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뉴스레터
..... 회원 마당
..... N라면 노동자의 기억 (11)
첨부파일 -- 작성일 2021-11-15 조회 238
 

N라면 노동자의 기억 11화 

*

 1989년 노조위원장 선거운동을 위해 12시간의 밤기차를 타고 내려온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부산공장과 조합원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N라면 노조의 조합원이면서도 전혀 딴 회사의 노조 조합원인 듯 지내온 탓이었다. 임금과 상여금 협상 때 위원장이 회사 대표와 밀실야합을 하고 잠적해 안양공장에서는 조합원들이 노조사무실을 찾아가 항의하고 연장근로를 거부해도 안성과 부산공장에서는 남의 일 구경하듯 했었다. 대의원대회에서 안양공장의 민주파들이 위원장의 독선과 비민주적인 조합운영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해도 좌경 불순세력의 노조 집행부 장악기도 쯤으로 치부하고 오히려 민주파를 비난할 정도였다. 지부의 관리자들과 간부들이 안양의 민주파 대의원과 조합원들의 노조민주화 운동을 그런 불순한 행동으로 선전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회사와 노동조합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오로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해고자인 송인자양과 문찬식 등 대의원 활동을 했던 몇몇 사람들이 연락이 닿는 부산대의원들이 있었고, 이들을 통해 부산공장의 공청회가 추진되고 있었다. 소위 부산공장에서 노조 집행부의 반대파로 분류되어 강경파로 불리는 30대의 남자 조합원들이었다.

그러나 불고기 대신 자장면으로 한다던 우리의 기본 원칙은 처음부터 무너졌다. 부산공장 부근에는 10여명이 들어갈 자장면 집만 있을 뿐 수백 명이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회사의 강당을 이용한 사내 공청회가 회사 측과 타 후보들의 반대로 불가능해 밖에서 공청회를 해야 했다. 또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오전 10시에 아침도 점심도 아닌 라면을 먹고 오후 2시에 퇴근을 하는 사람들을 붙들어놓고 얘기를 하자니 뭐라도 먹여야 했다. 이는 밤 10시와 새벽 6시에 퇴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4일이 라면점심이니 밥이라기보다는 라면이 주식인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이미 타 후보들이 한 달 전부터 번갈아 가며 고기와 술파티를 열어 조합원들의 입이 거기에 길들어져 있었다. 땡전 한 푼 나올 일이 없는 조합원의 심부름꾼을 뽑는 일에 그렇게 돈을 뿌릴 이유가 없다며,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는 본전 생각이 나 그 돈을 보충하기 위해 임금협상 때 회사에 손을 벌리거나 노조비를 빼다 쓸 거라며 설득을 해보지만 그곳 대의원들은 막무가내였다. 자장면을 사주면 조합원들에게 욕만 바가지로 먹는다는 거였다.

아무튼 숯불구이 집만이 즐비한 부산공장 부근의 모라시장 거리는 후보자별로 경쟁하듯 1~2백 명씩 조합원들을 모아 고기와 술파티를 여느라 때 아닌 호황이었다. 우선 사람을 모아야 이야기를 할 것이고, 부산공장 부근의 경우 숯불갈비집 외에는 대형 음식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쓰리긴 하지만 결국 우리도 타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모라회관에서 불고기에 술을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노조 세력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을 한 돈이긴 하지만 여성 조합원들의 경우 자기월급의 절반 혹은 전액을 희사해 조성한 선거비용으로 이렇게 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부산공장까지 와서 공청회 한번 못해보고 올라갈 수도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메뉴는 같아도 선거운동 방법은 달랐다.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자신들의 공약이나 노동조합의 방향에 대한 이해와 설득보다는 자신들의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타 후보를 비방하는 게 여타 후보들의 선거 운동이었다. 특히 회사 측의 환심을 사고 상대적으로 과격하지도 외부 불순세력과 연계되지도 않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민주후보를 비방하는 게 유행이었다. 우리들의 공약중의 해고자의 복직과 임금과 단체협약의 최종안에 대한 조합원찬반 투표문제를 거론하며 허구한 날 파업만 해 회사를 말아먹을 사람들이라는 게 그들의 공통된 선전이었다.

