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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1946년 9월 총파업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9-07 조회 1817
 

1946년 9월 총파업

박준성(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46년 해방이 된지 1년이 지났다. 미군정 아래서 노동자 민중의 처지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어려워졌다. 1946년의 물가는 1944년에 비해 92배 뛰었다. 1945년 5월의 물가지수 233일 때 노동자 임금지수 233이던 것이 1946년 5월에는 물가지수가 77,393으로 오른데 비해 임금지수는 6,015였다. 임금은 물가에 비해 13분의 1밖에 안 올랐다. 1946년 1월에 쌀 한 말에 180원하던 것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올랐다. 농민들은 일제 식민지시기에도 없던 하곡(보리쌀)공출까지 강요당하자 불만이 높아졌다. 9월 철도파업이 시작되기 전 서울시내에서 벌어진 24건의 파업에 노동자 3천 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농민들은 7월부터 하곡(보리쌀)수집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쌀 공출 장면>


이런 상황에서 1946년 8월 노동자 대중의 전국 조직인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조공 중앙이 7월 27일 채택한 ‘방어적 폭력’이라는 신전술을 받아들여 대중파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에 창립된 전평은 그때까지 ‘애국적 민족자본과 협력하여 산업을 건설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산업건설운동을 벌여왔다. 조공과 전평의 신전술에 따른 사전 계획의 결과 9월 총파업이 전개되었다고 보기는 힘드나, 그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다.
 


<1945년 11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대회 장면>

해방이 되고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정은 지방 인민위원회와 중앙조직인 조선인민공화국을 폭력적으로 해체하였다. 1946년 9월 6일에는 현대일보, 인민일보, 중앙일보를 정간시켰다. 전평에 대해서도 파괴공작에 나섰다.

1946년 8월 20일, 미군정 운수부는 ‘산업합리화’를 내세우며 철도 노동자 25%를 줄이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하였다. 4만여 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전평에서도 가장 힘이 셌던 철도노조의 힘을 빼려는 의도였다. 9월 13일 철도국 서울공장 노동자 3천 7백여 명이 노동자대회를 열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반대,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미군정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강냉이라도 먹으니 행복하다”며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9월 23일 오전 0시 부산 철도노동자 7천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부산 철도 노동자들이 제시한 요구 조건은 1)일급제 반대, 2)임금인상, 3)해고감원 절대반대, 4)급식제를 종전대로 실시, 5)식량배급(노동자 4홉, 가족 3홉)이었다. 부산 발 상행선 모든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그때 철도노조의 부산지부장은 뒷날 공화당 정책의장을 지낸 백남억이었다.

24일에는 서울 철도노동자 14,949명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전국의 4만여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였다. 전국의 철도가 멈추었다.

9월 25일 인쇄 출판 노동자들이 결집한 조선출판노동조합은 33개 노조분회에 파업을 지시하고 파업에 돌입하였다. 9월 26일에는 경전(京電)이 파업에 동참하였다. 전평은 9월 26일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쌀을 달라, 임금인상, 공장폐쇄와 해고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자유 보장,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가 석방과 지명수배 및 체포 철회” 등 8개 요구를 내걸었다. 철도노조의 투쟁에서 시작한 9월 총파업은 10월 초까지 금속, 체신, 섬유, 전기, 해운 같은 전평 산하 각 산별노조로 확대되었다.

미군정청 운수부장은 9월총파업을 “그것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전쟁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9월 30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지휘아래 3천여 명의 경찰과 대한노총, 대한민주청년동맹, 서북계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에서 동원된 우익청년들이 용산철도기관구를 공격하였다. 철도노조 간부 16명과 조합원 1,200여 명이 검거되고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철도 노동자들의 9월총파업을 깨는데 앞장섰던 우익 청년단체 가운데 대한민주청년동맹의 명예회장은 이승만과 김구였고, 회장은 박정희 시대 야당총재를 지낸 유진산이었으며, ‘야인시대’, ‘장군의 아들’의 주인공 김두한은 감찰부장이었다. 김두한은 자서전에서 “철도 파업 진압 때 내 부하가 8명의 전평 간부를 생매장했는데 너무 급히 서둘렀기 때문에 콘크리트가 마르지 않았고, 미 CIC에서 즉시 매장 현장을 발견하고 시체를 끌어냈으나, 우리의 작업현장을 못 보았기 때문에 나를 정식으로 못 잡았다”고 하였다. 곳곳에 과장이 섞인 기록이고, 사실이 아니라 해도 김두한을 비롯한 우익청년단원들이 노동자들의 파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두한은 전평본부도 습격하여 트럭 4대 분량의 자료를 빼앗아 갔으며, 총파업본부가 설치된 영등포 조선피혁공장 파업현장도 경찰과 ‘합동진압’하였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철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1947년에도 일어났다. 사진은 1947년도 철도노동자 투쟁 장면>

