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라면 노동자의 기억 14화
* 어용후보가 당선된 20일 후인 11월 30일,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을 가던 조합원들은 식당게시판의 노사합의 공고문을 보고 경악했다. 주 2시간씩 지급하던 연장근로수당을 1시간으로 줄이는 대신 식사시간을 30분에서 40분으로 10분 연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1주일간 결근을 하지 않은 사람에 한하여 주 1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며 명목도 해괴한 ‘연장간주수당’이라는 거였다. 게다가 주 46시간 근로제와는 무관하게 회사 스스로 생산 의욕을 높이고 결근율을 줄이기 위해 보상적으로 지급하는 거라고 했다. 공고문을 보는 조합원들은 저마다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공 고 1) 1일 중식 휴게시간은 40분이다 2) 1주 실 근로시간은 7시간 20분×6일=44시간이다 3) 연장간주수당(연장근로간주 생산장려수당)은 주 1시간을 인정한다 (주1시간×1.5=1.5 시간 분) 4) 연장간주수당 지급으로 실정상 근로시간은 주 43시간이다 5) 근로자는 토요일에 연장간주 근로 작업을 거부할 수 없다 1989. 11. 30 회사 측 대표 생산본부장 이신홍 근로자 측 대표 노조위원장 유완용 |
주 2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은 주 6일 근로제였던 1989년 3월 29일 국회에서 근로기준법 42조가 개정돼 그날부터 모든 사업장의 법정근로시간이 주 48시간에서 46시간으로 단축되며 생긴 일이었다. 근로시간이 주 48시간에서 46시간으로 단축되었음에도 종전처럼 주 48시간 근로를 해 받던 초과근무수당이었다. 대부분의 회사들이 생산량 저하를 이유로 기존대로 주 48시간 즉 1일 8시간씩 근로를 시키며 주 2시간의 연장근로수당 지급이나 격주 토요일 휴무를 하던 터였다. 외국보다 긴 근로시간을 줄여 노동자들의 건강과 문화생활의 증진을 꾀하기 위한 법정근로시간 단축의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명백한 불법이자 편법이었다. 그럼에도 N라면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 2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의 지급을 미뤘다. 그러다 ‘징소리’와 조합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4개월이 지난 8월부터 마지못해 지급했다. 1989년 4월부터 7월까지 4개월분은 이미 지난 일이라며 시치미를 떼며 회사 측과 어용노조가 서로 돕고 사는 공생관계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그렇게 뒤늦게 지급한 주 2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을 어용노조위원장이 당선되자 1시간으로 줄인다는 얘기였다. 식사시간을 30분에서 40분으로 10분 늘였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붙박인 듯 공고문을 읽고 또 읽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불법, 은폐, 조작을 밥 먹듯이 하는 회사와 노동조합이라지만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노사합의가 노동법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법정근로시간 단축 취지가 식사시간을 임금에서 공제해 임금을 적게 주고 많은 일을 시키라는 것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공고문은 어느새 찢어져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유완영 노조위원장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조합원들이 더 난리였다. 민주파를 비롯한 몇몇 조합원들이 노조사무실로 달려가 봤지만 이미 문을 잠근 채 퇴근한 상태였고, 서너 명의 경비와 관리자들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식당은 일순 노조위원장의 성토장으로 돌변했다. 노조위원장이 없으니 그의 선거 운동원들이 성토의 대상이었다. 식사시간과 아무 상관이 없는 주 46시간 노동에 따른 연장근로수당을 줄인 문제를 밀실야합을 통해 삭감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2차 결선투표를 2일 앞두고 3개 공장에 전격 게시했던, 완전한 주 46시간과 연말상여금 400%를 받지 못하면 즉각 위원장직을 물러나겠다는 손바닥 도장 대자보 공약을 내팽개친 채. 애먼 노조위원장 선거 참모들은 공범으로 매도를 당했다. 