 공권력이 개입했는지 여부 등을 정밀 조사할 방침이다. 사망 당시 경찰기록에는 박씨가 92년 8월 29일 오후 9시 55분경 서울 구로구 시흥1동 경부선 하행선 서울기점 17km 선로 위에서 열차사고로 사망했으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행려 사망자로 처리했다고 돼있다. 박씨는 87년부터 수원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해오다 89년 수원지검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돼 1년 6개월간 복역했으며 91년 출소 후 노동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병무청의 군소집영장 수치를 거부하다 관계기관의 추적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행방불명 된 박태순 동지는 9년만에 한줌 재로 우리곁에 돌아왔다. 의문의 실종을 당한지 9년, 그 까마득한 세월을 넘어 열차사고자로, 성명불상의 변사자로, 행려사망자로 처리되고 함부로 취급되어 벽제 무연고자 납골당에 화장된 채 재만 남아 돌아왔다. 이 허망하고 황당한 사실을 어찌 믿으라 말인가? 우리는 그가 왜 죽어야 했는지, 또 그 죽음은 왜 그 긴 세월동안 묻혀져 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 안타까운 마음과 분노를 모아 그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총력으로 나설것이다. 우리는 그간 가족, 동문 및 각계의 민주인사들과 더불어 “박태순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를 꾸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상당한 진척을 거두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1, 2기 활동과정에서 구체적인 사실들을 확인했다. 박태순 동지는 공안기관의 미행, 감시로 인해 어렵게 활동하고 있었고, 다니던 공장에 기관원이 찾아왔고, 주거지까지 수색을 당했으며 그 당시 군입영을 거부한 상태로 경찰뿐 아니라 기무사의 감시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기무사령부에는 1991년부터 92년까지 군내 좌경의식 오염과 확산방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마파람 사업”이라는 공작으로 감시하였고 박태순 동지와 동료들이 A급 대상자로 내사를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기무사는 박태순 동지와 수원지검 점거농성을 함께하였던 동료 이모씨(그 당시 군입대)를 대상으로 오랫동안 내사하였고 공안사건으로 조작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도 확인하였다. 당시 박태순 동지를 내사하였던 기무사 요원들이 박태순 동지 사망 직후인 92년 9월 초에 박태순 동지의 사망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과 진술도 확보할 수 있었다. 군 내부와 노동현장을 엮은 조직사건을 만들려고 그린 내사 체계도에 박태순 동지가 정확히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의문의 죽음과 관련된 정확한 확인을 하지 못하고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1, 2기가 끝났다. 우리는 또 다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 재접수하였고 명백한 공권력에 의한 타살을 증명하고 확인하기위해 노력할 것이다.

[박태순 동지 약력] 1966. 9. 12 경기도 출생 / 1985. 3. 서울 영등포고등학교 졸업. 고등학교때부터 문학써클에 가입하여 친구들과 모임을 함께하며 운동을 결심함 / 1985. 3. 한신대학교 (철학과) 입학하여 정치사회적 민주화룰 지향하는 서클에 가입하여 각종 집회와 시위에 열정적으로 참여함 / 노동자와 함께하는 삶을 살기 위해 1987년 노동현장에 투신, 수원지역 노동운동 조직에 가입하여 수원지역에서 공장활동함 / 1989. 5. 20 수원 검찰청 검거농성으로 "폭력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구속, 1년6월 복역 함 / 1990. 11. 13 부산교도소 만기 출소, 이후 노동운동을 계속 함 / 1991. 병무청 영장수취 거부로 주민등록 말소, 기무사의 추적을 받음 / 1992. 수원, 부천 등지에서 노동운동 전개 / 1992. 8. 29 직장 퇴근 후 귀가 중 행방불명 됨 / 2001. 2. 15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1992. 8. 29 21:55경 시흥역(서울기점 17.1km지점)에서 광주행 무궁화호와 충돌 두부파열로 인해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짐. 시신은 신원불명의 변사자로 분류되어 가매장된 후 현재는 용미리소재 무연고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고 2001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확인으로 사망한지 9년만에 2001년 8월 25일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에 안치됨.
트로트와 뽕짝을 멋들어지게 불러 모든 사람을 기쁘고 즐겁게 해준 동지,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과 열정을 가졌던 동지, 투쟁과정에서는 누구보다도 치열했던 동지, 항상 해맑은 미소와 웃음으로 우리에게 든든한 동지였는데,,,, 2008년 8월 24일 박태순 동지 16주기 추모제를 진행했다. 아직까지도 의문사의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지 못한 채 또 한해를 보냈다. 작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회”의 민주화 관련 불인정으로 사십일간 농성으로 소기의 성과를 내오긴 했지만 아직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불투명하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잔상 : 1991. 2. 1~2. 14 (박태순 동지 글 중에서)
"마석 모란에 가보지는 못했다. 전태일과 박영진과 문송연이 박종철이 강민호가 있는곳 그리고 또 다른 이름들이 있는 곳. 거기에 묻혀질라고 두런거려 본다. 비가 우둑거리면 받쳐든 우산이 그 우산에 가려진 얼굴들에 그늘이 드려 지겠지. 하다못해 꽃 한송이 조금 들고 울어줄 친구라도 다른 동지들을 찾기 위해 왔다 들려줄 것이다. 와서 동지가를 목청껏 불러주면 더없이 고마울 것이다. 그렇듯 시간이 흐르려면 무수한 싸움을 몸에 새겨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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