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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이달의 노동역사 : 강주룡과 강주룡들
첨부파일 -- 작성일 2008-06-02 조회 1099
 

뉴스레터 창간준비 제3호 (2008년 6월 2일) 
이달의 노동역사 : 강주룡과 강주룡들 

“이렇게 추운 겨울 날 신발도 옷도 변변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버텼지?” 한겨울 눈 쌓인 지리산, 빨치산 역사기행을 하면서 나오는 안타까움이다.
“초봄에 집 나오면서 입었던 옷을 초여름까지 입고 있었으니 오죽이나 더웠을까” 6월 초쯤 날씨가 무더운 날, 1894년 농민군이 점령했던 호남제일성 전주성을 둘러볼 때 나오는 한숨소리다.
한여름 지리산을 찾고, 한겨울 전주성에 들린다면 느낌이 또 다를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좀 더 생생하게 느껴보려면 사건이 일어난 때와 비슷한 시기에 현장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추울 때, 더울 때, 비 올 때, 눈 올 때, 잎이 무성할 때, 잎이 다 떨어졌을 때, 농번기 때, 농한기 때 어떤 때인가에 따라 경험이나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에서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하면서 사람살이 자취를 더듬어 보지만, 옛날과 아주 다르게 바뀐 곳에서는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를 흥얼거리면서 계절을 통해 그때를 떠올려 본다.
1994년 전후한 무렵, 1894년 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으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만사 제쳐 두고 일년 내내 계절에 맞춰 농민전쟁 역사 현장을 답사하면서 계절이 담겨 있는 사진을 찍고, 그곳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답사기를 쓰는 것이다. 내 생에서 일년쯤 잘라내 그렇게 공부해 보고 싶은 바램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보다는 달마다 며칠씩 그 달에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고 열두 꼭지로 된 역사기행 책을 내는 편이 더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이 계절에 한 열흘쯤, 아니 1박 2일이라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북녘 땅 대동강 가에 있는 을밀대다. 지금부터 77년전 평양고무공장노동조합 간부였던 강주룡이 1931년 5월 28일 한밤중에 올라가 5월 29일 우리 노동자 역사에서 처음으로 1인 시위, 고공농성을 벌였던 곳이다. 그 사이 지구 온난화로 기온도 변했고, 5월말 남쪽은 날씨가 초여름이니 평양 을밀대 새벽 체감온도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머릿속으로만 헤아려 두루뭉실하게 “5월말, 봄이라지만 아직도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새벽바람이 싸늘했다.”고 썼다.

광목 한 쪽에 돌을 매달아 을밀대 지붕 한 귀퉁이로 넘긴 뒤, 기둥에다 묶고 밧줄처럼 타고 올라가 몸을 감고 밤을 새면서 새벽바람이 얼마나 싸늘했는지 느껴보고 싶다. 바람만이 아니라 새벽안개가 이슬이 되어 온 몸을 적셨을 지도 모르겠다. 지붕에 올라갈 수 없다면 새벽 산책 나온 사람들에게 강주룡을 아느냐고 물어보고, 을밀대 마당에 서서 함께 강주룡이 외쳤던 말을 다시 떠올리고 싶다.
"우리는 49명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들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평양경찰서로 끌려갔던 강주룡은 풀려난 뒤 파업본부로 돌아가 투쟁을 이끌었다. 1931년 6월 9일, 일제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 이라고 불렀던 평양지역 혁명적노동조합에 참여했던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기업별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바꾸고, 노동운동을 디딤돌 삼아 밑으로부터 당을 다시 만들고, 생존권 투쟁은 물론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운동이었다.
감옥에서도 비타협적인 옥중 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시달리다가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아픈 몸이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도졌다. 두 달 동안 앓아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 13일 오후 3시 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틀 뒤 8월 15일 남녀 동지 1백여 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서성리는 어디이고 서성대에 가면 강주룡 묘를 찾을 수 있을까.
강주룡이 고공농성, 1인 시위를 벌이고 혁명적 노동조합 사건으로 잡혀 들어가던 때와 감옥에서 풀려나오던 때가 바로 나뭇잎이 한창 푸르러 가는 요즈음 5월말 6월초다.

지금 당장 을밀대를 가보기는 힘들다. 가본들 을밀대는 예전처럼 있다 해도 강주룡을 볼 수는 없다. 강주룡은 오히려 ‘지금 여기’ 곳곳에서 수백 수천으로 살아나 “우리의 투쟁이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하고 외치고 있다. 투쟁하고 있는 뉴코아이랜드, 코스콤, 기륭전자, KTX, 학습지노조 재능 노동자들이 바로 2008년 5월말 6월초 ‘이달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오늘의 강주룡 들이다. 그뿐이 아니다. 하이텍알시디코리아, 청구성심병원, 맹호운수, 장애인콜택시, 국민체육공단, 르네상스호텔, 코오롱, 한국합섬, 테트라팩, 신공항, 이주노동자, 전해투 노동자들이 지금도 싸우고 있다.
1931년 5월말 강주룡이 고공농성을 벌일 때 을밀대 부근으로 새벽 산책을 나올 정도가 되던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하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누가 싸우고 있는지, 왜 싸우는지 잘 몰랐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달의 역사’를 들춰보며 역사의 현장을 찾는 까닭은 ‘그때 거기’의 역사에 ‘지금 여기’를 비춰 보면서 오늘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의 투쟁이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하는 외침에 귀 기울이고, 연대의 발걸음을 한 걸음 더 내딛으려고 하는 것이다.
기사 작성 : 발기인 박준성 동지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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