손바닥 대자보 당시 회사 측과 그렇게 합의를 했다고 침을 튀겨가며 강조한 게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몇몇 조합원들은 위원장 선거참모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위원장이 노조위원장 당선사례로 알아서 바친 건지, 아니면 회사 측에서 말을 안 들으면 다음 위원장 선거 때는 국물도 없다고 협박을 해 어쩔 수 없이 바친 건지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다. 부산공장 유세에서 1989년 임금협상 때 회사 측이 세 노조 간부들을 4억5천만 원에 매수하려한 일도 폭로되었다. 관리자들에게 납치된 박봉산 후보 얘기였다. 조작 양심선언문을 써 2차 결선투표 2일전 3개 공장에 배포해 어용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 도움을 줬으니 합당한 보상을 해달라는 얘기였다. 이는 김준태 전 위원장이 800만원을 받은 후 1989년 해고자인 정동철에게 전화를 해 계산은 이미 끝났다고 자랑삼아 얘기한 일이었다. 1차 선거 이후 선거철 메뚜기들이 민주세력들에게 우르르 몰려와 지지 세력을 과시하며 돈과 자리를 집요하게 요구했었다. 전 위원장을 비롯한 2차 투표 탈락 후보들과 그 선거 운동원들이었다. 그때 민주노조의 원칙과 방향 운운하며 거절한 것에 대한 서운함일 터였다. 그러자 이번엔 전임 노조위원장의 탐욕으로 덩달아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 전 노조사무장이 신임 노조위원장에게 자신의 자리를 보장하지 않으면 전 위원장에게 800만원을 준 것을 고발하겠다며 업무 인계를 거부했다. 그래 전 위원장이 자신의 수족이었던 노조사무장을 안양시내의 모 호텔 7층에 감금시킨 채 업무 인수인계를 강요했다. 그러니 유완영은 하는 수 없이 전 노조사무장에게도 400만원을 주고 노조업무 인수인계를 받은 터였다. 이게 N라면의 불법, 은폐, 조작의 민낯이었다. 당시 800만원과 400만원의 송금자가 엉뚱하게도 전 노조집행부의 부위원장이자 당시 노조위원장 권한대행인 여성노동자 임광순이었던 것이다. 1차 선거에서 탈락한 홍선재를 매수하기 위해 송금한 500만원 역시 임광순 명의로 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당사자인 신임 노조위원장이나 회사 측에서 보내야 함에도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전 노조집행부의 부위원장이자 위원장 권한대행이 보낸 것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랬다. 당시 구사대인 한상복이 돈 받은 사람들이 엉뚱한 짓을 못하도록 이런 정보들을 적당히 흘리며 다녔고, 전 노조사무장이 이런 약점을 물고 늘어져 알려진 일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나는 임광순을 만날 때마다 짓궂게 캐물었다. 언제 세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렸냐고? 어디서 갑자기 돈이 나와 갚았냐고. 그럴 때마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한경택씨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중언부언 거렸다. 위원장선거 훨씬 후에 있는 교회행사를 그전이라고 거짓말을 해 2차 선거를 11일후로 잡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회유 협박한 회사 관리자가 누구냐며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죽을죄를 지은 듯. 할 말은 많지만 말할 수는 없다는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주문처럼 읊조렸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밀실협상을 했으니 회사 측의 회유협박이 엄청났을 거라는 게 대다수 조합원들의 생각이었다. 회사 측으로선 관리자들을 포함해 전 직원이 5천여 명에 이르니 주 1시간만 연장근로수당을 줄여도 엄청난 금액이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최소한 연 7억이나 되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다음날 민주파를 비롯한 한 다수의 대의원들과 조합원들은 오전 10시 아점(아침 겸 점심)도 거른 채 노조사무실을 찾아가 항의와 시정을 요구했다. 조합원들의 거센 항의에 위원장은 진땀을 흘리며 부위원장과 사무장만을 찾고 있었다. 자기 혼자 독단적으로 합의한 일을 애꿎은 부위원장과 사무장에게 미루고 있었다. 위원장은 법정근로시간 단축의 취지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듯 했다. 조합원들의 거친 항의가 끊이지 않자 회사 측과 재협상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공고문의 내용을 강변했다. 그리고 이에 동참했던 대의원과 조합원들은 다음날 담당 부장과 과장들에게 불려가 배후세력 등에 대해 추궁 받고 작업장이탈과 명령불복종 등의 이유로 시말서를 강요받았다. 