 

9월 총파업으로 철도, 전신, 전화, 해운, 교통, 운수, 신문, 기타 산업이 10여 일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9월 총파업의 중심지역은 서울, 인천 경기, 대구 경북, 부산 경남, 전남 전북이었다. 전평 자체의 통계에 따르면 절대인원 17만 3천 4백명이 9월 총파업에 참가하여 472건의 파업을 일으켰다. 이는 전평에서 분리된 북조선직업총동맹 소속을 뺀 전평 소속 전체분회의 64%, 전체조합원의 55%에 해당한다(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합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참가하였던 것은 노동자들 대부분이 굶주림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민주적 권리를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40% 이상의 조합원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군정과 자본이 저지른 해고와 테러 위협 같은 분열책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조합원들의 의식과 활동력 차이를 뛰어넘어 단결·연대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평의 조직도>


9월 총파업은 부산의 철도노동자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으킨 파업이 전평 주도하의 총파업으로 발전하였지만 전평 산하 산별조직들이 통일된 힘으로 파업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파업 전술에 오류도 있었다. 한 보기가 출판노동자들의 파업 참가 시기였다. 출판부문은 파업상황을 선전하고 마지막에 파업에 돌입하기로 하였는데, 9월 25일 출판노동자들이 바로 파업에 들어감에 따라 10월 2일까지 신문이 발행되지 않았다.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일반인에게 파업의 목적이나 요구, 파업의 전개과정을 알릴 기회를 스스로 막아버린 결과가 되었다.

9월 총파업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민중항쟁인 ‘10월 인민항쟁’을 촉발 시킨 도화선이 되었다. 그런데 ‘쌀을 달라’며 식량 배급 확대를 요구하는 9월 총파업의 노동자들과 공출반대를 외치는 10월 항쟁의 농민들 사이에는 이해관계에 차이가 있었다. 이를 조화시켜 노농연대를 확대시킬 정치적 역량이 필요하였다. 전평이나 정치 조직이 그 몫을 다하지 못하였다. 10월 항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지역 차원에서 노동자 민중의 연대 파업과 투쟁이 전개된 곳은 대구지역 뿐이었다. 파업의 전개 과정도 지방에서 시작하여 전평 중앙이 있는 서울 파업을 추동하고 서울지역이 파업이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지방에서는 파업이 지속되었다.

전평이 총파업선언서에서 밝힌 “쌀을 달라” “임금을 인상하라” “공장폐쇄·해고 절대반대”와 같은 생존권 문제는 노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노동운동의 절대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 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 석방과 수배 해제, 국립대학교안 철회, 정간중인 해방일보, 인민일보, 현대일보, 기타 신문복간 같은 정치적 요구는 민주적 기본 권리였다. 문제는 투쟁과정에서 전평의 ‘정치적 요구’와 현장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 사이에 틈을 메꾸지 못했다는 점이다.

1946년 9월 총파업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다. 구속과 해고는 물론 생명의 위협을 무릅썼다. 전평 지도부가 권력을 가지고 강제로 내몰아서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것이 아니었다. 9월 총파업은 미군정과 자본이 만들어 놓은 비인간적 상황을 벗어나 노동자 대중이 생존권과 생활권을 확보하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던 의지와 투쟁의 과정이었다. 9월 총파업은 당과 대중조직, 대중조직과 노동자 대중, 노동자와 민중의 관계를 가늠해 보는 잣대이며,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생활권을 가로막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압살한 세력이 누구였는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모든 투쟁이 언제나 승리의 성과를 얻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어느 한 사건, 한 시점에서 토막토막 끝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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