우리는 거짓에 의한 비방은 진실로서 대응한다는 대 원칙하에 상대후보의 비방을 일체 삼간 채 정책대결로 선거분위기를 이끌었다. 수백 명의 조합원 앞에서 우리들의 공약을 설명하고 제한 없이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는 식의 공청회였다. 민주노조의 필요성과 회사와 어용세력의 민주노조에 대한 비방의 의도, 노동조합의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운영만이 조합원들을 주체적으로 참여시키고, 그런 단결력을 바탕으로 회사 측과의 강력한 협상도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를테면 민주노조의 원칙과 방향에 대한 토론회였다. 또한 끼리끼리 조합원들을 모아다 술과 고기를 사주며 타 후보를 비방하기보다는 흑색선전과 유언비어도 줄이고 선거자금도 절약하기 위해 모든 후보자와 조합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공약도 설명하고 조합원들과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합동공청회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약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무슨 수당의 신설이나 임금 상여금의 몇% 인상 등 주로 돈에 관한 공약이 주류인 타 후보들과는 달리 우리는 단체협약과 노조 규약상의 비민주적 조항과 노조활동 방해조항의 개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해고자의 복직과 임금과 단체협약안의 조합원 찬반투표는 어느 후보도 따라 할 수 없는 민주후보만의 공약이었다. 이외에도 회사의 교육 상담실에서 관장하는 사내서클 활동을 노동조합의 문화부에서 관장하는 등 7개의 노동조합 활동부서를 활성화 시키는 것도 중요한 공약중의 하나였다. 노동조합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들 활동부서의 활발한 활동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관리자들과 타 후보들의 역선전의 대상인 해고자 복직이나 조합원 찬반 투표문제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파업만 일삼겠다는 게 아니라 조합원을 위해 싸우다 해고된 조합원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느 누가 조합원을 위해 싸우겠냐는 논리였다. 조합원 찬반 투표문제 역시 2천여 조합원과 그 가족들의 생존권 문제인 임금과 단체협약을 당사자들의 의사를 물어 결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얘기였다. 회사 측 대표 역시 중요문제를 본사 임원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회사와 노동조합 위원장이 지난 12년간 조합원을 무시하고 밀실협상을 통해 결정해왔기 때문에 조합원 찬반투표는 불가피한 문제임을 역설했다. 그러한 압력장치가 있을 때에만 회사와 노조 집행부가 성의를 가지고 끝까지 협상을 할 것이라는 게 그간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조합원의 과반수 찬성이 없는 파업이나 명분이 약한 파업은 안할 것이며, 회사 측의 무성의와 조합원 무시행태가 반복될 경우엔 언제든지 조합원들과 함께 논의 결정하고 행동할 것임을 천명했다. 뿐만 아니라 회사의 조합원에 대한 무기가 직장폐쇄이듯 노동조합의 회사에 대한 무기가 파업 등의 단체행동이며 이는 불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노동조합법상에 명시된 합법적인 단체행동임을 주지시켰다. 민주세력은 곧 과격 불순세력이며 따라서 모든 파업은 불법이라는 인식을 불식하기 위함이었다. 조금이라도 적은 돈을 주며 많은 일을 시켜 공장을 더 크게 넓히려는 기업주를 상대로 노동자가 경제적 인간적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밀고 당기는 신경전도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을 각오로 싸우는 투쟁도 필요함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가 이나마 누리고 있는 경제적 인간적 지위도 정치권력이나 기업주의 은혜가 아니라 선배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쟁취된 것임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금 이 시간도 보다 나은 지위를 위해 또 끊임없이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악화시키려는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으며, 결국 노동자의 투쟁은 정당방위인 동시에 발전을 위한 몸부림임을 강조했다. 노동자라는 말만 써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처다 보고, 투쟁이란 말을 써도 과격 불순세력으로 다시 보는 조합원들에게는 차라리 이런 정면 돌파 작전이 효과적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회사 측과 타 후보들의 무차별적인 흑색선전과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우리들의 주장을 펼치는 것은 차차 조합원 사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고 타 후보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일체 타 후보를 비방하지 않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아, 그렇게 돼야 돼, 하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