일부 시말서를 거부한 조합원들의 경우 냄새나고 힘들고 사람 구경을 할 수도 없는 외딴곳으로 인사이동을 당했다. 76년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관리자를 내세워 노동조합을 설립, 이후 15년간 반장 출신 노조위원장과 밀실야합을 즐기며 서로 돕고 살아온 어용노조 중독증에 의한 습관적인 부당노동행위가 재발한 것이다. * 1989년 12월 5일 대의원들의 요구로 안양공장 대의원회의가 열렸다. 역시 대의원들은 주 46시간에 대한 밀실협상의 사과와 재협상을 요구했다. 노조사무실을 항의 방문했다 부서이동당한 조합원들의 원직복귀 문제 등도 책임지고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문제들을 3개 공장 대의원들이 모여 토론 결정하도록 수일 내 3개 공장 대의원들이 모이는 대의원대회를 개최할 것 요구했다. 그러자 위원장은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뗐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진땀만 뻘뻘 흘리며 횡설수설거리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회사 측과 노동조합이 주 46시간근로 문제에 대해 재협상 의지를 보이지 않자 1989년 12월 19일 ‘올바른 노조를 바라는 조합원 일동’ 명의의 ‘변칙적인 주 46시간제 철회하라’란 제목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주 46시간에 의한 2시간 연장근로수당은 지난봄 임금협상시 회사 측 임금 요구안에 5.6%가 포함된 것임을 회사 측 대표가 밝힌 것이라는 거였다. 따라서 협상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식사시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라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 1시간은 유완영 노조위원장의 선거 공약이기도 하고, 근로기준법 44조에 8시간 근로의 경우 1시간의 휴게시간을 보장하도록 명시된 문제라는 거였다. 그럼에도 조합원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주 46시간 합의사항으로 공고하겠다는 속셈이 무엇이냐는 거였다. 모든 걸 백지화하고 대의원 대회에서 다시 논의해 협상하겠다던 며칠 전 안양공장 대의원회의의 약속을 무시한 채 그런 똥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뭐냐는 거였다. 회사 측의 초강경 회유 협박으로 바친 위원장 당선사례가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노조 사무실은 식사시간이 되면 조합원들로 인산 인해였다. 조합원들에게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민주파 대의원들이 의식적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들르는 탓이었다. 노동조합의 일이 임금협상과 상여금 협상, 그리고 단체협약 협상만 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 노조 집행부 간부들과도 의식적으로 많은 대화를 하여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목적 중에 하나였다. 현장의 작업조건 개선과 보복 징계성 인사의 시정, 산재사고 등에 대한 노동조합의 적극적 개입 등이 그 예였다. 그날도 조합원들과 회의용 테이블에 둘러앉아 무슨 얘기인가로 한담을 하고 있자 노조사무장이 눈짓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와 같은 자동정비반에서 근무하다 유완영 후보의 선거운동을 한 공로로 사무국장이 된 친구였다. 술과 유희를 유달리 좋아하고, 아가씨들과 관련된 숱한 뒷얘기를 뿌리고 다닐뿐더러 대의원 선거때 민주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과장이 내세웠던 어용후보이기도 했다. "한 형, 올바른 노동조합을 위해 같이 일합시다.“ 옆 사무실인 의무실의 침실 칸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무장이 말했다. "같이 일하자고? 나보고 위원장 하라고?" 내가 농으로 얼버무리자 사무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진심으로 올바른 노동조합을 해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주세력의 상징적인 사람을 어용집행부의 들러리로 이용해 민주세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기 때문이었다. "농담이 아녜요. 위원장하고도 다 한 얘기예요." "집행부 주변에도 좋은 사람 많잖아? 한경택이 아니면 올바른 노동조합 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언제든지 마음만 먹고 또 사심만 버리면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잖아?" "한 형도 알다시피 사람은 많아도 쓸 만한 사람은 없어요. 