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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전국노동자대회의 기원
첨부파일 -- 작성일 2009-11-03 조회 2263
 

전국노동자대회의 기원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 5만여 명의 노동자가 발 디딜 틈 없이 모였다. 감격! 영광! 확신!
민중의례와 대회 경과보고, 전국교사협의회(1987. 9. 27.창립) 투쟁보고, 투쟁선언, 지지연설에 이어 우리의 자세와 선봉대 결의로 이어지는 대회 내내 노동자들은 목이 터져라 “계승하자 열사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를 외쳤다. 두 팔을 치켜 올리며 노동자의 노래를 불렀다. ‘전태일 추모가’, ‘파업가’, ‘동지가’, ‘광주출정가’.

선봉대 선서 후 선봉대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 투쟁하는 사업장의 노동자 100여 명이 나와서  5m 길이 흰 광목천에 ‘노동해방’ 혈서를 썼다. 도루코 면도날을 반으로 쪼개 손가락을 그었다. 피로 쓴 ‘노동해방’을 단상 앞에서 들고 다함께 노동해방을 외쳤다.

의장단과 선봉대를 선두로 하여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향해 행진했다. “전노협을 건설하자”, “노동법을 개정하자”, “전두환,이순자를 구속하자”, “군부독재 타도하자”, “전경련을 해체하라”
노동자들은 어깨를 걸고 손뼉을 치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시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고 시민들도 박수를 쳤다. 신촌을 지나 한강다리를 건너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노동법 개정투쟁은 노동자의 손으로 해내야 한다. 꼭 우리 손으로 해내자!”는 결의를 다졌다. 독점재벌 규탄 연설과 만세삼창으로 투쟁을 마무리했다.
 


<1988년 11월 13일, 여의도까지 행진하는 대오 맨앞의 '피로 쓴 노동해방'>

왜 모였을까?

노동자들은 왜 여의도로 모였을까. 단병호 전 전노협 위원장은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전평 이후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세계 노동자대회를 공식 행사로 치룰 수 없었다. 40여 년 동안 단절된 노동자대회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둘째,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신생노조들이 만들어지고 한국노총 내에 있던 노조들도 이제 한국노총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져 있어, 독자적 조직 건설로 방향이 모아지고 있었다. 한국노총 민주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 88년 상반기를 거치면서 노동자들의 정서와 욕구가 이 논쟁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 힘을 결집시켜 보고자 했다.

셋째,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가로막는 노동법을 노동자 스스로 고쳐야 한다는 절실함이었다. 복수노조 건설을 가로막는 ‘3조 5호’, 연대를 가로막는 ‘제3자 개입금지’, 까다로운 노동조합 설립 절차를 그대로 두고 노동자가 지향하는 민주노조운동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우리가 깨야한다는 게 노동자들의 생각이었다.

넷째, 1988년부터는 노동자의 진출에 놀란 자본도 새로운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 투쟁이 일었다. 이를 전국 단위의 투쟁으로 재대로 한번 힘 있게 모아야 된다, 총자본 대 총노동의 전선을 만들어 가야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1988년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 기일과 같았다. 전국노동자대회를 가을에 배치한 중요한 이유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부활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의미를 살리기 위해 전태일상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전국노동자대회의 배경, 취지에 대해 공감을 조직 해내는 토론들이 현장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노동법개정, 조직 건설에 대한 조합원의 의지를 단위사업장의 결의로 모아내고, 지역 차원에서 등반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 해 5월 1일 노동절대회를 지역 차원에서 치르기도 하고 공동 임단투를 치루고 그 힘들을 모아 지역조직을 급속하게 건설했다. 지역 연대의 힘은 전국노동자대회로 모여 전국조직 건설로 이어졌다.
 


<1988년 11월 13일, '피로 쓴 노동해방'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노동자들>

무엇을 고민하고 외쳤는가

전국노동자대회를 처음 개최하면서 노동자들은 전평에 대해 고민했고 전노협 건설을 외쳤으며 노동해방을 가슴에 담았다. 

노동자들이 전국노동자대회를 치르면서 ‘전평’을 맥을 고민하게 된 것은 왜일까? 단병호 전 위원장은 당시 지역조직 대표들과 대회를 준비하면서 전평에 대해 한국노총의 역사성에 대한 반정립, 운동의 지향성, 투쟁성 등을 논의했다고 한다.

전평을 이야기로 했던 거는 한국노총이 전평을 깨기 위해서 만들었던 대한노총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것도 있고, 그 다음에 좀 더 깊이 고민했던 부분은 우리 운동이 이념적으로 한국노총과 같은 운동은 아니다, 전평의 노동운동의 지향성, 산별로서의 지향성 등 전평의 역사를 이어받자.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평이라 했을 때는 해방 이전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들 하고 같이 연계돼 왔던 투쟁에 대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거고. 전평 계승, 이거는 그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거였죠.

그리고 이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구호는 건설 전노협, 악법철폐였다고 한다. 대회 관련 공식 자료에는 건설 전노협 요구가 없었으나 조합원들은 전노협 건설을 외쳤다.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 건설을 대중적으로 모아간 대회였다.

그때 두 가지 구호가 나왔어. 건설 전노협 그 다음에 악법철폐. 88년도 여의도로 갈 때부터 건설 전노협 이랬던 거거든. 악법철폐, 건설 전노협, 타도 정부 이런 거. 구체적인 조직 건설 경로를 밟은 게 아니니까 공식적인 구호는 아닐 수 있지만 밑에서부터 구호가 나왔고, 위에서도 그게 다 전제된 대회였어요. 맥락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런 논의가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여의도 민주당사 들어가서 전국회의를 만들어내는 거지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의 단어로 등장한 것이 ‘노동해방’이다. 개념을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들이 사회변화에 대한 인식을 의식적으로 결합시킨 구호였다. 그 당시 노동자들은 무엇을 꿈꾸며 노동해방을 외쳤을까. 
 
