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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노사정위 합의 부결(1998년 2월)
1997년 말 한국은 외환위기로 사상 초유의 국가위기 사태를 맞이했다. 한보의 부도로 시작돼 삼미·진로·대농·기아 등 대마불사라는 말이 나돌던 대재벌들도 부도 상태에 빠지고, 동남아 금융위기와 더불어 국제금융시장의 투기세력이 한국을 공략하면서 급격한 환율인상과 외환보유고 상실이 뒤따랐다.
한국 정부는 IMF의 구제금융으로 긴급수혈을 했지만, IMF는 한국에 구조조정과 안정화 프로그램을 강요했다. 그 핵심은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민영화, 시장개방, 구조조정이었다. 이미 IMF 구제금융 조건으로 합의한 ‘경제구조조정 및 금융시장 개방에 관한 정책이행 계획’에는 정리해고 제한 완화와 파견근로제의 도입 등 노동시장의 유연화 항목이 포함돼 있었다.
민주노총은 외환위기를 맞아 1997년 12월 10일 중앙위원회와 12월 24일 임원·산별대표자회의를 거쳐 △재벌과 현 정권을 주요 투쟁 대상으로, IMF를 내세워 한국경제를 장악하려는 미국 반대 △재벌개혁·고용안정 위한 노사정 사회협약 쟁취투쟁 공세적 전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 전개를 투쟁 기조로 세웠다. 아울러 △재벌해체 △고용안정 △노사정 대책기구 구성 △경제 파탄 청문회 개최 및 책임자 처벌 △자본시장 전면개방 반대 및 IMF 재협상 △물가안정 및 재정안정을 투쟁 요구로 내걸었다.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은 26일과 27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따로따로 만나 IMF 극복을 위한 노사정협의회 구성을 제안했다. 민주노총은 참가에 동의했으나 △협의기구의 성격과 실효성 보장 △재벌 개혁과 책임자 처벌 △정리해고·근로자 파견제 반대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1998년 1월 4일 김대중 당선자는 인수합병 시 정리해고를 허용하는 금융산업 구조조정법을 조기에 통과시킬 것과 이를 위해 1월 중순 임시국회 개최를 요구했다. 이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대량 실업과 고용불안에 신음하던 노동자들을 더욱 자극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 불참과 더불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 개악에 맞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결정했다. 1월 7일 중앙위원회, 1월 8일 전국단위노조대표자회의에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결의했다. 민주노총은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 대정부·대재벌·대IMF 투쟁을 전개하고 각급 조직은 최우선으로 중앙교섭에 역량을 집중, 최종 방침은 2월 정기대대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요구내용은 △국민 대통합을 위한 선행조치로 경제 파탄 책임 규명과 처벌, 구속노동자 사면복권과 해고자 복직 △재벌체제 개혁 등 경제민주화와 사회복지제도 개선 △노동기본권 등 민주적 노사관계의 확립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 유지·창출과 실업자 생계 보장, 직업 훈련 △최저임금제 개선과 정리해고 파견제 반대 등이었다. 이에 김대중 당선자는 1월 14일 금융산업 구조조정법안을 노사정 협의 후 처리키로 했고, 이후 양대노총과 새정치국민회의가 만나 노사정위원회 구성에 합의하면서 1월 15일 노사정위가 출범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교섭과 협상을 전개하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법제화를 강행할 시 노사정위원회에 불참하고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1월 20일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 분담에 관한 노사정 공동선언문’을 채택해 △기업경영 투명성 확보 △물가안정 △고용안정 및 실업 대책 △사회보장제도 확충 △노동기본권 보장 국민 대통합 조치 등 10대 의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핵심 쟁점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법제화를 비롯한 공무원·교사의 노동기본권 보장,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 실업자 조합원 자격 인정 등이었다. 정부는 계속해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압박했고,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민주노총은 1월 21일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2월 5일 한국노총이 적극적 타결 의사를 표명하고 정부의 민주노총 압박이 계속됨에 따라 민주노총 투본대표자회의는 노동기본권 확보 시 정리해고와 파견제 ‘논의’가 가능하다는 방침을 협상팀에 전달했다.
‘논의할 수 있다’는 방침이었으나, 협상팀은 2월 6일 총 90개 합의사항 및 21개 협의 과제를 포함한 포괄적 내용으로 노사정 사회협약에 합의하고 말았다. 내용은 △재벌체제 개혁(상장법인 사외이사제, 상호채무보증 전면 금지, 재벌 지배 대주주와 임원에게 경영책임을 묻는 상법 개정, 소액 주주권 강화와 근로자 참여 증진) △사회보장 제도 개선(사회보험 각종 위원회에 노사 참여 확대, 4대 보험의 통합징수 관리방안 강구, 의료보험 통합 일원화) △고용안정 및 실업 대책(1999년 7월까지 고용보험 전면적용, 실업자 생계지원, 취업알선 및 직업훈련망 확충, 노동시간 단축 등 고용안정) △노동기본권(1999년 7월부터 교원의 노조결성권 보장하도록 1998년 정기국회에서 법 개정, 노조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 초기업단위 노조 가입 인정, 1999년 공무원직장협의회 설치)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파견제 법 개정 등이었다.
2월 9일 개최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린 서울 유림회관에는 분노한 대의원과 조합원들이 대거 참가해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잠정합의한 노사정합의안을 놓고 표결한 결과 반대 184, 찬성 54로 부결시켰다. 주된 반대 이유는 정리해고제 도입이었다. 민주노총이 정리해고를 수용함에 따라 현장에서는 정리해고 공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나머지 합의안은 현찰이 아닌 ‘어음’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로써 상근임원 전원이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으며 2월 13일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2월 12일 개최된 비상대책위원회 2차 회의에서, 경제위기 시기 총파업은 여론 면에서 불리하다는 점과 조직 내 갈등 증폭, 투쟁 동력 부재 등을 근거로 총파업을 철회했다.
1999년 2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는 1기 노사정 합의에 대해 △정리해고 저지선을 와해시켜 현장에서 ‘합법성’을 내세운 급격한 정리해고 공세를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고용안정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기본원칙조차 방기했으며 △‘논의할 수 있다’는 투본대표자회의의 결정이 교섭 대표에게 양보의 범위와 고수의 범위를 세우지 않은 무책임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특히 ‘논의할 수 있다’는 방침을 뛰어넘어 협상팀이 잠정 합의까지 한 것은 의결기관의 결정을 위배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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