노동조합에 대해 한 형만큼 많이 알고 관심이 많은 사람이 없어요." 사실 집행부 주변에는 선거 때마다 술과 돈에 몰려다니는 사람들뿐 정말로 조합원의 신뢰를 받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한 형, 부위원장 좀 맡아서 한 번 노동조합을 멋지게 만들어봅시다. 한 형도 아다시피 부위원장 감이 없어요. 한 형만 한 인물이 없어요." 부위원장은 지금껏 공석으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조합원에 대한 영향력과 세력 등을 감안해 앉히자니 마땅한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민주파 6인 모임에서도 내심 생각을 해본 일이었다. 어용이라고 배척만 할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며 변화를 유도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의가 온다면 사무장이나 교육부장 홍보부장 정도는 적극 수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노동조합의 활성화와 정상화를 위해서는 이들 세자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각 활동부서장들을 총괄하고 조합 살림을 이끌어가는 사무장이나 조합원과 대의원을 교육시키고 홍보활동을 전담하는 곳이 교육부와 홍보부이기 때문이었다. 위원장이 독선적이고 어용세력에 둘러싸여 일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조합원의 여론을 등에 업고 실무부서장으로서 밀고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도 전무했던 교육 못지않게 위원장 선거 때도 일체의 홍보물을 쓰지 못할 정도로 홍보의 자유가 봉쇄되어 조합원들의 귀와 눈이 가려져있는 것이 큰 원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 자가 붙은 자리가 대부분 그렇듯 부위원장이란 자리도 위원장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들러리로 전락해 위원장의 총알받이 노릇 하기가 십상인 것도 사실이었다. 위원장이 올바른 노동조합을 위해 일하는 경우 같이 힘을 합쳐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자리인 반면 그 반대일 경우 위원장 혼자 다니며 터뜨린 일을 도맡아 뒤치다꺼리하기 십상인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주어진 고유의 업무가 없이 위원장을 보좌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올바른 노동조합을 위해 같이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내가 부위원장이 안 된다 해도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그러나 특별히 주어진 일이 없이 감투나 쓰고 앉아있는 자리는 생각이 없어. 올바른 노동조합을 위해 내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주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야. 위원장의 동의와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사사건건 의견충돌이 나 피차 힘들기 때문이야." 나의 말이 의외라는 듯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무장이 물었다. "그럼 한 형이 원하는 게 뭐예요?" "홍보부장하고 교육부장의 지명을 나에게 일임해줘. 노동조합의 활성화와 조합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조합원과 대의원들의 정기적인 교육과 노동조합 신문 발행, 기타 활발한 홍보활동이 절대 필요하기 때문이야. 그런 며칠 후였다. 사무장과 절친한 친구인 지전영을 통해 또다시 그런 제의가 들어왔다. 내가 제시한 조건에 대한 말은 없이 위원장과 만나 진지하게 대화를 해보라는 얘기였다. 노조 집행부측에서도 어느 정도 생각이 있는 모양이라는 얘기였다. 위원장과 만나 얘기 못할 일도 없었다. "한 형이 부위원장으로서 올바른 노동조합을 위해 일을 하겠다면 얼마든지 도와주겠어. 그게 또 위원장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고. 한 형이 올바른 노동조합을 위해 또 조합원을 위해 일하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어?“ 며칠 후 만난 위원장의 말이었다. 구구절절이 옳고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노조위원장 당선 이후 한 달 가까이 접해본 밀실야합식 노사협조와 조합 운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였던 것이다. 