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짐 싸다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은 노동자기업경영연구소(노기연)와 공간을 같이 쓰고 있어서 성수동 단독주택 보증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운영비가 넉넉하지 않았다.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의 수입은 김종배추모사업회 월 회비 40여만 원이 다였다. 그 외 수익구조는 없었다. 자원봉사자 교통비도 제대로 주지 못했지만 자원봉사자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자료실에 상근했던 정경원은 전노협백서를 만든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조교로 있으면서 법과대학 역사서를 맡아 만들었다. 이 무슨 일이고~~. 노동법 공부보다 법과대학 역사를 쓰기 위해 선배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게 더 흥미로웠으니. 그러던 중 김종배 동지가 운명했고 정경원은 졸업 후 다시 자료실로 돌아왔다. )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은 전태일자료실과 함께 자료정리 방법을 공유하고 목록정리 폼을 맞추는 등 노동운동자료관리를 위한 체계를 갖추려 노력했다. 당시 전태일자료실은 이형숙이 관리하고 있었고 유경순 선생과 정경원 이렇게 셋이 자주 모였다. 이 즈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노동운동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성공회대민주자료관, 전태일자료관, 노동운동역사자료실, 영동포산선을 모아 자료 기증을 요청했다. "자료는 그 단체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므로 기증할 수 없다"는 게 단체들의 의견이었다. 자료 기증 대신 통합관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면 어느 곳에서든 어떤 단체든 자료를 등록하고 통일적으로 관리할 수 있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국가 예산으로 하는 사업이라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의 모임은 그것으로 끝났다. 자료실은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재정 문제로. 그 많은 자료와 책들은 다시 박스에 담겼다. 당진에 있는 양규헌 동지 친척 집, 정경원 친가 등에 자료를 나눠 보관했다. 모빌랙과 책장은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 옮겨졌다. 김진균 선생님이 기증하신 도서 일부도 함께. 그리고 나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자료실 상근활동을 시작한다.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이 현재를 기록하자며 발간한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투쟁백서 517일의 외침] 관련 기사 (한겨레신문 2003.1.31) 전 한통계약직노조 이운재 선전국장의 말처럼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우리는 졌지만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승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2004년엔 어려운 일이 많았다. 노동운동역사자료실 문을 닫았고 우리의 든든한 뒷배였던 김진균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은 80년 여름 신군부 집권에 대한 지식인 134인 성명과 서울대 교수 시국 선언문 참여를 이유로 해직당했다. 이후 84년에 복직될 때까지 후학들과 ‘상도연구실’을 설립, 민중운동 이론의 틀을 다졌으며 84년에는 진보적 학자, 현장 노동자가 모여 산업사회연구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88년에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를 설립해 초대의장을 맡았다. 전노협을 옹호하는 전노협지원대책위를 만들고 이후 전노협후원회 회장을 맡으며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94년에는 ‘사회진보연대’ 대표, 99년 ‘진보네트워크’ 대표, 노동자교육센터 대표를 지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선생님은 ‘영원한 청년’이었다. 후배들과 현장 노동자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토론하며 학문과 현장을 연결하는 실천을 몸소 보여주셨다. (출처: 대학신문 _ http://www.snunews.com) 선생님은 전노협백서 제작을 제안하셨고 백서 초안을 꼼꼼히 봐주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말씀은 “노동자를 주체로 서술 구조를 바꾸라.”는 말씀이다. 그 말씀이 담고 있는 큰 의미를 시간이 갈수록 곱씹게 된다. 대장암 투병을 하시던 어느 날 선생님이 임영일 선생님과 나를 보자고 하셨다. 황달로 낯빛이 형편없으셨다. 선생님은 노동운동자료실 걱정을 하셨고 두 사람이 잘 해줄 것이라 믿는다 하셨다. 그게 선생님과의 마지막이었다. 이틀 후 선생님은 운명하셨다. 2004년 2월 14일이었다. 2003년 말 민주노총에 정책연구원이 생기고 그 안에 자료실이 설치되었다. 2004년 1월부터 정경원은 민주노총 연구원으로 일했다. 민주노총 설립 이후 자료를 정리하고 회의자료 목록을 만들고 10년 연표를 만들었다. 연간 사업 예산은 200만 원이었다. 협약 맺은 성공회대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자료 정리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7노동자대투쟁 기념 사이트를 개설하고 관련 자료를 모을 수 있었던 것도 단체들의 힘으로 가능했다. 민주노총정책연구원노동운동자료실은 성공회대민주자료관, 노동자의 책, 노동자정보통신지원단2, 노동네트워크, 노동사회교육원 등과 함께 인터넷에서 ‘노동역사관 1987’(http://remember1987.net)을 운영했다. 자료실 문은 닫았지만, 민주노총 조직체계를 가동하여 자료를 수집, 정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자료 생산과 동시에 보존할 수 있는 최적의 구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경원이 이 생각을 접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료를 위한 사람과 예산은 언제나 후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료를 위한 사업은 가뜩이나 일에 치여 있는 상근자들에게 일을 하나 얹어주는 것밖에 되지 못했다. 자료실 담당자였지만 그 일보다는 오히려 회의마다 들어가 서기 역할을 했다. 그게 주 업무인 것으로 스스로 착각할 정도로 잦았지만 덕분에 많은 걸 기록할 수 있었다. 2004년부터 4년 동안의 거의 모든 회의를 지켜볼 수 있었고 노동운동 지도부와 조직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2005년 가을.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사업조합으로부터 금품을 제공받은 이유로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수호 집행부는 ‘관행’, ‘동기’를 철저히 진상조사하지 못한 채 안이하게 대응했다. 이에 민주노조운동의 정신 회복과 지도부 총사퇴를 요구하며 사무총국 간부 13명이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민주노총의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집행부 때는 성폭력 사건과 조직적 은폐까지 벌어졌다. 민주노조 정신은 사라졌고 민주노총은 민주성, 도덕성을 잃었으며 조직의 위상은 추락했다. 이즈음 노동자교육센터가 한국노동운동사 강좌를 열었다. 송찬섭, 안태정, 박준성, 최규진, 유경순 등 역사학연구소 선생님들과 김진순 대표, 신재걸 부대표 그리고 현장 노동자들이 모여 공부를 했다. ‘민주노총 사태’의 본질이 뭔지 노동운동사 공부를 하며 알아보자는 (남들에게 말하는) 이유와 어수선한 때 공부라도 하자는 참가자들의 속내가 어우러졌다. 8강이 끝나고 함께 강좌를 들었던 동지들이 심화학습을 해보자고 했고 2년 동안 공부 모임을 이어갔다. 이승원, 김병구, 유명자, 황선용, 정경원, 그리고 강사였던 안태정 선생님까지. 그리고 이들은 모여 공부한 것을 노동운동사로 엮어보자며 호기롭게 초안까지 작성해보았다. 물론 초안으로 끝났다. 2007년 봄. 이승원은 이런 제안을 했다.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을 복원하자.” 노동운동 정신을 복원하기 위한 출발이 될 거라며. 이 제안이 노동자역사의 한내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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