1986년 입사 9년 만에 노조사무실을 처음 구경한 이후 나의 화두는 불순분자, 빨갱이였다. 노조사무실을 찾아가 노사대표가 단둘이 만나 밀실야합 임금합의를 한 것에 대해 항의한 게 불법이고 선동이고 불순분자라며 시말서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회사 측과 어용노조의 말과 행위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라는 악선동을 일삼아 왔다. 노조대의원 선거가 회사의 대의원 선거인양 관리자들이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대의원들이 조합원을 상대로 공청회를 하고 회의보고를 하는 것도 불법이고 선동이라고 매도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삼청교육대 출신 안양조직폭력배인 한상복을 구사대로 특채해 노조민주화 세력을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하게 하고, 회사 측과 어용노조가 이를 즐기며 악용했다. 야근 때만 되면 술에 만취돼 각목을 든 채 빨갱이새끼들 때려죽인다며 난동을 부렸다. N라면 민주세력의 구심점인 안양공장 공무과 자동정비반 사무실의 현관출입문 유리창이 그의 주먹에 박살이 나기가 일쑤였다. 한상복은 팔뚝에 피를 철철 흘리며, 유리조각을 오드득오드득 씹어가며 내 주변을 향해 뱉어대곤 했다. 내 머리위에 담뱃재를 털기도 하고, 빨갱이 새끼들은 눈깔을 빼버려야 한다며 인지와 중지를 가위처럼 펴 내 두 눈을 쿡쿡 쑤시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비들은 물론 숙직자들도, 심지어는 그의 담당 부장도 어쩌지를 못했다. 그가 유일하게 말을 듣는 사람은 안양공장 2인자인 이부식 노무담당이사 뿐이었다.

나는 불순분자, 빨갱이 소리는 일상적으로 듣는 소리로 흑색선전이라며 애써 무시해왔다. 마땅히 대응할 방법도 없었고, 어설픈 대응은 어용세력들의 불순분자, 빨갱이 합창에 추임새 노릇만하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힘으로 깨는 게 상책이지만 대부분이 미혼 여성조합원들인 민주파 조직으론 한계가 있었다. 남자들의 경우 정년 때까지 다닐 직장이니 조용히 지내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민주세력과의 만남 자체를 기피하는 실정이었다.

비밀조직인 ‘N민주노조실천 노동자회의 활동과 지하신문인 징소리의 배포를 통해 어느 정도 깨어있는 안양공장이 이러니 회사와 어용노조만이 유일한 소식통인 안성과 부산 공장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회사 측의 대변인 노릇만하는 어용노조의 행태에 분기탱천한 87년과 89년 파업이 외부 불순조직의 사주를 받아 노조를 장악해 회사를 망하게 하려는 일부 불순세력들의 선동이라고 믿을 지경이었다. 1년에 한번 열리는 3개 공장 대의원모임인 대의원대회 때의 두 공장 대의원들의 언행을 보면 흡사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한 북한 주민들과도 같았던 것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흑색선전이라고 치부하지만, 불순분자, 빨갱이타령은 사실과 상관없이 일단 애매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당하는 사람들로서는 어설픈 해명을 하자니 그들의 짓거리에 추임새를 넣어주는 꼴이 되고, 그냥 무시하고 넘기자니 인정을 하는 것 같기도 한 뜨거운 감자였다. 그러다보니 듣는 사람들로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당하는 사람들이 흑색선전이라며 부인을 하면 할수록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고약한 문제였다.