회사 측 대표와 밀실야합을 통해 주 46시간 근로문제를 합의하고 한 달 가까이 잠적한 위원장의 유아독존적인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런 위원장의 분명한 의지를 공식적으로 또 확실하게 밝혀달라는 얘기지. 그 방법이 교육부장과 홍보부장을 내가 추천한 사람으로 임명해달라는 얘기지. 어떻게 보면 아주 쉽고 간단한 얘기지." "지금 얘기했잖아? 이렇게 얘기하면 되는 거지 또 공식적으로 하라고? 87년 선거 때 같이 일 해봐 내 성격을 잘 알면서 날 못 믿겠다는 거야?" 위원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믿음직스럽게 한 일도 별로 없으면서 그는 너스레를 떨었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할 바탕을 만들어달라는 얘기지. 일할 마당과 일거리를 분명하게 만들어 달라는 거지. 솔직히 내가 지금 상황에서 집행부에 들어가는 것은 어쩜 모험이고 많은 조합원들이 반대할게 자명한데 확실한 일거리나 약속도 없이 들어갈 수는 없는 거지. 나에게도 어떠한 명분이 필요하고 나를 지지하는 조합원들을 설득시킬 뭔가가 있어야 하는 거지." "......솔직히 부위원장이란 자리가 위원장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일꾼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허수아비로 만들 수도 있는 자리 아냐? 부위원장이 아무리 일을 찾아 한다고 해도 나머지 집행부 임원들이 반대하고 협조를 안 해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 아냐?“ 겉으로는 웃었지만 신경전이 치열했던 술자리였다.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피차 좀 더 많은 생각을 해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집행부의 연락만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공은 위원장에게 넘어간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며칠 후였다. 라면1과의 곽경연 반장이 작업 현장을 돌며 인사를 다녔다. 부위원장으로 일하게 됐으니 잘 부탁한다는 거였다.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해 현장 아가씨들과 허구한 날 실랑이를 하는 사람이었다. 충청도 향우회인 충우회의 한 파벌을 이끌고 있는 것을 감안한 것인 듯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경기도 향우회인 경우회, 영남지역 향우회인 영우회, 호남지역 향우회인 호우회, 반장들의 모임인 돼지회 등 각 모임의 핵심세력을 다 끓여 들였으나 홍선재후보의 세력이 많은 충우회만은 집행부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조합 사무실에 한 번 오는 것을 본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8월 징계위 저지농성 아가씨들에게 스프 통을 굳이 남자화장실에 가서 닦을 것을 강요해 아가씨들과 대판 싸웠던 위인이기도 했다. * "대구배송센타로 갈래? 아니면 공무과로 가서 부산공장에 그대로 있을래?“ 부산공장 생산3과 조태진은 생산부장에게 또다시 불려가 두 시간 가까이 회유와 협박을 받고 있었다. 오늘까지 세 번째나 불러 말하지만 끝까지 확답을 않고 버티니 이제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켜보자는 모양이었다. 90년 대의원 선거를 한 달가량 앞두고 있어 한창 은밀하게 조합원들을 만나 대화를 하며 선거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떡할래? 회사의 명령이니까 거부하면 넌 해고야. 어차피 넌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돼. 회사에선 네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렇게 하기로 되어있어. 네가 거부한다고 그렇게 안되는 게 아니야." 조태진은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같은 시간 총무부장인 김준태는 역시 같은 방법으로 가공과의 강영석을 상대로 회유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공무과로 가 부산공장에 남아있든가 아니면 경산공장으로 가서 근무하라는 거였다. 조태진의 경우 대구배송센타로 가면 조합원 자격은 유지되지만 그곳은 조합원이 단 한명도 없어 노동조합 활동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부산공장의 공무과로 갈 경우엔 노동조합 자격이 박탈되는 것이다. 