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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천 할머니_송시우 (45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09-16 조회 1111
 

무명천 할머니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송 시 우


인생을 살아가면서 전환점은 수없이 다가오기도 하고
, 지나치기도 한다. 나름대로 행복을 위한 기회를 부여 잡을려고 노력을 하지 힘든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비켜갈 수 없는 일들이 불가역적인 상태로 다가섰을 땐 사람들은 운명이라고들 한다.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꽃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딛는 말들을 할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무명천 할머니-월령리 진아영. 허영선>

   무명천 풀고 
   오늘 여기 누웠네
   멍에처럼 날아간 턱을 옥죄던
   무명천 벗어두고 
   꽃상여도 없이
   호곡할 복친도 없이 
   여기 오늘 홀로 누웠네 
   고운 잔디옷 입고 
   서천 꽃밭 가는 길
   외롭지 않네
   부끄러이 숨어 핀 가을꽃 벗 삼고
   날아오른 마음이 새소리 길 삼아 
   저 세상 가려네 
   악귀 같은 이승의 기억일랑 
   가는 길 낮잠 삼아 벗어버리고
   이제 고운 얼굴로 도올라 환생하려네 
   무명천 매지 않은 맨 얼굴로 살려네 
   그렇게 다시 여기 온다고 말하려네 
   말을 하려네

                          <여기 무명천할머니 잠들다. 김경훈>

 

위와 같이 제주도 시인들이 애섧게 표현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무자년 난리는 제주도민들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순박한 시골 아낙이 동네 밭에서 일을 하다가 토벌대가 오니까 무의식적으로 피할려고 하였고, 그 상황을 주시하던 토벌대는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에 의해 유격대이거나 아니거나 움직이는 사물에 대해 총구를 겨누었고, 결국 35살의 젊은 아낙은 날아오는 총탄에 의해 1949년 추운 겨울 112일에 턱을 잃고 만다. 아래턱이 없으니까 음식물 섭취가 힘들었기에 평생 밥 먹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었고, 남들이 흉을 볼까봐 무명천으로 없어진 턱을 동여 맨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무명천 할머니라 불렀다. 그렇게 홀로, 말을 할 수 없는 몸으로, 말 못할 한을 가슴에 안고, 모진 세월 55년을 살다가 2004년 어느 무더운 여름 98일에 한 많은 세상을 등진 진아영 할머니를 추모하는 글이다.


 


 

할머니의 삶 자체가 역사가 되어 버렸고,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아무런 말을 못했던 제주4?3사건진상규명의 역사와도 같다. 또한 그로 인해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제주4?3사건 후유장애자의 모습과도 같다.

제주4?3사건의 트라우마 속에서 집을 나올 땐 항상 자물쇠로 나올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한경면 판포리 고향을 등지고, 선인장이 꽃피는 한경면 월령리로 이사 오게 된다. 갯가에서 보말을 잡고, 남의 밭에서 검질을 매 주고 하면서, 번 돈 3천여만 원은 양로원에 기증했다 한다.

1999년 김동만 다큐멘터리 작가가 무명천 할머니의 영상으로 세상에 드러냈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상징성으로, 혹은 수난사적인 입장에서, 개인사로, 여성사로 제주4?3사건의 확장성을 시도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자체가 좋을지 모르겠다. 2주기 추모일부터 할머니의 삶터를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일어 유품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할머니 명의의 전기도 끊지 않고 있다. 뜻을 모은 사람들과 제주주민자치연대를 중심으로 진아영 할머니 삶터 지킴이운동을 벌여 나가고 있으며, ?고등학생의 자원 봉사활동도 진행해 나가고 있음은 물론 작년부터 뜻있는 사람들로 진아영할머니 삶터 보존 문화제 및 제사를 기일에 맞춰 98일에 실시하고 있어 제주4?3사건의 상징 인물로 재조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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