거짓말을 하려면 크게 자주 하라. 그럼 대중들이 믿는다고 선동했던 나치의 입인 괴벨스식 악선동임을 익히 알면서도 도대체 왜, 느닷없이 불순분자 빨갱이타령인지 궁금했다. 이 문제를 깨지 못하면 앞으로도 계속 그들의 노리개를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수세적이 아닌 공세적인 방법으로 조합원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유도의 되치기 한판처럼 보기에도 후련할 정도로 그들의 콧대를 꺾을 만한 방법이 절실했다.

1989년 노조위원장 보궐선거 일정이 확정되자 나는 더더욱 불순분자, 빨갱이에 집착했다. 기도를 하는 마음이었다. 자나 깨나 머릿속은 불순분자, 빨갱이였다. 대의원선거 때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했으니 위원장선거 때의 불법, 은폐, 조작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공과 형사가 대낮에 해고자와 민주파 조합원들을 차량으로 미행하게 한 회사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부산공장의 투표함 운송이 비행기 화물칸 외엔 안 되는 N라면 노조위원장 선거였다. 투표와 동시에 공장별 개표도, 승용차를 이용한 운송도 절대 안 되는 아주 별난 선거였다. 공안기관과 그 출신자들을 통한 공항에서의 투표함 바꿔치기가 대기업들의 뿌리 깊은 어용노조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방해 수법이라는 것이 민주노조 세력들에게 정설로 통할 때였다.

 

*

 

선거 유세를 며칠 앞둔 날 밤이었다. 잠결에 불현 듯 떠오른 불령선인이란 말에 화들짝 일어났다. 그리고는 불을 켜고 책상위의 펼쳐진 종이에 적었다. 잠을 깬 아내가 돌아누우며 짜증을 부렸으나 개의치 않고 그 메모지를 바라보며 쾌재를 불렀다. 좀처럼 풀 수 없을 것 같던 숙제를 푼 느낌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간절히 원하니 하늘이 도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국어사전을 펼쳤다. 보다 확실한 뜻을 알고 싶어서였다.

 

불령선인(不逞鮮人) : 일제 강점기,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

이어서 백과사전을 펼쳐보았다. 백과사전에는 좀 더 자세한 기술이 되어 있었다.

 

불령선인(不逞鮮人 후테이센진) : 일본 제국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지칭한 용어이다. 일본어의 후테이(不逞)는 멋대로 행동함, 도의에 따르지 않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센진(鮮人)이란 용어는 조선인을 의미하는 조센진의 약어로서, 조센진이 본디 경멸의 의미가 없는 데 반하여, 약칭은 경멸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현재 일본에서는 차별용어로 정해져 있다. 일반형은 센징, 여성을 지칭할 때는 센조(鮮女)라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용례 : 일본 총독부의 개황에‘3.1운동 이후 불령선인들의 배일감정이 통제할 수 없이 깊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만주, 간도지방의 독립군 활동 이후에는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이 수립되어 군 병력이 투입되었다. 간도 대지진시의 조선인 학살사건 때의 조선인 폭동조작 때에도 이른바조선인 폭도들을불령선인으로 표현하였다.

 