강영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산공장 공무과의 경우 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기름쟁이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 노동조합 활동에 열성적이었으나 89년 11월 노조위원장 선거가 끝나자마자 회사와 어용노조가 야합해 노조조합원을 박탈한 것이다. 생산직에서 관리직으로 신분이 변동됐다고 하지만 하는 일은 예전 공무직이었다. 노조 규약상 조합원의 신분을 재직 중인 근로자로 한정해 관리자라해도 하급 관리자의 경우 조합원의 자격이 있음에도 회사와 어용노조는 생산직 근로자만 해당한다며 공무과를 비롯한 제품 운반차량의 운전기사들까지도 조합의 가입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1975년 박정희 균사독재시절 자재과 주임인 상낙선을 내세워 어용노조를 만든 후 이후 반장출신 노조위원장들과 14년간 해온 N라면식 노사야합이었다. 조태진은 평소 바른 소리를 잘하고 ‘N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의 소식지인 '징소리'의 주장에 동조하는 언행으로 부산의 징소리파로 분류된 요주의 인물이었다. 1987년과 89년 파업이 위원장을 끌어내기 위한 노노싸움이라느니, 불법단체에서 의식화 교육을 받은 징소리파의 선동이라느니 하는 노조간부들과 관리자들의 얘기만을 믿고 분기탱전하여 안양공장으로 쳐들어갈 생각까지 했던 위인이었다. 강영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조신문도 없을 때였고, 대의원도 대부분이 반장이거나 관리자들의 추천으로 출마해 무투표 당선된 사람들일 때였다. 이들이 일 년에 한 번 안양의 대의원대회에 참석하고 오지만 꿀 먹은 벙어리였던 것이다. 얘기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묻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님과 귀머거리 생활은 부산공장뿐만 아니라 안성과 안양공장도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언제까지 속일수는 없듯이, 이들에게도 1987년 노조위원장 직선제 이후부터는 서서히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위‘징소리파’로 분류돼 혐오와 공포의 대상으로만 알았던 민주노조 세력이, 민주노조의 탈을 쓴 과격폭력 집단이라는 주장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왜곡된 것임을 알게 됐던 것이다. 타 후보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혁신적이고 민주적인 공약의 제시는 물론 관리자들의 눈치를 안보고 당당하게 확신에 찬 주장을 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술과 고기로 분탕질을 하며 질의 답변은 대충 뭉개고 경쟁후보를 비방하기에 바쁜 타 후보와는 달리 짜장면으로 검소하게 식사대접을 하며 무제한적으로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는 공청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사 측이든 노조 집행부측이든 조합원들을 가리지 않고 대하며, 무슨 질문이든 진지하게 답변을 해주니 조합원 사이에서는 잔잔한 파문이 일었던 것이다. 모두가 옳은 얘기였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다. 드러내놓고 이런 주장을 할 수는 없으나 많은 조합원들 사이에 이런 여론이 형성됐던 것이다. 여기에 안양의 민주파 대의원들의 3개 공장 대의원 주소록 확보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대의원이란 공시적인 지위를 이용해 3개 공장 대의원들과 자주 연락을 취하며 만나 서로의 소식과 문제점을 의논하는 한편 '징소리'를 꼬박꼬박 가정으로 보내줬던 것이다. 이러한‘징소리’독자는 대의원은 물론 일반 조합원들에게까지 확대되어 수백부가 3개 공장으로 우송되었던 것이다. 각 공장마다 불법유인물인 '징소리'를 자진해서 관리자에게 가져올 것을 당부하는 대자보가 각 공장마다 나붙을 정도였다. 자신들의 억울한 일이나 궁금한 일들이 '징소리'에 속속 보도되고, 자신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한발 앞서 실리자 '징소리'의 인기는 날로 올라갔다. 