아마 이때 노동해방은 각자 자기 생각이 있었을 거 같애. 예를 들어가지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병영적인 체제에 있었으니까 거기서 벗어나는 게 노동해방이다, 아마 이 정서가 제일 커겠지. 그니까 제일 크게 호응을 받을 수도 있었고. 좀 의식 있으면 임노동 관계 속에서 인간적인 대우, 일한 만큼 대우도 받고 이런 것을 노동해방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을테고, 좀 더 나와 가지고는 임노동 자체에 대해서, 사회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 된다 하는 문제의식에서 노동해방을 외쳤을테고. 이때의 노동해방은 그 기준이 어느 하나로 통일된 것은 없었던 거 같아, 내가 볼 때는. 이게 통일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으니까. 정리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었고. 이후 전노협 건설할 때는 노동관계를 어떻게 한다 그런 것까진 아니었지만 그것이 함축된 평등세상이라 하는 표현, 평등세상을 하려면 임노동 관계의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니까. 대중적으로 토론을 한다든가 표현을 명시적으로 한다든가 하지는 않았지만 평등세상 속에 상당히 들어가 있는 거야, 노동해방이.

그 당시 투쟁하고 있던 동아건설 조합원들이 성북동 동아건설 사장 집에 항의방문을 다녀오면서 집들을 다 찜해 놓았단다. “집 다 찍어놔, 씨발 새끼들. 노동해방 되면 저건 내 집이고 이건 뭐 하고. 좋은 건 다 찍어놔.”
 
노동자 결의를 모아 전노협 건설로

이 대회에 문화단체들도 돈 한푼 받지 않고 함께했고, 음향도 최소비용으로 제공했으며, 장소도 학교를 택할 수 있었다. 그만큼 노동자 투쟁에 대한 지지와 참여가 높았다. 선진적인 활동가들도 대거 참여해 대회를 준비했다. 대회를 준비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던 것과 달리 지역에서 상경하는 노동자들은 교통비 등 많은 경비가 들었다. 예전에는 조합비로 경비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참여하는 조합원들이 돈을 내고, 지역에서 비용 마련을 위해 모금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자대회에 참여했다.

상당히 건강한 비용이었지. 요즘은 돈 대줘도 모이기 힘든 상황인데, 엄청난 차이죠. 현대중공업 조합원들 예를 들어 88년도부터 92, 93년까지는 연말정산 하면 부인 모르게 10만 원은 꼼쳐놓는다 그랬거든. 왜 꼼쳐놓냐면 전국노동자대회 올라가서 쓸 돈. 그 정도 열정이 있었던 거죠. 그때하고 지금하고는 대중들이 노동자대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라든가 인식이 많이 바뀌어 버렸고, 노동자대회도 사실은 많이 퇴색된 거 같아요.

전국노동자대회 하면 또 떠오르는 건 추웠다는 거다. 포근하다가도 그때만 되면 왜 그리 추웠는지. 당시엔 “11월 노동자대회 때 내복 입고, 5월 1일 노동자대회 때 내복 벗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5월 1일 노동절대회 때도 바람 불고 추웠으니 말이다. 내복, 바지, 마지막으로 솜바지로 단도리를 하고 학생회관, 체육관 등 바람만 피할 수 있는 곳이면 신문지 깔고 덮고 잠을 잤다. 노동자들의 자발적 열기로 추위를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열정이 모인 첫 전국노동자대회의 결과물은 전노협 건설을 위한 구체적 논의로 모아졌다. 여의도까지 행진을 한 후 마창노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당사 점거에 들어갔고, 일주일 후 전국의 지도자들이 농성에 참여했다. 농성장에서 전노협 건설을 전제로 한 전국회의를 구성하기로 해 다음 달 전주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노동자들이 외친 악법철폐, 전노협 건설, 노동해방 구호가 대회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전국조직 건설로 이어졌다.

2009 전국노동자대회에서는 무엇을 외쳐야 하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났다. 전국노동자대회의 ‘기원’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왜 대회를 여는지, 무엇을 결의해야하는지 잊혀져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도대체 올해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외쳐야 하는 건가.

민주노총은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2009 전국노동자대회’의 3대 ‘의제’로 ① 비정규법, 최저임금법 개악저지 ② 복수노조 전임자 노조법 개악저지, 노동탄압 분쇄 ③ 공공성 파괴정책 분쇄, 사회공공성 강화를 내걸었다.

이 중 복수노조 관련해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허용 교섭창구 단일화 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노동법 개정 관련해서 한국노총과 논의 창구를 열고 실무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는 복수노조 허용이 기업별 노조를 고착화 하고,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자본의 의도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이를 반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에 반해 복수노조를 전면 허용하되 교섭창구 단일화를 할 경우 사실상 복수노조 설립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쟁점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한국노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복수노조를 허용하지 말자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는 복수노조를 허용하지 말자는 자본의 요구와도 일치한다.

이 문제는 단결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논란의 여지가 없다. 민주노총은 조직의 방침을 명확히 하고 조합원들과 토론해야 한다. 방침은 있으되 조직하지 않는다면, 더구나 복수노조 허용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한 한국노총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을 신뢰하기 힘들다. 민주노총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한국노총과 논의하고 행보를 같이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이야기하고 그 전망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전국노동자대회가 처음 만들어진 이유는 복수노조 철폐 등 노동자의 단결권을 가로막는 노동악법 철폐, 한국노총과는 다른 전노협을 건설하자는 게 핵심이었다. 전국노동자대회의 이 두 가지 정신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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