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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역사, 탄광 노동자
첨부파일 -- 작성일 2008-09-02 조회 2579
 
[창간호] 이달의 노동자역사
짧은 역사, 탄광 노동자
글 :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 사진 : 한내 자료실, 사북청년회의소 홈페이지
막막궁산(寞寞窮山)
사북으로 향하는 길은 막막하다. 일자리가 순식간에 없어져 다들 떠나고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 탄광촌이라 그런 걸까. 동원탄좌 입구 안경다리를 감싼 조형물이 눈에 띈다. 1980년대 탄광노동자와 강원랜드라... 두 가지가 조형물 하나로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사진 : 도로쪽으로 본 안경다리 조형물

사진 2. 동원탄좌 쪽에서 본 안경다리 
사북 고한 지역은 한때 국민들의 생활 에너지를 책임지다시피 했던 활기찬 곳이었다. 1962년 고한에 삼척탄좌가, 사북에 동원탄좌가 개업을 하면서 탄광촌 문화와 도시 체계가 만들어진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석탄산업이 대규모로 육성되었고 자본 규모가 커졌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역 내의 무연탄 생산량이 전국의 30% 이상을 차지했다. 도시가 형성되고 10년만에 이 지역 인구는 3만 명을 넘어섰다.
“태백에 가면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그만큼 돈이 많이 돌아서 생긴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노동자 생활이 윤택한 것은 아니었다. 물가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속했고, 생활환경은 형편없었다. 죽음을 옆에 두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피폐했다. 탄광 바로 옆에 있는 선술집에 들러 한 잔 하지 않고는 집에 갈 수 없는 신세였다. 버는 돈 반이 술집 외상값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세상이 온통 검은색인 줄 알고 자라났다.
노동자들의 투쟁
이런 생활에 금을 그은 것이 80년 사북항쟁이다. 동원탄좌 어용노조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어 지역 투쟁으로 번져 신군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투쟁이다. 이 투쟁 이후 갱에서 나와 씻을 수 있는 목욕탕이 생겼고 아파트형 사택도 생겼다. 전두환 신군부가 사북항쟁 이후 이를 무마하기 위해 동원자본에게서 10억 원을 받아 아파트를 짓고 근로자복지회관을 지어 구판장을 만들었다. 직영노동자, 관리직 혹은 반장 등 1/3정도가 13평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는 여전히 옆방에서 방귀 뀌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한지붕 5가구 사택에 살았다. 그런데도 전두환이 방문했던 지장산 사택 자리엔 ‘대통령 오신 마을’ 팻말이 아직도 남아있다.
80년대 중반 광부 경쟁률이 5대 1이었다. 인천 공장에서 만근하면 16만 원정도 받았는데, 탄광에서 만근하면 38만 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노총 발표 최저생계비가 54만 원 정도였고, 제조업의 2배 이상의 노동 강도, 9배가 넘는 재해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그리 높은 임금도 아니었다. 게다가 도급제와 부당한 임금착복 등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진 3. 80년 사북항쟁