숨겼던 일이나 미처 모르고 있던 일들이‘징소리’를 통해 보도되어 곤욕을 치르자 노동조합에서도 뒤늦게 노보를 만들었으나‘징소리’의 인기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기사의 신속성이나 정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사 측의 눈치를 안보고 바른말을 하는 예리함은 애초부터 감히 상대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의 민주노조 세력에 대한 거짓선전이 하나둘씩 벗겨지자 그간 지부에서 숨죽여 지내오던 양심세력이 하나 둘 대의원에 당선되는 추세였고, 회사의 주장대로 이른바 '징소리'들은 날로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관리자들의 회유와 협박 등으로 자발적인 ‘징소리파’는 극히 일부이고, 안양의 민주파에 동조하거나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무조건 ‘징소리파’로 분류해 특별 감시를 하는 관제 ‘징소리파’가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펄쩍 뛰며 ‘징소리’의 가입사실을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그는 이미 ‘징소리’로 낙인찍힌 신세였고, 따라서 영원한 ‘징소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렇게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또 본인이 부인하면 할수록 더욱더 확실한 ‘징소리파’가 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태진과 강영석 등 부산공장의 2인도 이러한 경우이고, 안양공장의 민주세력과 가까워진 것도 회사 측의 도움 때문이었던 것이다. 위 2인이 소극적인 부인에서 노골적인 민주투사로 변신하자 회사에서는 아연 긴장했던 것이다. 조태진의 경우 1989년 10월 노조위원장 선거 때 안양의 민주후보 공약을 그대로 사용해 한 달 후 있은 부산지부장 선거에 출마해 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조태진 역시 1차 선거에서는 월등한 표차로 1위를 하였으나 2차 결선투표에서 회사 측의 지원을 받는 어용 지부장 후보에게 역전패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지 세력을 점점 확산시켜가는 추세였다. 안양공장과 조합원수가 거의 비슷한 부산공장까지 민주파의 세력이 확산될 경우 한 달 후 있을 1990년 대의원과 10월의 노조위원장 선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부산공장의‘징소리’대표인 2인을 그대로 둘 경우 N라면의 민주노조는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안양의 민주파와 계속 만나가며 이들의 활동이 소극적, 방어적 방법에서 적극적, 공격적 방법으로 바뀌고 있고 이런 당당하고 확신에 찬 모습은 회사 측의 회유나 협박도 속수무책인 채 조합원들 사이에 신뢰를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조합원과 격리하거나 노동조합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부산공장의 공무과나 대구나 경산공장으로 쫓아버리는 방법밖에 없고 또 한 달 남은 대의원 선거전에 단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2인이 대의원에 출마하는 건 뻔한 일이고, 또 대의원에 당선될 경우 단체협약 상 타 공장 전출시 3개 공장 대의원모임인 대의원대회의 동의를 받아야하기 때문이었다. 회사 측의 일방적인 인사명령을 거부하고 일주일간 정문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던 이들 2인은 결국 회사 측의 요구대로 조태진은 부산공장의 공무과 자동정비반으로, 강영석은 경산공장의 관리직으로 근무를 하기로 한 것이다. 2인이 모두 노동조합 조합원의 자격이 박탈됨은 물론 노동조합을 볼 수도 없고 볼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회사 측의 부당인사를 수용하고 굴복한 그들에게 나는 그저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도외시한 채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원칙적인 얘기만 나열하며 아무런 도움도 힘도 되어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민주노조를 지향하며 투쟁해온 그들의 지난날에 비해 마지막 결정이 그들답지 않았다고 비난하기에 앞서 어려울 때 십시일반 서로 돕고 사는 인간본연의 모습에 충실했는가 하는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수백천명의 조합원들과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정문 앞에서 외롭게 투쟁하던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나는 과연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투쟁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였던가, 몇 차례 노동조합에 찾아가 항의를 하고 징소리를 통해 조합원들에게 알린 것이 과연 그들에게 무슨 힘이 되었는가. 이래저래 나는 전전반측이며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도 언젠가는 이런 일을 당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