이 밖에 일왕이나 식민지통치에 대한 험담에서 사회주의 사상혐의 등 광범위한 반체제 인사들에게 불령선인의 딱지가 붙었다. 불령선인의 용어는 이후 일제의 기만적인 용어 사용에 대한 반항 및 조롱의 형태로, 독립운동 인사들이 스스로 자칭하기도 하였다. 박열은 불령선인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거의 동시에 해방직후인 19469, 미군정과 친일경찰, 우익에 의해 강제 진압된 노동자 총파업과 대구 10월 항쟁이 떠올랐다. 부산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정치범석방, 월급제 실시, 점심 지급과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25만 명의 노동자들이 벌인 생존투쟁이었다. 미군정의 정책실패로 물가는 치솟는데 임금은 그것을 못 쫓아가고,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 때였다. 곧이어 터진 대구 10월 항쟁 역시 식량부족과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가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 등으로 2개월간 경찰서 등을 습격하며 투쟁한 최초의 민중항쟁이었다. 미군정, 친일경찰과 손을 잡고 노동자들의 파업과 민중항쟁을 진압한 우익이 좌익을 힘에서 앞서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다는 게 역사적 진실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뇌리 속은 제주 4.3사태와 지리산빨치산 등이 줄줄이 떠올랐다. 해방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죽어간 수만, 수십만의 원혼들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렇게 개죽임을 당하고도 반백년이 되도록 불순분자 빨갱이의 누명을 벗지 못하고, 그 올가미가 연좌제가 되어 후손들에게까지 대물림을 하고 있는 현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모두가 불순분자 빨갱이였고, 자신들이 불순분자 빨갱이라면 무조건 이유 없이 불순분자 빨갱이였다. 오늘의 N라면의 악선동 수법 그대로였다. 그러다보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에게 불순분자,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불순분자, 빨갱이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의 선거 유세 때였다. 1,200여명의 조합원이 모인 안양공장에서 노동조합의 설립 목적이 회사 측의 이익극대화가 아닌 조합원의 귄익 증진임을 명시한 노동법과 노동조합 규약, 그리고 회사 측엔 직장폐쇄권을 주고 노동조합엔 단체행동권을 준 노동법 조항을 낭독한 후였다.

노동법상 노동조합 활동의 방해와 재배개입 금지를 명시한 부당노동행위의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함에도어용노조 중독증에 의한 습관적인 부당노동행위를 계속 하는 이유에 대해 좌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좌중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뒷자리의 회사 관리자들 역시 흘끔흘끔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 다음은 공약사항이었다, 그러나 나는 유세 원고를 접어 바지 주머니로 넣었다.

 

조합원을 위해 일하는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데, 회사보다는 조합원의 눈치를 더 보는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데, 그것도 유리창 하나 깨지 않고 말로만 그러는데도 불순분자,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불순분자, 빨갱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유가 없는 게 아닙니다. 회사와 어용노조의 말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불순분자, 빨갱이라는 것입니다. 제발 경찰이나 검찰, 안기부에 신고를 해달라고 간청을 해도 신고는 않고 불순분자, 빨갱이라고만 합니다. 몇 년째 불순분자 빨갱이타령만 합니다.”

 

좌중의 시선은 일제히 어용 집행부 간부들과 구사대, 그리고 대강당 뒤에 포진한 관리자들에게로 쏠렸다. 하나같이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리는 빛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즐기는 좌중들의 표정과는 달리 어용 집행부 간부들과 구사대, 회사 관리자들은 화장실이 급한 듯 좌불안석의 빛으로 연단의 나만 응시했다. 나는 흘끔거리며 이런 장내의 표정을 즐기기 바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따지듯 분명하게 말했다.

 

회사 측과 노조집행부, 구사대에게 다시 한 번 촉구합니다. 아니 제발 부탁합니다. 지금 당장 현장사무실로 가 신고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이나 검찰, 안기부에 전화를 해 여기 불순분자, 빨갱이들이 있으니까 빨리 잡아가라고. 그리고 포상금도 두둑이 받기 바랍니다. 불순분자, 빨갱이가 있는 줄 알면서 신고를 안 하면 불고지죄로 처벌 받으니까요. 신고를 안 하면 내가 불고지죄로 신고를 할 테니까요.”

 

그리고 잠시 그들을 일별한 후 말을 이었다.