사진 4. 사북항쟁 이후 지어진 동원탄좌 아파트 사택
사북항쟁 이후 폭도로, 가해자로 침묵하던 노동자가 87년 8월 노동자대투쟁의 물결에 합류했다. 스스로를 ‘광산쟁이’, ‘햇돼지’라 부르며 희망 없이 살아가던 노동자가 자신의 존재를 사회에 알려나갔다. “도급제 철폐하고 월급제 쟁취하자” “근로조건 개선, 임금인상 단체협약 쟁취”를 외쳤다. 부인과 가족들까지 함께 투쟁에 참여했다. 이렇게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이 89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90년대 석탄산업합리화정책과 3.3 생존권 쟁취 투쟁
1989년 말부터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 시작되면서 이 지역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절대 다수의 주민들이 탄광과 연관된 삶을 살고 있었기에 그 충격이 더 컸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면서 공해를 발생하는 등 부작용이 많은 석탄 생산과 소비를 점차적으로 줄여 ‘0’으로 만들어나가겠다는 정책이다. 대책없는 구조조정과 폐광이 시작되었다. 1987년에만 해도 사북 고한의 인구는 6만에 가까웠다. 그러나 합리화 사업 첫해인 1989년 6개 탄광이 폐광하면서 2만여 명이 외지로 빠져나갔다. 168개에 달하던 사북 고한 지역 탄광이 두 곳만 남고, 6만에 달하던 인구가 불과 5년만에 1/3로 줄어들었다. 광업소들은 합리화 사업 이후 탄광에서 번 돈을 싸들고, 이윤이 될만한 도시로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정부가 몰락해가는 지역이나 퇴직 노동자를 위해 내놓은 대책은 없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안산, 서울, 인천 지하철공사 현장으로.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 간 인원이 4천 명 규모 동원탄좌에서만 2천 명에 달했다.
지역공동화는 상인들에게까지 위기로 나타났다. 80년대 노동자 투쟁을 곱지 않게 바라보았던 상인, 지역 유지들도 남은 이들과 함께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주민들이 출자해 눈썰매장 같은 공동사업을 추진하고, 군수품 공장이나 국정교과서 공장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급기야 산업폐기물 처리장, 핵폐기물 처리장까지도 유치하겠다고 나섰지만 정부는 관심도 없었다. 지역사회의 위기의식은 극에 달했다. 1995년 2월 27일 ‘탄광지역 생존권 확보 1차 주민총회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사북 고한의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모두가 다 나왔다.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3월 3일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사북 고한지역을 포함한 주요 폐광지역을 개발촉진지구로 조기 지정하고 폐광지역개발촉진특별법(입법 과정에서 폐광지역개발지원에관한특별법으로 바뀜)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사진 5. 생존을 위해 탄광으로 들어가는 탄광노동자
사북항쟁 20년 후 강원랜드, 그리고 여전히 남은 문제들
3.3 투쟁으로 특별법을 쟁취했지만 민간자본 유치는 쉽지 않았고, IMF위기 상황은 주민들을 다시 절망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은 카지노 사업을 대안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2000년 문을 연 강원랜드는 자본 구성이나 지역내 위치로 볼 때 지자체와 지역 주민의 생존권을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원랜드는 정부와 강원도 그리고 정선군, 태백시, 삼척시, 영월읍 등 공공부분 출자금 545억원과 주식공모 등 민간자본 1,813억원을 조성해 출범시킨 국내 유일의 내국인 출입 카지노이다.) 과거 탄광에 의존해 도시 전체가 유지되었듯이 남은 주민들은 강원랜드에 의존도가 높다.
그런데 폐특법 시행이후 주민들이 기대하는 만큼 도시는 좋아졌을까? 교육 문화 의료 환경은 낙후되거나 더 좋아진 것이 없다는 게 공통된 평가다. 돈 있는 사람들은 강원랜드 내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지라 시내 숙박시설이나 식당을 찾는 사람은 적다. 전당포를 이용하기 위해 오는 사람,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지역 주민들 중에 카지노에 들락거리기 위해서 주소를 외지로 옮기는 사람, 일은 강원랜드에서 하지만 아이들 교육을 위해 실제 주거는 다른 대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이 많다. 사북 고한은 하루가 멀다하고 콘도, 여관, 호텔 등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있으며 땅값 역시 폐특법 시행 전보다 10배 이상 올라 도심은 평당 1,000만 원 넘는 곳도 있다. 동원탄좌 땅값은 몇십 배로 뛰어 손 안 대고 코 푼 셈이다.

사진 6. 사북역 앞 시계탑 "가정의 행복까지 배팅하진 마십시오"
결국 강원랜드의 화려함과 함께 지역 주민들에게 온 것은 가진 재산을 탕진한 폐인들뿐이었으며, 강원랜드의 수익금도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곳으로 투자되고 있다. 도박의 도시로 변모한 탄광촌은 외형만 변화했을 뿐 인생막장의 내용은 그대로인 듯하다. 흉물스러운 동원탄좌에 쌓여 있는 검은 돌무덤과 함께......
이제 지역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또다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교육문제, 종합레저 산업 유치, 석탄산업합리화 조치로 탄광과 사업시설에 대한 지원과 보상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소유로 갖고 있어 막대한 부동산 이익을 챙기고 있는 동원자본 이익 환수 등을 걸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강원랜드가 민영화 대상에 오르락내리락 하니 이 또한 과제가 될 것이다. 80년대 노동자 투쟁 경험과 90년대 지역 주민의 투쟁 경험은 폐광촌 주민들의 생활 속에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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