 

왜 안하죠? 구사대대장 한상복씨, 왜 안하죠? 내가 구속돼 콩밥을 먹을 게 불쌍해 그런가요? 좋습니다. 조합원을 위해 일하는 게, 오로지 조합원 편에 서서 일하는 게 불순분자, 빨갱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기꺼이 불순분자, 빨갱이가 되겠습니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불순분자, 빨갱이가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숫자를 헤아리듯 좌중을 둘러봤다. 구사대를 비롯한 어용조합원들, 관리자들 역시 하나하나 찍듯이 둘러봤다. 그런 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조합원의 편에 서서 조합원만을 위해 일하겠다고 엎드려 큰절까지 해 뽑아줬더니 회사 측의 대변인 노릇만하는 어용노조와 그 지지자들은 무엇일까요? 조합원의 피 같은 조합비로 운영되는 노동조합을 회사의 노무과로 만들고, 친일매국노들처럼 회사 측의 앞잡이가 되어 조합원들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들은 무엇일까요? ? 무엇일까요?”

 

조합원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뒷자리의 관리자들과 구사대, 어용노조 간부들을 훔쳐보기 바빴다. 그러나 관리자들과 구사대들은 애매한 표정으로 연단만 응시할 뿐이었다. 더러는 수첩을 꺼내든 채 뭔가를 열심히 적기도 했다. 나는 애써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은 채 그런 풍경들을 즐겼다.

 

내가 불순분자, 빨갱이면 이 사람들은 친일매국노 군사독재 새빨갱이죠. 일제시대, 일제에 빌붙어 민중들을 핍박하고 약탈한 친일매국노들과 똑같으니까요. 해방이 되어서도 자신들의 친일행각이 드러날까 두려워 미군정과 이승만,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빌붙어 살아온 친일매국노 군사독재자들인 것입니다. 정부고위직을 차지한 채, 민중들을 핍박하고 독립 운동가들과 무고한 양민들에게 빨갱이누명을 씌워 가두고 개죽임을 시킨 친일매국노 군사독재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애국자라고 우긴, 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유와 민주만 얘기하면 불순분자, 빨갱이타령만 해대는 친일매국노 군사독재후예들인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적으로 남에게 불순분자, 빨갱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진짜 빨갱이였던 것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장내는 환호와 함께 우레 같은 박수소리로 가히 축제 분위기였다. 뒷자리의 관리자들과 구사대들은 흘끔거리는 조합원들의 시선에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공격다운 공격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끌려 다니던 유도경기에서 막판 되치기한판 공격을 성공시킨 기분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안성공장과 부산공장도 마찬가지였다. 동토의 왕국, 철의 장막답게 관리자들과 구사대들이 연단 앞까지 뛰쳐나와 생난리를 쳤지만 나는 목소리를 높인 채 친일매국노 새빨갱이론을 설파했다. 공장을 자기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드는 어용후보 운동원들과는 달리 민주후보는 유세 때만 회사 내 출입이 허용된 곳이었다. 회사 밖 공청회도 감시가 심하다보니 불가능해 유일한 선거운동이 10분 유세였던 곳이었다.

이후 나는 당당한 불순분자, 빨갱이가 되었다. 구사대들이 불러주기 전에 스스로 불순분자, 빨갱이임을 자랑하며 다녔다. 그 대신 후렴처럼 따르는 게 어용노조와 구사대들을 향한친일매국노 새빨갱이였다. ‘친일매국노 군사독재 새빨갱이를 줄인 말이었다. 그들이 보이건 안 보이건, 멀리 있어도 그렇게 그들을 소리쳐 불렀다.

그들이 그랬듯 그 말을 주문처럼 외웠고, 그들이 한마디 하면 두 마디 세 마디씩 신나게 연호했다. 그럼 맥이 빠지는 듯 그들의 빨갱이타령은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자지러들었고, 비실비실 꼬리를 사린 채 자취를 감췄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불순분자 빨갱이 타령을 웅얼거렸지만, 그건 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깨갱거리며 도망치는 똥개의 뒷모습일 뿐이었다. 내 인생의 가장 통쾌했던 순간이었다.

 
 
 
 
 
목록
 
이전글 1931년 청주 적우연맹사건과 군시제사공장 노동자 파업_김미화
다음글 한내를 기록하다(8) 노동자역사 한내 창립행사 _ 정경원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